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기행]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발상지(發祥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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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기행]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발상지(發祥地)..

by 정산 돌구름 2014. 5. 14.

[고창기행]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발상지(發祥地)..

 

탐방일 : 2014년 5월 11일(일)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의 동학농민혁명 발상지는 동학농민군의 훈련장이 있고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으로 민족·민중 운동사의

  큰 분수령을 이룬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지로서 만천하에 창의 포고문을 선포한 발상지의 상징인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의 전체적인 모형은 농민혁명의 강렬한 의지와 열성의 횃불을 형상화 하였고 중앙 부조 조각은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위해 만방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고 포고문 선포의 역사적인 모습을 표현하여 그 당시의 역동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주위에 배치한 죽창은 그 때 농민군이 사용한 무기로써 분연히 떨쳐 일어섬을 나타냈으며, 혁명의 참뜻을 기리고 자손만대에 그 교훈을

  널리 기리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건립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의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아버지는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창혁(彰爀) 혹은 승록(承彔)이다.

  아버지는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태인 산외리 동곡마을에 옮겨 자리 잡았을 때에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 마지기(三斗落)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 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년)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

  한재(旱災)가 들어도 면세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 사이가 좋지 않음)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93년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 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1월10일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하였으며,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

  (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孫和中)·김개남

  (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다. 그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4월4일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다.

  4월12일에서 4월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외병차입(外兵借入)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국군이

  충남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제물포(인천)에 들어왔다.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 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휘하의 10만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