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아픈 상처가 남은 영동 노근리 평화공원, 장미꽃이 만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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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아픈 상처가 남은 영동 노근리 평화공원, 장미꽃이 만발하다..

by 정산 돌구름 2019. 6. 18.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가 남은 영동 노근리 평화공원, 장미꽃이 만발하다..


 

2019년 6월 15일(토), 경북-충북-충남-전북으로 떠난 3박4일 캠핑여행 2일차..

 

영동 민주지산 산행을 마치고 오후에 찾은 곳은 노근리 평화공원..

역사 속의 노근리양민학살사건(件)은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양민

300여 명을 사살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미군이 노근리의 경부선 철도 아래와 터널, 속칭 쌍굴다리 속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을 무차별 사격하여 300여 명이 살해당했다.
1999년 9월, 미국 AP통신은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학살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AP통신의 보도는 비밀해제된 당시 군작전명령 중 '피난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라는 명령의 원문(), 미군 제1기갑사단과

미군 육군 25사단 사령부의 명령서 등 미군의 공식문건 2건과 참전미군 병사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였다.

당시 미군측은 소청을 기각하였고, 이 사건은 그대로 역사의 미궁 속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4년 4월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이 책에 주목한 <한겨레>는 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그해 5월4일자로 싣고, 7월20일자에는 다시 집집마다 '떼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스케치기사로 실었다.

그후 월간지 <말>이 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 취재를 시작하여 그해 7월호에 ‘6·25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명 학살사건’

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한 내막을 기사화하였다.

1996년 MBC는 <말>지의 취재내용을 바탕으로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다시 이 사건을 재조명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내 어떤 언론도 이 사건을 주목하지 않았다.

다만 <말>지가 1999년 6월호에서 ‘미 제1기병사단 병사들 마침내 입 열다.’ 제하의 기사로 다시 속보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1999년 말 유족들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미육군성은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한국측과 협의할

예정임을 밝혔다.

2000년 1월 9일 미국측 대책단장인 루이스 칼데라 미육군성 장관과 민간전문가 7명을 포함한 18명의 미국측 자문위원단이

내한하여 12일까지 한국측 조사반으로부터 사건개요 및 조사상황을 청취한 뒤 충청북도 영동의 사건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들의

증언과 요구사항을 들었다.

노근리 학살현장은 지금은 공원화되어 평화공원이 조성되었고 아픈 현장은 경부선 열차가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