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영동 천태산 영국사와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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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영동 천태산 영국사와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by 정산 돌구름 2019. 6. 19.

천년고찰 영동 천태산 영국사와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2019년 6월 16일, 경북-충북-충남-전북으로 떠난 3박4일 캠핑여행 셋째날, 천태산 산행길에 찾은 영동 천태산 영국사..

 

영국사(寧國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8년(66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하였고, 효소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던 곳으로 알려졌다.

고려 고종() 때 감역() 안종필()이 왕명으로 탑·부도·금당()을 중건하고, 국청사()라고 하였다.

뒤에 다시 공민왕에 의하여 영국사로 불리게 되었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홍건적들이 황해도를 건너서 개경까지 육박하자 왕은 이 절로 피난하였다.

국태민안의 기도를 계속하는 한편, 이원() 마니산성에 근위병을 포진하여 놓았다.

이 절 맞은편에 팽이를 깎아놓은 듯한 뾰족한 봉우리가 있는데 왕은 그 봉우리에 왕비를 기거하도록 해놓고 옥새를 맡겨두었다.

그 뒤 마니산성의 근위병들이 홍건적을 함정에 빠뜨려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여 난을 평정하자, 공민왕은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평군민안()이 되었으니 절 이름을 영국사로 바꾸라 하고 현판을 써준 뒤 떠났다 한다.

또, 일설에는 조선 태조 때 세사국사()가 산 이름을 지륵으로, 절 이름을 영국사로 하였다 하나 신빙성이 없다.

그 뒤 1893년(고종 30년) 춘계() 등이 삼축당()을 중수하였으며, 1934년 영동군수 이해용 등이 사찰을 중수하였다.

1942년에 옛 절터에 있던 삼층석탑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고, 1979년에는 법산()이 대웅전과 요사 등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533호인 영국사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534호인 영국사원각국사비(), 보물 제535호 영국사망탑봉

삼층석탑(), 보물 제532호인 영국사부도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된 수령 약 1,300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또한, 절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높이 3.5m의 석성지()가 남아 있다.

 

 

 

 

 

만세루(萬歲樓)..

대웅전 앞마당 앞쪽 경사면에 대웅전과 중심축을 맞추어 동향시킨 누각이다.

 

경사진 지형에 세 단으로 축대를 구성하고 제2단 축대에 높이를 맞추어 세웠으며, 최근에 조영한 건물이다.

누하 축대의 계단 위치로 보아 대웅전 앞마당, 절의 중심 영역으로 누하진입을 하도록 하기 위한 누문으로서 세운 것이다..

 

 

영국사 대웅전(大雄殿)..

 

충북유형문화재 제61호(1980년1월9일)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3출목(三出目) 7포작(七包作)이다.

공포는 내외 삼출목(三出目)으로 쇠서(牛舌) 위에 연화(蓮華)를 조각한 조선 후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창방 위의 평방은 건물 측면 앞쪽으로만 짧게 놓여 이 지방 특징인 다포계 맞배지붕을 꾸미는데 흔히 보이는 형식이다..

 

대웅전 후면에 걸려있는 '寧國寺重修記'는 1893년(고종 30)에 척죽당(隻竹堂)이 쓴 것으로 춘계(春溪)를 비롯한 승려들에 의한

영국사의 중수를 기록하고 있다.

또 1934년에 주봉조사가 쓴 寧國寺重修記에도 주봉조사를 중심으로 한 영국사의 중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중수공사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이들 기록과 함께 대웅전의 양식으로 보아 1893년 또는 1934년에 새로 지은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특히 1934년에 창건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대웅전은 1974년에 단청불사가 있었음이 대웅전 후면에 걸려 있는 '寧國寺大雄殿丹靑佛事文'에 기록되어 있다.

1979년에 영동군에서 해체보수를 실시한 바 있다..

 

불단은 수미좌 형식의 목조대좌를 마련하여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의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다.

 

본존인 석가여래좌상은 왼손을 결가부좌한 발 위에 올리고, 오른손은 오른발 무릎 위에 올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상호는 약간 미소를 머금은 근엄한 표정이며, 손과 발은 신체에 비해 두텁고 경직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좌우의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도 조각수법은 본존과 비슷하다. 본존 뒤의 불벽에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걸었다.

 

원래는 숙종35년(1705년)에 조성한 보물 제1397호인 영산회상도가 있었으나 현재 수덕사 근역성보관으로 옮겨져 보관 중이다.

현재 이곳에 걸려 있는 영산회상도는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영산회상도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모습으로 신광과 두광을 갖추었는데,

화면 상단에서 하단에 이르도록 크게 그렸음이 특징이다.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문수와 보현, 미륵과 지장, 관음과 대세지, 제장애와 금강장 보살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화면 상단에는 석가여래의 두광 좌우로 10대 제자와 화불을 그렸으며, 하단 좌우에는 아래위로 사천왕을 배치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사천왕 10대 제자 및 2화불을 배열한 전형적인 영산회상도의 구성이다..

 

 

1971년 보물 제533호로 지정된 영국사 삼층석탑(三層石塔)..

원래 옛 절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42년에 주봉조사(朱奉祖師)가 지금의 대웅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장대석 4, 5개씩을 1변으로 삼고 석단을 구축한 위에 건립하였는데 현재의 사찰 방향을 따라 동향을 취하고 있다.

높이 3.15m인 이 석탑은 신라식 일반형으로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봉안하였다.

지대석은 따로 없으며 하층기단 면석 하단에 굽을 둘러 통식의 각형받침을 삼았다.

면석은 4매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3구씩의 세장한 안상이 조각되었다.

상층 기단면석(面石)과 첫층 옥신(屋身)이 거꾸로 놓여 있어 옮겨 세울 때 잘못 복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같은 돌이며 초층 탑신부에 문비(門扉)가 조각되었고 자물통과 원형 문고리도 나타나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에 새겨진 안상이 독특하며, 1층 탑신에 새겨진 자물통과 문고리가 표현된 문비의 조각이 특징적이며 탑신에

비해 넓게 조성된 지붕돌 등에서 9세기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노반을 제외한 상륜부의 부재가 모두 보존되어 전하는 귀중한 탑으로 통일신라 하대 탑 중 우수한 석탑이다..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하신 월서스님의 글이라고 한다..

극락보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데 1,000년의 은행나무로 조성된 목조불이라 한다.

전각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적은 느낌이다..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된 은행나무..

 

영국사가 위치한 산속 분지의 동쪽 끝 계곡 옆에 위치한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1,3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31.4m, 흉고 둘레가 11.54m이며, 약 2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갈려졌는데, 가지는 동서 25m, 남북 22m 정도로 뻗었다.

서쪽의 가지 하나가 밑으로 자라서 땅에 닿아 새로운 나뭇가지가 자랐는데 높이가 5m 이상이며, 흉고 직경이 0.2m 이상이다.

국난이 있을 때마다 소리 내어 운다고 하며, 격년으로 많은 은행이 열린다고 한다.

특이한 형태로 자란 은행나무로 영국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위치해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절의 풍경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보물 제534호(1971년 7월 7일)로 지정된 영국사 원각국사비(圓覺國師碑)..

전체 높이 371㎝, 비신 높이 165㎝, 너비 78㎝, 두께 13㎝이다.

현재 귀부()와 이수()는 전하나, 점판암의 비신은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하다.

귀부는 전형적인 고려 양식으로 둔중하다.

이수에는 형식적인 운룡문이 새겨져 있고, 앞면 가운데에는 ‘원각국사비명()’이라는 전액()이 양각되어 있다.

원각국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선사·대선사가 되었르며, 1174년(명종 4년)에 입적하자 왕은 그의 유해를 영국사에 안치하였다.

비문에는 찬자()·서자()와 건립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과 『대동금석서』에 의하면 찬자는

한문준()이며 건립 연대는 1180년이다.

글씨는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로 당시 성행한 사경()의 영향이라고 본다.

비의 뒷면에는 원각국사 문도들의 직명이 새겨져 있다..

 

비의 형태는 거북 모양의 비받침인 귀부(龜趺) 위에 비몸을 세우고, 비머릿돌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거북 머리는 퇴화되었고, 거북등의 6각형 무늬와 비를 끼워두는 곳의 덩굴무늬는 생략되었다.

비몸은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하다.

비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다.

 

 

 

 

 

 

앞면 중앙에는 ‘원각국사비명(圓覺國師碑銘)’이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롸재 제185호(1996년 1월 5일) 영국사 구형승탑(球形僧塔)..

영국사 원각국사비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사리탑으로 사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수가 없다.

 

탑의 기단부(基壇部)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8각의 아래받침돌을 세우고, 역시 8각의 윗받침돌을 올려놓은 구조이다.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위가 반듯한 윗받침돌은 밑으로 한겹씩의 연꽃무늬를 둘렀다.

탑신(塔身)의 몸돌은 둥근 공모양이며, 지붕돌은 8각으로 여러 조각들이 생략되어 밋밋하고 투박하다.

지붕돌 위로는 꽃봉오리모양을 한 머리장식을 올려 놓았다.
각 부분의 조각들이 생략되거나 간략화되고, 연꽃잎이 한겹으로 되어 있어 고려말·조선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원각국사비 뒷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원각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4호(1996년 1월 5일) 영국사 석종형승탑(石鍾形僧塔)..

영국사 원각국사비 뒤쪽에 서 있는 승려의 사리탑으로 사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마련된 기단(基壇)은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8각이다.

기단의 가운데받침돌을 제외한 아래·윗받침돌에는 각기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는데 꽃잎은 모두 한겹씩이다.

그 위로는 종모양의 탑신이 올려져 있는데 그 위의 머리장식조차 종의 고리를 떠올리게 하여 실제의 종과 거의 비슷하다.
바닥돌부터 머리장식까지 모두 6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종형 부도이면서도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연꽃잎도 모두 한겹으로 표현되어 있어 고려말·조선초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뒷편으로는 원각국사비가 서 있어서, 원각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리지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