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 9일(제3일) - 3. 대광장으로 불리는 마요르 광장(마드리드)
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유럽(스페인 포르투갈)

스페인-포르투갈 9일(제3일) - 3. 대광장으로 불리는 마요르 광장(마드리드)

by 정산 돌구름 2019. 4. 7.

스페인-포르투갈 9일(제3일) - 3. 대광장으로  마요르 광장(마드리드)


 

3일차는 아침 8시 호텔을 출발하여 마드리드 시가지 관광에 나선다.

먼저 세르반테스 기념상이 있는 광장을 보고 태양의 문으로 불리는 푸에르토 델 솔을 보고 마요르 광장에 도착한다.

 

★ 대광장으로도 불리는 마요르 광장(Plaza Mayor)

대광장으로도 불리는 마요르 광장은 마드리드의 정치·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이다.

1619년 펠리페 3세 시대에 완성한 이 광장은 100×200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136개 방을 가진 4층 건물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 자리 잡고 있다.

마드리드의 역사와 함께 해온 마요르 광장은 국왕 취임식과 각종 종교 의식, 재판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투우 경기장으로 쓰이는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광장 주변은 레스토랑과 카페 등이 가득하며 일요일 오전에는 우표, 옛날 화폐 등 골동품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이곳은 매년 마드리드 시의 수호성인 성 이시드로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광장을 세우자는 계획은 스페인 펠리페 2세(Felipe Ⅱ)가 1561년 마드리드의 왕궁으로 옮겨온 후 1580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Juan de Herrera)가 이를 실행했다.

데 에레라는 1590년대에 광장에 들어선 첫 건물인 두 개의 탑이 있는 '카사 데 라 파나데리아(Casa de la Panadería)'(예전에는

제빵사 길드가 있던 곳)를 지었다.

현재 이 건물을 치장하고 있는 우화적인 벽화는 1992년에 그려진 것이다.

데 에레라의 제자인 후안 고메스 데 모라가 펠리페 3세 시대인 1619년에 광장을 완성했다.
1616년에 제작된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은 1848년에 광장으로 옮겨와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1631년, 1670년, 1790년 세 차례에 걸친 화재가 광장에 피해를 입혔다.

마지막 화재가 일어난 이후 광장을 재건축하는 작업은 건축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주변의 건물에 층을 더

지어 현재의 5층 높이로 만들었고 아치형 포티코 여러 개를 설치했다.

이 재건축 작업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1854년에 마무리되었다.
마요르 광장에서는 투우, 가면무도회, 왕실 결혼식, 대관식 등의 행사가 거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곳이 항상 단순한 사교적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이 광장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Ávila), 세비야의 이시도르(Isidore of Seville),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 등의

성인이 시성 받은 장소이다. 또한 17세기 스페인 종교재판이 성행했을 때 이단자 등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보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 에스파냐(España)수도 마드리드(Madrid)

이베리아반도의 중앙부, 해발고도 635m의 메세타 고원에 위치하며, 만사나레스강()에 임한다.

유럽의 수도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연강수량 419mm로 건조하다.

기온의 일교차가 크며 겨울 평균 기온은 -1℃∼7℃, 여름은 15℃∼30℃이다.

에스파냐의 정치·문화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산업도시로서의 중요성도 크며, 도로·철도 및 항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인구상으로는 유럽 제4의 대도시이다.

마드리드는 10세기경 똘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어인이 세운 성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는 마헤리트라 불렀다.

이 성은 마드리드가 수도로 된 후에는 왕궁이 되었고, 동시에 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1083년 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이를 탈환하였으나 이때는 국왕의 임시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1561년 펠리프 2세가 당시의 강대한 왕국을 다스릴 중앙정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전도 바야돌리드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세기 초에 일시 궁전이 바야돌리드로 옮겨졌던 때를 제외하면, 마드리드는 그 후 일관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구()시가는 17∼18세기에 건설되었다.

1808년에는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로 유명한 5월 2일의 시민저항이 있었고, 다음날 프랑스군에 의한

보복이 있었다.

구시가의 중심은 ‘라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이라 부르는 타원형 광장이며, 서쪽으로는 왕궁 및 부속 왕립 무기고와 통하고,

남서쪽으로는 17세기 야외극장이었던 마요르 광장이 있다. 그 앞쪽의 세바타 광장에서는 아침에 채소와 식료품 시장이 열린다.
태양의 문 북쪽을 동서로 활처럼 휘어 뻗은 호세안토니오가()와 동쪽으로 뻗은 알칼라가에는 은행·호텔·클럽과 고급상점들이

집결하여 중심 상점가를 이룬다.

태양의 문 동쪽은 거의 남북으로 프라도가()가 뻗고, 그 동쪽에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

프라도가는 다시 레코르테스·카스티야·헤네랄리시모 등 여러 거리로 이어져 관공서와 고급주택지를 이룬다.

구시가를 둘러싼 신시가는 19세기 후반의 철도 개통을 전후해서 주택지 ·공장 등이 들어서고 교통시설이 갖춰진 지역이다.

마드리드는 정치도시로서 궁전이 있었을 뿐 산업은 미미하였으나,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후 에스파냐 정부가 내전에 의한

파괴의 복구 과정에서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건설노무자를 받아들인 것이 마드리드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전기기계·항공기·오토바이 등의 기계공업과 식품가공·제지·

화학 등의 여러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정보산업으로서 출판 ·인쇄업종도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전해 왔다.
마드리드의 발전 속도는 인구증가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875년 35만, 1910년 60만, 1930년 95만, 1950년 163만으로 계속 증가하고, 1981년에는 319만 명으로 바르셀로나를 능가하였다.

예전에 시주변이었던 동쪽의 유명한 레티로 공원과 북서쪽의 대학은 시에 포함되었고, 서쪽 교외에 있던 카사데감포 대공원도

지금은 시에 접한다. 교통기관으로는 지하철·노면전차·시내버스·트롤리버스 등이 있으며, 북역·남역·델리시아스역에서 국내

각지로 향하는 철도가 사방으로 뻗었다.

남쪽 교외의 바라하스에는 공항이 있다.

1738∼1764년에 건설된 왕궁은 높이 30 m의 건물로 방이 1,800여 개나 되고, 내부는 고야의 그림, 티에폴로의 벽화, 많은

테피스트리로 장식되었다. 왕궁에 부속된 왕립 무기고는 갑옷과 무기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프라도 미술관은 에스파냐가 세계에서 자랑하는 미술관으로 1819년 에스파냐왕실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개설되었다.

중세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에스파냐·플랑드르·이탈리아의 그림이 많으며, 특히 에스파냐 3대 화가인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은 최고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반 데르 바이덴의 ‘십자가 하강’, 보시의 ‘일락의 낙원’, 티치아노의 ‘음악을 즐기는 비너스‘, 엘 그레코의

‘오순절()’, 벨라스케스의 ‘브레다 성()의 항복’, ‘궁녀들’,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 ‘나체의 마하’ 등 수없이 많다.

 

 

 

 

 

 

 

 

 

 

 

 

 

 

 

 

 

 

 

 

 

 

 

 

 

 

 

 

 

 

 

 

 

Caruso / Julio Iglesi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