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 9일(제3일) - 1.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 기념상(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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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유럽(스페인 포르투갈)

스페인-포르투갈 9일(제3일) - 1.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 기념상(마드리드)

by 정산 돌구름 2019. 4. 7.

스페인-포르투갈 9일(제3일) - 1.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 기념상(마드리드)


 

3일차는 아침 8시 호텔을 출발하여 마드리드 시가지 관광에 나선다.

먼저 세르반테스 기념상이 있는 광장에 도착한다.

 

★ 에스파냐(España)수도 마드리드(Madrid)

이베리아반도의 중앙부, 해발고도 635m의 메세타 고원에 위치하며, 만사나레스강()에 임한다.

유럽의 수도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연강수량 419mm로 건조하다.

기온의 일교차가 크며 겨울 평균 기온은 -1℃∼7℃, 여름은 15℃∼30℃이다.

에스파냐의 정치·문화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산업도시로서의 중요성도 크며, 도로·철도 및 항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인구상으로는 유럽 제4의 대도시이다.

마드리드는 10세기경 똘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어인이 세운 성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는 마헤리트라 불렀다.

이 성은 마드리드가 수도로 된 후에는 왕궁이 되었고, 동시에 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1083년 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이를 탈환하였으나 이때는 국왕의 임시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1561년 펠리프 2세가 당시의 강대한 왕국을 다스릴 중앙정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전도 바야돌리드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세기 초에 일시 궁전이 바야돌리드로 옮겨졌던 때를 제외하면, 마드리드는 그 후 일관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구()시가는 17∼18세기에 건설되었다.

1808년에는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로 유명한 5월 2일의 시민저항이 있었고, 다음날 프랑스군에 의한

보복이 있었다.

구시가의 중심은 ‘라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이라 부르는 타원형 광장이며, 서쪽으로는 왕궁 및 부속 왕립 무기고와 통하고,

남서쪽으로는 17세기 야외극장이었던 마요르 광장이 있다. 그 앞쪽의 세바타 광장에서는 아침에 채소와 식료품 시장이 열린다.
태양의 문 북쪽을 동서로 활처럼 휘어 뻗은 호세안토니오가()와 동쪽으로 뻗은 알칼라가에는 은행·호텔·클럽과 고급상점들이

집결하여 중심 상점가를 이룬다.

태양의 문 동쪽은 거의 남북으로 프라도가()가 뻗고, 그 동쪽에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

프라도가는 다시 레코르테스·카스티야·헤네랄리시모 등 여러 거리로 이어져 관공서와 고급주택지를 이룬다.

구시가를 둘러싼 신시가는 19세기 후반의 철도 개통을 전후해서 주택지 ·공장 등이 들어서고 교통시설이 갖춰진 지역이다.

마드리드는 정치도시로서 궁전이 있었을 뿐 산업은 미미하였으나,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후 에스파냐 정부가 내전에 의한

파괴의 복구 과정에서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건설노무자를 받아들인 것이 마드리드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전기기계·항공기·오토바이 등의 기계공업과 식품가공·제지·

화학 등의 여러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정보산업으로서 출판 ·인쇄업종도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전해 왔다.
마드리드의 발전 속도는 인구증가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875년 35만, 1910년 60만, 1930년 95만, 1950년 163만으로 계속 증가하고, 1981년에는 319만 명으로 바르셀로나를 능가하였다.

예전에 시주변이었던 동쪽의 유명한 레티로 공원과 북서쪽의 대학은 시에 포함되었고, 서쪽 교외에 있던 카사데감포 대공원도

지금은 시에 접한다. 교통기관으로는 지하철·노면전차·시내버스·트롤리버스 등이 있으며, 북역·남역·델리시아스역에서 국내

각지로 향하는 철도가 사방으로 뻗었다.

남쪽 교외의 바라하스에는 공항이 있다.

1738∼1764년에 건설된 왕궁은 높이 30 m의 건물로 방이 1,800여 개나 되고, 내부는 고야의 그림, 티에폴로의 벽화, 많은

테피스트리로 장식되었다. 왕궁에 부속된 왕립 무기고는 갑옷과 무기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프라도 미술관은 에스파냐가 세계에서 자랑하는 미술관으로 1819년 에스파냐왕실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개설되었다.

중세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에스파냐·플랑드르·이탈리아의 그림이 많으며, 특히 에스파냐 3대 화가인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은 최고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반 데르 바이덴의 ‘십자가 하강’, 보시의 ‘일락의 낙원’, 티치아노의 ‘음악을 즐기는 비너스‘, 엘 그레코의

‘오순절()’, 벨라스케스의 ‘브레다 성()의 항복’, ‘궁녀들’,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 ‘나체의 마하’ 등 수없이 많다.

 

★ 최초의 근대 소설 ‘돈 키호테(Don Quixote)’를 지은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돈 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는 1547년 9월 29일, 마드리드 인근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이지만 훗날 먼 친척 이름인 ‘사아베드라’(Saavedra)를 덧붙여 사용한 관계로

오늘날에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 vedra)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 의사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무능해서 1551년에는 빚 때문에 전 재산을 차압당하고 투옥되기까지 했다.

이후 가족이 바야돌리드(Valladolid)와 세비야(sevilla) 등 여러 지역을 전전하는 와중에도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르반테스의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예수회 계열의 학교를 다니면서 인문 교육을 받았으리라 추정될 뿐이다.

그가 19세 때인 1566년에 쓴 소네트(Sonnet)가 최초의 창작으로 여겨지며, 1568년에 사망한 여왕 이사벨 1세를 추모하는 공동

작품집에 시 몇 편을 썼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작가를 지망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은 오히려 군인이었다.

1569년에 세르반테스는 교황의 사절로 에스파냐를 방문한 추기경의 비서가 되어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베네치아에서 그곳에

주둔한 에스파냐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1571년 10월 7일, 베네치아와 제노바와 에스파냐 연합군이 투르크 군과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레판토해전이 벌어졌다.

그는 전투 중에 가슴과 왼손에 총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왼손을 쓰지 못하고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5년이나 더 군인으로 복무하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28세 때인 1575년, 세르반테스는 드디어 퇴역을 결심하고 고향 에스파냐로 향한다.

그런데 출항 엿새 만에 그가 탄 배는 해적선의 습격을 받았고, 세르반테스는 졸지에 해적의 포로가 되어 알제리로 끌려간다.

해적이 요구한 몸값은 가난한 세르반테스의 가족이 결코 마련할 수 없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외부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게 되자 세르반테스는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네 번이나 감행되었던 탈출 시도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때마다 그는 혹독한 처벌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를 딱하게 생각한 알제리의 에스파냐 동포들이 몸값을 대신 지불해 준 덕분에 세르반테스는 5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1580년에 마침내 에스파냐로 귀국한다. 1584년 37세의 나이로 19세의 카탈리나 데 살라사르(Catalina de Salazar)와 결혼한다.

군인 시절의 인맥을 이용해 공직으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생계가 막막해진 세르반테스는 소싯적의 글 솜씨를

발휘해 시와 희곡과 소설 등을 써서 팔았다.

1585년에 발표된 처녀작 소설 [라 갈라테아(La Galatea)]는 호평을 받았지만 큰 명성을 얻진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말단 관리가 된 그는 이후 10여 년간 무적함대의 물자 조달관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세금 징수관으로 일했다.

그는 여러 번 비리혐의로 고발당해 징역형을 받았는데 그중 한 번인 1597년 가을에 세비야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돈 키호테’를

구상했던 것으로 전한다.

세르반테스가 57세 때인 1605년에 출간된 ‘돈 키호테’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생활고로 인해 출판업자에게 판권을 넘겨버린

까닭에 경제적 이득을 얻지는 못했다.

말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해서 아예 수도회에 들어갔지만, 그런 와중에도 문필생활을 병행하여 ‘모범소설집’(1613), ‘돈 키호테’

제2부(1615) 등의 작품을 연이어 펴냈다.

마침내 수도사로 정식 서원을 했을 즈음, 그는 이미 수종증이 악화되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1616년 4월 23일, 세르반테스는 6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이 날짜는 셰익스피어의 사망일과도 같다.

 

 

 

 

 

 

 

 

 

 

 

 

 

 

 

 

 

 

 

 

 

 

 

 

 

 

 

 

 

 

Nathalie / Julio Iglesi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