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안동 하회(河回)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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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안동 하회(河回)마을

by 정산 돌구름 2016. 8. 17.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안동 하회(河回)마을

 

2016년 8월 15일, 병산서원을 둘러보고 화회마을로 들어선다.

여전히 폼염특보가 내려 37℃를 웃도는 뜨거운 날씨에 주차장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느낌이다.

3,000원의 입장료를 내고나면 마을까지 셔틀버스로 이동한다.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로 2010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중요민속자료 제122(1984110)로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한 풍산유씨(柳氏)의 씨족마을이다.

하회마을의 지형을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룬 형국을 말한다.

강 건너 남쪽에는 영양군 일월산(日月山)의 지맥인 남산(南山)이 있고, 마을 뒤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

마을 중심부까지 완만하게 뻗어 충효당(忠孝堂)의 뒤뜰에서 멈춘다.

강 북쪽으로는 부용대(芙蓉臺)가 병풍과 같이 둘러앉아, 산천 지형 또한 태극형 연화부수형국을 이룬다.

처음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 중심의 씨족마을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이들 두 집안은 떠나고,

풍산류씨(豊山柳氏)가 중심이 되어 터를 닦아 그 후 600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씨족마을이다.

유성룡(柳成龍)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임진왜란의 피해도 없어서 전래의 유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허씨(許氏) 터전에, 안씨(安氏) 문전에, 유씨(柳氏) 배판이라는 말대로 최초 마을 형성은 허씨들이 이룩하여 하회탈 제작자도

허도령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허씨들이 벌초를 한다고 한다.

화천(花川)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이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과 북촌댁,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은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이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유씨들이, 변두리에는 각성들이 살고 있는데, 생활방식에 따라 두 문화가 병존한다.

현재 하회마을에는 100여채의 전통 한옥이 있는데, 그 가운데 12채가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보물 제306호인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414호 충효당(忠孝堂), 중요민속자료 제84호 북촌댁(北村宅), 중요민속자료 제85

원지정사(遠志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6호 빈연정사(賓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7호 유시주가옥(柳時柱家屋), 중요민속자료

88호 옥연정사(玉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 겸암정사(謙菴精舍), 중요민속자료 제90호 남촌댁(南村宅), 중요민속자료

91호 주일재(主一齋), 중요민속자료 제177호 하동고택(河東古宅) 등이다.

또 서민들의 놀이였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어 하회마을은

우리의 전통 생활문화와 건축양식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08월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부용대를 마주하고 있는 원지정사와 빈연정사는 류성룡과 류운룡(柳雲龍) 형제가 학문에 정진하며 많은 책을 남긴 장소로

동쪽과 서쪽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류성룡의 강학 공간인 원지정사(遠志精舍)는 흙 채움 없이 돌만 사용해 줄맞춤 없이 쌓은 막돌허튼층쌓기 방식으로 만든

2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기둥은 모두 네모난 기둥인 방주(方柱)이지만 대청 전면은 둥그런 원주(圓柱)

빈연정사보다 조금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정면에 3칸 정침이 있고 그 옆에 누마루 정자가 붙어 있는데 정침은 서쪽 2칸이 온돌이고, 동쪽 1칸이 대청(大廳)이다.

대청 사이에는 불발기창을 달았는데 천장에 매달면 하나의 넓은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어 실용적으로 꾸며 놓았다.

빈연정사(賓淵精舍)는 원지정사와 여러모로 대칭을 이루고 있어 두 건물의 특징을 비교해 보기에 좋다.

원지정사의 맞배지붕 건물은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머름대를 크게 댄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대청마루, 운공의 보아지 초각과

섬돌이 있다. 반면 빈연정사는 팔작지붕 건물로 2칸의 대청마루와 1칸의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돌방은 툇마루 없이 방문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 원지정사에 비하여 폐쇄적인 느낌을 준다.

두 정사는 출입문이 협문처럼 작은데, 최대한 외부와 단절한 상태로 나만의 공간에서 학문을 닦고자 하는 선비의 의지이다.

양진당(養眞堂)은 조선 명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과 그의 맏아들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

살던 집으로 류중영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랑대청 앞 처마에 입암고택(立巖古宅) 현판이, 사랑대청 안 북쪽벽 바라지창 위에 양진당(養眞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지금의 이름인 양진당이라는 당호는 이곳을 크게 중수한 류운룡의 6대손인 류영(柳泳)의 아호(雅號)에서 따온 것이다.

풍산류씨 대종택인 양진당은 원래는 아흔아홉 칸이었으나 지금은 쉰세 칸만 남아 있다.

자형 안채에 행랑채와 대문채가 자로 합쳐져 열세 칸의 3량 집의 긴 건물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형상이다.

평면도를 그려보면 경상도 가옥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자형 안채에 대청 옆으로 자형 별당을 이은 형태이다.

마을의 다른 가옥에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뚝 솟은 솟을대문과 사랑채의 높은 기단, 좌우로 뻗은 행랑채 등은

이곳이 대종택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양진당은 연화부수형

(連花浮水形) 형국의 하회마을에서 꽃술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다 하여 가장 명당자리로 꼽는다.

충효당(忠孝堂)은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반가로 꼽히는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지금의 충효당의 모습은 류성룡 선생 사후에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많은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손자 류원지(柳元之)

안채를, 증손자 류의하(柳宜河)가 사랑채를 확장 중수한 것으로, 류성룡이 낙향한 후 말년을 보냈던 소박한 생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가옥이라 한다. 대문채는 선생의 8대손인 류상조(柳相祚)가 지었는데 일반 기와집과 달리 전면에 긴 행랑채와 함께

일자 모양의 독립된 건물로 배치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가옥은 커다란 바깥마당을 지나 긴 행랑채인 대문채를 지나 끝 지점에 좌측으로 동선이 꺾이면서 솟을대문을 만나게 된다.

대문채의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사랑대청에 걸린 충효당편액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글씨는 류의하가 사랑채를 중수할 때

당대 명필가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전서(篆書)로 쓴 것이다.

당호를 충효당이라 짓게 된 연유는 서애가 임종할 당시 자손들에게 남긴 시구절인 충과 효 외에 달리 할 일은 없다(忠孝之外無

事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서체의 멋들어진 선은 남촌댁의 사당 담장 흙벽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북촌댁(北村宅)은 대지 1,700여 평에 72칸의 대저택으로 하회마을 가옥 가운데 가장 크다.

강 건너 부용대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너른 지붕이 바로 북촌댁의 안채이다.

7대에 걸쳐 200여년간 부와 명예를 누린 북촌댁의 역사는 1797년 현재의 자리에 류사춘(柳師春)이 집을 짓고 만수당(萬壽堂)

이란 이름을 붙이며 시작되었다. 이후 류사춘의 아들 류이좌(柳台佐)가 집을 중수하면서 화경당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현재의 북촌댁은 류도성(柳道性)이 화경당의 규모를 크게 키워 증축한 것이다.

류도성이 집을 증축할 당시의 흥미로운 일화가 지금껏 전해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859년 여름, 상갓집에 조문을 갔다 돌아오던 마을 사람 수십명이 탄 배가 홍수로 갑자기 불어난 물살 때문에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경상도 도사를 지냈던 류도성은 강변에 건조 중이던 화경당을 증축하고자 3년 전부터 정성스레 준비했던 건축

자재를 내어 주어 일부를 강물에 띄우는 뗏목으로 사용하여 동네 사람들을 구하고 일부는 불을 붙여 밤에도 환하게 구조작업을

할 수 있게 조치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정성스럽게 준비된 이 나무들을 마을 사람을 위해 단숨에 꺼내온 그의 도량과 배포가 지금도 북촌댁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북촌댁은 그 규모에 맞게 사랑이 셋이나 된다. 큰사랑 북촌유거(北村幽居)는 가장 웃어른인 할아버지께서 거주하시거나 간혹

외빈 접객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중간사랑 화경당은 아버지가, 작은사랑 수신와(須愼窩)는 손자가 거처했다.

정면 7, 측면 3칸 크기의 별당인 북촌유거는 제일 왼쪽에 부엌, 그 옆으로 2칸 크기의 방, 1칸 크기의 방이 연이어 있고,

그 옆으로 2칸 크기의 대청,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차례로 이어진 평면구조로 지어졌다.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마을의 3대 풍광을 동시에 볼 수 있는데, 동쪽으로는 하회의 주산(主山)인 화산(花山), 북쪽으로는

부용대와 낙동강을,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툇마루는 반 칸 뒤쪽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북촌유거가 남향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여름에 집 안으로 뜨거운 햇볕이 덜 들어오게

배려한 것이다. 북촌유거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는데 여기에 하얀 마사토가 깔려 있어 달 밝은 밤에 내려다보면 눈이 소복이

쌓인 것처럼 느껴진다.

북촌유거 뒤편의 뜰에는 수령이 300년 넘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와 소나무의 휘어진 모습이 닮아 물돌이동 소나무라 불린다.

북촌댁이 지금의 위치로 분가해 나올 때 류사춘이 집안의 융성과 일가의 번영을 기원하며 화산에서 옮겨와 심은 것이라 한다.

남촌댁(南村宅)은 충효당 뒤 하회마을의 아랫마을인 남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1797(정조 21)에 형조 좌랑을 지내던 류기영 선생이 건립한 집으로 현재는 대문채, 사당, 별당채, 1980년대에 새 사랑채

자리에 이건한 백율원(百栗園)의 정자가 남아 있다.

이렇듯 본채가 없는 까닭은 1954630(음력)에 일어난 화재로 본채와 새로 지은 사랑채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대문채는 일곱 칸 크기에 가운데 한 칸에 솟을 대문을 세우고 동쪽으로는 광을 꾸미고 서쪽으로는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북촌댁과 마찬가지로 담장으로 막힌 마당 없이 바로 골목길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화방벽으로 꾸며졌다.

하단에는 막돌을 쌓고 중간에는 전돌이라 생각될 정도로 네모반듯하게 가공한 석재를 사용해 수평줄눈을 맞춰 쌓았다.

그 위에는 기와를 이용해 음양을 상징한 기하학 무늬를 담았다.

백율원은 원래 하회마을 남쪽의 낙동강 건너에 있던 정자로 남촌댁에 화마가 휩쓸고 간 뒤 소실된 새 사랑채 자리에 옮겨왔다.

자를 좌우로 엎은 형태의 구조로 3량으로 되어 있다. 누마루 형태의 대청이 있고 직각으로 온돌방과 부엌이 위치해 있다.

대청에는 분합문이 달려 있는데 일반적인 분합문과는 조금 다르다. 3량의 가구 구조로는 대청의 분합문을 천장의 등자쇠에

걸 정도의 공간이 나오지 않는데, 때문에 이곳에는 처마 아래쪽으로 걸 수 있게 등자쇠가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