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행]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을 기리는 사당, 포충사(褒忠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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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행]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을 기리는 사당, 포충사(褒忠祠)..

by 정산 돌구름 2014. 5. 21.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을 기리는 사당, 포충사(褒忠祠)..

 

○ 탐방일 : 2014년 5월 18일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947-1

○ 포충사(褒忠祠) 소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1974년5월22일)로 지정된 포충사는 조선의 문관이며,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고종후(高從厚)·고인후

  (高因厚)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 5위를 배향한 사우이다.

  1601년(선조 34년) 호남 유생들이 광주 제봉산(霽峯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했고, 1603년(선조 36년)에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란 액호를 받았다.

  고경명을 주벽으로 제향하고 동배위에 고종후와 유팽로, 서배위에 고인후와 안영을 배향했다.

  포충사는 사액사당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사우이다.

  1623년, 1810년, 1879년, 1919년, 1927년, 1933년에 각각 중수했고, 1978∼1980년에 현재의 사우를 정화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으로, 1고주 5량가의 맞배집이고, 동재와 서재는 정면 3칸, 옆면 1칸 반의 맞배집이다.

  내삼문과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집이다.

  포충사에서 특히 이채로운 것은 옛 사당의 입구 홍살문 옆에 있는 자연석에 새겨져 있는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의 비문이다.

  이들은 고경명의 충직한 노비로, 주인과 함께 의병에 참가하였고, 금산싸움에서 고경명과 고인후 부자가 전사하자 그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지냈다.

  이듬해에는 다시 살아남아 있던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전투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충의의 인물들이다.

  이밖에 포충사에는 고경명의 친필로 쓰여진 《마상격문(馬上激文)》과 목판 493장 등이 보존되어 있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은 1558년(명종 13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의병 6,000명을 모집하여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고경명의 장남인 준봉(隼峯) 고종후(高從厚)는 1577년(선조 10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참가했으나,

  아버지와 아우를 잃은 뒤 진주성전투에서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고경명의 차남인 학봉(鶴峯) 고인후는 1589년(선조22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때 부형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월파(月坡) 유팽로(柳彭老)는 1588년(선조 21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서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안영(安瑛, ?∼1592)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소장자료로는 <포충사우가 褒忠祠宇歌>(1614년) 등 현판문 3매, 복호입안문서(復戶立案文書, 1592년)와 고경명의 문과급제교지

  (1558년) 등 고문서 6매, 고경명친필 <마상격문(馬上檄文)>, <제봉집(霽峯集)>(252매), <정기록(精氣錄)>(71매) 등의

  목판 493매 등의 유물이 있다.

 

 

포충사 입구..

 

포충사 안내도..

 

포충사 내부, 뒤로는 제봉산..

 

관리사무소..

 

포충사 설명..

 

포충사 외삼문인 충효문..

 

연못..

 

포충사 유물전시관인 정기관(正氣館)..

 

세독충정(世篤忠貞)..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시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고 후손에게 가르치던 좌우명..

 

내부의 각종 벽화 기록들..

 

 

 

 

1558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고경명에게 내린 교지, 모조품..

 

1643년 고경명에게 충렬공(忠烈公)이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 역시 모조품.. 

 

목판.. 

 

 

 

 

포충사 정화기념비..

 

사당으로 드는 내삼문..

 

내삼문은 성인문(成仁門)..

 

포충사 사당..

 

1980년 새롭게 세워졌다..

 

고경명을 주벽으로 제향하고..

 

동배위에 고종후와 유팽로, 서배위에 고인후와 안영을 배향했다..

 

구사당으로 오르는 길..

 

홍살문..

 

구사당으로 오르는 길..

 

포충사에는 다른 서원과 달리 이채롭게도 노비의 이름을 넣은 충노비(忠奴碑)가 있다...

 

옛 사당의 입구 홍살문 옆에 있는 자연석에 새겨져 있는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의 비문...

 

이들은 고경명의 충직스러운 노비로, 주인과 함께 의병에 참가하였고, 금산싸움에서 고경명과 고인후 부자가 전사하자

그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충의의 인물들이다..

 

구 사당..

1601년(선조 34년) 호남 유생들이 광주 제봉산(霽峯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했고,

1603년(선조 36년)에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란 액호를 받았다..

 

포충사 묘정비(廟庭碑)...

 

묘정비는 일명 서원비(書院碑)라고도하는데,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 곧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이 적혀 있다..

 

당대의 인망이 높은 인사의 글을 받아 명필의 글씨로 새기는 것이 보통이다..

 

포충사 구사당의 내삼문..

 

동재..

 

 

서재..

 

동재와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집이다..

 

뒤면의 구 사당..

 

사당은 앞면 3칸으로, 1고주 5량가의 맞배집..

 

포충사 편액..

1603년 박지효와 후손들이 임금에게 사액(賜額)을 청하여 <포충(褒忠)>이라는 이름과 편액을 받았다..

 

호남순국열사지비(湖南殉國烈士之碑)..

 

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