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기행] 사명대사의 충훈이 서린 표충사당(表忠祠堂)과 재악산 표충사(表忠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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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기행] 사명대사의 충훈이 서린 표충사당(表忠祠堂)과 재악산 표충사(表忠寺)..

by 정산 돌구름 2019. 11. 20.


사명대사의 충훈이 서린 밀양 표충사당(表忠祠堂)과 재악산 표충사(表忠寺)..


 

2019년 11월 19일, 천황산-재약산 산행길에 만난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의 표충사..

표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표충사는 신라 태종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창건 당시 표충사의 절 이름은 죽림사()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흥덕왕 4년(829년)에 절 이름이 영정사()로 바뀌었다. 인도 스님이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황면선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들어와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할 삼층석탑을 세우고 절을 중창한 이후이다.
영정사라 불린 유래는 나병에 걸린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병을 고치기 위해 두루 약수를 찾아다니다가 이곳 죽림사에서 약수를

마시고 완쾌되자 흥덕왕이 기뻐하며 가람을 중창케 하고 절 이름도 바꾸었다는 것이다.

신라 진성여왕 3년(889년)에는 보우국사()가,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에는 삼국유사로 유명한 일연국사가 이곳에서

천 명이 넘는 승려를 모아놓고 수도를 하며 선풍을 크게 떨쳤다고 전한다.

표충사는 또한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년)에 밀양군수 김창석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한편으로 관찰사 조태억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계(啓)를 올려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을 다시 세워 사명대사와 스승인 서산대사, 임진왜란 때 금산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한 전각을 사당 왼쪽에 지어 사명대사가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간 원불(願佛)을 대구 용연사에서 가져 와서 봉안하고,

동서쪽에 요사를 지어 수호하는 승려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뒤 남붕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년)에 사명대사의 행적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을 면제하고, 전답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남붕이 총책임을 맡고, 연초·취안·최심·상현 등이 도왔다.

사우를 3칸으로 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사명대사의 영정을 중앙에 모시고 동쪽에 서산대사, 서쪽에 기허당을 각각 모셨다.

또한, 원불전·노전·예제문·의중당·자하문·명인루를 세웠다.

사당의 좌우에 선원(禪院)과 교당(敎堂)을 세웠는데, 향교와 서원의 동·서 재실(齋室)과 같은 모양으로 하였다.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하여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하였다.

그러나 향례를 지낼 때마다 바람과 비를 만나게 되고, 산세가 옹색하고 길이 험하여 살고 있는 자나 제향에 참여하러 다니는

사람 모두 이를 병폐로 생각하여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남붕이 옮기려고 뜻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1838년(헌종 4년) 사명대사 8세손인 천유가 예조에 보고하여 부사

심의복의 도움으로 1839년에 영정사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영정사는 이미 승려가 살지 않는 폐사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사원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하여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사우를 신축하고 사명대사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하여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을 짓고 의중당 좌우를 동·서 재실로 개명했으며, 명부전 자리에 영당을 건립하였다.

남계료는 심검당으로, 원통료는 설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나한전 등은 그대로 두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131호인 대광전, 팔상전, 명부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인 만일루, 표충서원 등이 있다.

또한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垸)은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시대 향로이다.

밖에 보물 제467호인 표충사 삼층석탑, 중요민속자료 제29호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錦襴袈裟)와 장삼(長衫), 경유형문화재

제14호인 표충사 석등, 경 유형문화재 제15호인 표충사비 등이 있다.

절 일원이 경남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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