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비슬산 대견사와 대견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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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비슬산 대견사와 대견사지 삼층석탑..

by 정산 돌구름 2023. 4. 22.

대구 비슬산 대견사와 대견사지 삼층석탑..


2023년 4월 21일, 비슬산 대견사와 대견사지 삼층석탑..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에 있는 대견사(大見寺)창건자가 미상이나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사찰이다.

당나라 문종이 절을 지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낯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찾게 하였다.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어 찾아낸 곳이 이 절터이다.

이 터가 대국에서 보였던 절터라 하여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지만 1416년(태종 16년)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년) 11월 29일 이 절에 있던 장륙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이 땀을 흘려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종파는 교종(敎宗)에 속하였다고 한다.

절의 폐사에는 빈대와 관련된 일반적인 설화가 전래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1900년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재인이 중창하였으나 1908년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1917년 다시 폐허화되었다.

2011년 11월 대견사 재건 공사가 착공되어 2014년 3월 적멸보궁, 요사채, 산신각, 목조와가 등 건물 4동이 완공되었다.

이로써 대견사가 폐지된 지 100여년 만에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30m, 높이 6m의 축대가 남아 있고, 무너진 구층석탑과 거대한 석조선각불상,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굴대좌(洞窟臺座) 등이 있다.

이 중 축대는 현재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동굴은 참선 또는 염불도량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도굴꾼에 의해서 무너진 구층석탑은 원래 높이 4.5m, 기단 너비 1.2m이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전성기에 이 절은 비슬산의 중심사찰이었다고 한다.

산 밑에 있는 소재사(消災寺)는 옛날 이 절의 식량이나 각종 생활용품·의식용품 등을 공급하던 곳이었다고 하며, 소재사 앞터에는 방앗간을 비롯하여 두부공장·기왓골 등도 있었다 한다.

현재 이 절의 축대 밑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으며, 가뭄 때면 달성군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

대견사지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건립된 3층 석조 불탑으로 1995년 대구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3.67m로 자연암벽 위에 2층기단을 구축하고 삼층탑신을 올렸는데 전체적으로 완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나의 석재로 구성된 하층기단의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1개의 탱주(撑柱)를 새겼는데 상면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양 우주만이 새겨졌고, 상면에는 하나의 석재로 조성된 상층기단 갑석(甲石)이 놓여 있다.

갑석의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상면에는 조출된 각형 2단 받침이 초층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새겨져 있는데, 초층탑신이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어 있다.

옥개석은 파손이 심한데, 층마다 각형 4단의 옥개받침을 조출하였다.

낙수면의 경사는 약간 급하게 조성하였으며,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 전각(轉角)에 이르러 약간 반전되고 있다.

옥개석의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굄대가 조출되어 있다.

이 석탑은 9층탑이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전체적인 비례로 보아 본래 3층석탑으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석탑의 전면에는 배례석(拜禮石)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석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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