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기행] 충의공(忠毅公) 최경회장군 사우, 화순 충의사(忠毅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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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기행] 충의공(忠毅公) 최경회장군 사우, 화순 충의사(忠毅祠)..

by 정산 돌구름 2014. 3. 6.

충의공(忠毅公) 최경회장군 사우, 화순 충의사(忠毅祠)..

 

○ 탐방일 : 2014년 3월 5일

○ 소재지 : 전남 화순군 동면 백용리 422

○ 충의사(忠毅祠) 소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삼장사의 일원으로 순국한 최경회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우이다.

 최경회(崔慶會)의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당호는 일휴당(日休堂)이며, 본관은 해주로서 화순 능주에서 태어났다.

 양응정(梁應鼎)·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명종1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67년(명종22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옥구.장수.무장현감, 영암군수, 영해.담양부사 등 내외 관직을 지냈다.

 1591년 모친상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에서 시묘하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운, 경장 두 형과 아들 홍기, 조카 홍재, 홍우와

 함께 의병청을 설치하고 수천의 의병을 일으켜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상복차림으로 북상하여 금산.무주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상우순찰사의 지원 요청을 받고 "영남도 우리나라 땅이다."하고 달려가 1차 진주성싸움의 외원으로 대첩을 거둔 뒤 바로 거창에 주둔

 하고 개령의 왜군을 공격하여 성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우는 등 영남 7읍을 평정하니 그 전공으로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특별임명되었다. 그해 6월의 제2차 진주성 싸움에도 참가하여 9주야를 항전하였으나 끝내 중과부적으로 성이 무너지니 조카 홍우를

 탈출시켜 조복과 언월도를 고향의 중형 최경장에게 보내고, 김천일, 고종후 장군 등과 함께 촉석루에 올라 서사일절을 남기고 62세의

 나이로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뒤따라 그의 후처로 알려진 논개(論介)가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을 껴안고 순절하였다고 한다.

 그의 중형 최경장도 의병장이 되어 사천,고성 등지의 왜적을 격퇴하였고, 장형 최경운도 오성산성에서 항전하다가 부자가 순절하였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진주의 창열사, 능주의 포충사, 화순의 삼충사에서 제향해 오다가 고종 때 포충사와 삼충사는 훼철되었다.

 2003년에 충의사를 준공하여 후세를 위한 충효 교육의 도장으로 삼고있다..

 

 

주차장..

 

배치도..

 

충의사 소개..

 

 

좌측 장군동상, 우측 어록비..

 

충의공 난중 어록비..

 

최경회장군 동상..

 

홍살문과 관리사무소..

 

홍살문..

 

홍살문을 들어서면..

 

우측의 의병관..

 

우측에는 새로운 건물..

 

금라문..

 

금라문을 들어서면..

 

일휴당기념관..

 

우측의 장수문..

 

의암(義菴) 영각(影閣)..  최경회의 부인 논개의 영정을 모신 전각이다..

 

의암 논개(論介)는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 중국)이다.

전북 장수군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 때(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 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논개는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3년 진주성 함락으로 최경회가 자결하자,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12년) 당시 현감 정주석이 장수군 장수면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으며,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충의공 최경회사적비..

 

성인문인 진주문..

 

충의사..

 

충의사는 최경회장군의 사당으로 영정이 모셔져 있다..

 

뒤편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