천년고찰, 서산 상왕산 개심사(開心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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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서산 상왕산 개심사(開心寺)..

by 정산 돌구름 2023. 4. 24.

천년고찰 서산 상왕산 개심사(開心寺)..


2023년 4월 24일, 천년고찰 서산 상왕산 개심사~
충남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에 있는 개심사(開心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의자왕 14년(654년)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하고 개원사(開元寺)라 하던 것을 고려 충숙왕 2년(1350년) 처능대사(處能大師)가 중창하며 개심사로 고쳤다.
그 후 성종 6년(1475년) 중창하였으며, 영조 16년(1740년) 중수를 거쳐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보물 제143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1984년 충남 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冥府殿) , 1997년 충남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심검당(尋劍堂), 무량수각(無量壽閣), 안양루(安養樓), 팔상전(八相殿), 객실, 요사채 등이 있다.

개심사 가람배치는 북쪽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을 놓고 그 전방에 누각 건물을 배치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과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구조는 다포 계통과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기법을 혼합하였다.

건물 전후면에서 보면 처마 밑의 공포는 다포집계통이며, 외부는 2출목, 내부는 3출목으로 공간포는 기둥 사이마다 2개씩 배치하였다.
외부 공포의 첨차 끝에 달린 쇠서는 2개의 앙설(仰舌)뿐이며, 건물의 옆면은 다포집 건축에서는 보기드문 맞배지붕 형식으로 중앙에 고주 2개를 세워 종량을 받치도록 하였다.

건축 내부에는 옥내주를 세우지 않고 대들보를 앞뒤 평주에 걸쳤으며, 그 위로 지붕 밑의 가구재가 모두 노출되어 있다.

종량 즉 마룻도리를 받친 대공(臺工)들은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며, 마루대공 좌우에 첨가된 소슬도 주심포집에서만 볼 수 있는 재료이다.

기본적인 구성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집 건물인 무위사(無爲寺) 극락전과 비슷하다.
1941년 해체·중수 공사를 하였을 때, 중앙 마룻도리를 받친 장여에서 “成化二十年甲辰六月二十日瑞山地象山開心重創…”이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는데 성화 20년은 성종 15년(1484년)에 해당한다.

1997년 8월 8일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괘불탱은 부처가 인도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한 법회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불화는 입상(立像)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상의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을 협시로 한 삼신불화(三神佛畵)의 형식이다.

화면 가운데 본존인 석가불을 크게 강조하였는데 둥근 얼굴과 비대한 두 어깨, 유난히 길고 굵은 팔, 짧은 하체 등은 비현실적이다.

거신형(擧身形) 광배 안에는 모란 당초무늬와 연화, 변형된 화문 등으로 가득 채웠고 불의 안에는 원문과 보상화무늬를 빽빽하게 장식하였다.

이 괘불도는 괴량감과 비대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비현실적인 신체 비례와 복잡하게 도안화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색채도 홍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해 신광 안의 문양과 어우러져서 화려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임금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

충남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명부전은 경내에서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웅전과 안양루를 잇는 남북 자오선(子午線)의 주축이 되는 일반적 가람배치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건립연대는 1889년(고종 26년)에 죽포(竹圃) 김설제(金說濟)가 작성한 개심사중창수리기에 1646년(인조 24년)에 신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물의 기단은 다듬은 돌로 가지런히 쌓았고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정면과 측면 3칸의 평면에 단층, 익공계(翼工系)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건물 내부의 가구는 무고주 5량으로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이 넓은 편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평주에 걸친 대들보 위에 익공형 화반(花盤)을 얹고 화반 위에 장혀와 중도리를 놓은 다음 종량(宗樑)을 걸치고 그 가운데 키가 큰 화반을 놓아 마루 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심검당은 기록된 문헌이 없어 정확한 건축연대를 알 수 없다.

성종실목에 1475년(성종 6년) 6월에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가야산에 사냥을 나왔다가 산불을 내어 개심사의 건물이 화재로 전소된 것을 1484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을 중창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1914년 대웅전 건물을 해체 보수할 당시에 마루 도리 속에서 성종 15년(1484)에 중창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심검당도 이때에 같이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양식은 화강석재를 견치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주두 위에 공포를 짜올린 주심포계 양식이다.

가구(架構)는 5량이고 초제공 밑 주두 아래로 운각(雲刻)을 한 보아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익공계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건물의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5칸의 덧집을 달았다.

안양루(安養樓)는 불교의 의식법구인 법고와 목어·운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대웅보전 맞은 편에 있다. ‘안양(安養)’이란 ‘극락세계’라는 뜻이다.

정면 5칸·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연등천정이다.

안양루 정면에는 ‘상왕산 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는데 편액의 글씨는 해강 김규진(金圭鎭)이 해서체로 쓴 것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譯)을 주제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개심사 대웅보전 앞마당에 위치한 오층석탑은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심사를 중수한 1350년(충정왕 2년)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세워져 있고, 지대석의 한 변이 170㎝이며, 그 위에 복판복련(複瓣覆蓮)[아래로 향하고 있는 겹잎의 연꽃]을 돌린 면석 받침을 올려놓았다.

기단 면석은 한 변이 약 79㎝이며 높이는 48㎝인데 우주를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옥신에는 우주만 표현되어 있을 뿐 탱주는 없다.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3단으로 매우 간략하게 형태만 갖추고 있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전각은 반전되어 시대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상륜부를 받치는 부]과 연봉이 남아 있다.

석탑을 빙 둘러 낮은 돌기둥 8개로 사각형의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고, 일부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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