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그리고 조망이 있는 지리산둘레길 2구간(운봉~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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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지리산둘레길

역사와 문화, 그리고 조망이 있는 지리산둘레길 2구간(운봉~인월)

by 정산 돌구름 2014. 1. 14.
역사와 문화, 그리고 조망이 있는 지리산 둘레길 2구간(운봉~인월)..

 

○ 산행일자 : 2014. 1. 12 (일)

○ 기상상황 : 흐림(흐린 날씨에 미세먼지로 시야 불량, -3~2℃)

○ 산행코스 : 지리산둘레길 2코스(운봉~인월)

  운봉읍~서림공원~북천마을~ 신기마을~ 비전마을~비전마을~군화동~흥부골자연휴양림~월평마을~인월면

○ 거리 및 소요시간 : 9.4km / 3시간15분 소요

  운봉초교(10:15)~2코스시작지점(10:20~25)~서림공원(10:25~30)~협동교(10:40)~신기교(10:45)~신기마을(11:00)~

  비전마을(11:30~50)~군화동(12:00)~대덕리조트(12:15)~옥계호 둑(12:25)~흥부골자연휴양림(13:00~05)~월평(13:30)

  ~구인월교(13:40)

○ 교통상황 : 광주 문흥(09:00)~88고속~지리산IC~37번~구인월교(10:00), 인월터미널(10:05)~버스~운봉초교(10:15)

 

 

○ 둘레길 소개

  2구간은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10km 구간으로 오른쪽으로는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운봉~인월구간은 너른 운봉들녘을 따라 지리산 서북능선과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호쾌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성지,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의 전북․전남․경남 등 3개도, 남원․구례․하동․산청․함양 등 5개시․군의 21개읍․면 117개 마을을 잇는

  21개구간 274km로 지리산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형으로 연결하고 있으며,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사람과 생명, 성찰과 순례의 길이기도 하다.

  전북 남원 46km, 경남 함양 23km, 산청 60km, 하동 68km, 전남 구례 77km 등 274km를 숲길(43.8%), 농로(20.8%),

  마을길(19.9%) 등으로 이어져 있다..

 

○ 탐방에 앞서

  광주에서 차를 몰고 88고속도로 지리산IC를 빠져나와 구인월교 옆 공터에 주차를 한다..

  걸어서 인월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바로 운봉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버스로 10여분 달려 운봉초교 앞에서 내린다...

 

1995년 3월 면에서 읍으로 승격된 운봉읍..

동쪽으로 동면·산내면, 서쪽으로 산동면·이백면, 남쪽으로 주천면, 북쪽으로 아영면·장수군 번암면과 접한다.

동쪽에 덕두산(1,150m)·바래봉(1,165m)·세걸산(1,207m) 등 1,000m 이상의 지리산 자락이 서북능선,

서쪽에 고남산(846m)·여원치 등이 솟아 있다.

지형적 영향으로 고랭지 기후를 나타내어 눈도 많이 내리고 여름철도 서늘하여 25℃ 이상의 기온이 드물다..

 

운봉이라는 지명은 소백산맥의 동쪽 사면에 위치한 이곳에서 구름에 가려진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를 보게 된 데서 생긴 것이다.

또, 고을의 지형이 중국 송나라의 ‘운봉’이라는 고을과 비슷하여 그곳의 지명, 하천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고 한다.

옛날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국경 요새지였고,

운봉이 행정상 군(郡)이었던 1913년까지만 해도 서천리는 군청소재지였던 곳이다.

운봉초교에서 2구간의 시작점으로 이동한다..

 

시작의 흔적을 남기고 서림공원을 향해 출발한다..

 

서림공원이 다가온다..

 

공원입구를 지키는 석장승 2기의 석장승.. 

전북 문화재자료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는 오른쪽의 방어대장군..

높이 220cm, 너비 50cm로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으며,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한다는 뜻으로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튀어나온 둥근 눈과 주먹코, 아래로 쭉 뻗어내린 송곳니, 가슴에 한가닥의 수염이 있는 남장승으로 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장승의 건립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민간신앙의 자료로 가치가 있다.

둘 다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떨어진 것을 이어 붙였는데 여기에는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해인가 가정불화가 있어 잦은 충돌 끝에 방어대장군이 진서대장군에게 귀를 물어 뜯겼고, 진서대장군은 목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솟대가 서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방어대장군과 마주하는 역시 문화재자료 제20-2호 진서대장군..

서쪽의 방위를 어루만지고 눌러서 편안하게 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머리보다 다소 작은 벙거지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ㅇ며, 둥근 눈에 속눈썹이 깊게 새겨져 있고, 주먹코에 귀가 달려 있는 모습이다.

길게난 수염은 오른쪽으로 휘어지게 표현하였는데, 가슴 부근까지 드리워져 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화가 나 있지만 그 안에는 어리숙함과 익살스러움이 담겨져 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신앙적 의미 뿐만 아니라 사람의 표정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전에는 장승 앞에서 제를 지냈는데 1977년 당산나무를 심은 이후로 그 앞에서 먼저 지내고 나서 돌장승에게도 간단하게 올린다.

당산나무는 귀목나무이며, 그 둘레가 126cm이다..

보통 음력 정월 초하룻날 제를 지냈는데 당산나무를 심고부터는 음력 2월 초하루에 지내면서 마을총회를 겸하고 있다.

제물은 마을회관과 창고 임대료, 행사 등으로 얻은 수익으로 마련한다..

 

서천이 흐르는 서림숲은 마을 휴식처로 이용되었으며, 석장승 2기와 각종 비석군도 있어 서천리의 과거 역사와 전통을 말해 준다..

서림공원 표지판에서 우측으로 이어진다..

 

서림공원에서 비전마을까지 이어지는 약 5km의 제방길은 람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협동교에서 북천마을은 오른쪽으로 들어선다...

운봉 읍내의 북쪽 냇가 마을로 소나무가 우거진 마을이라 벽송동(碧松洞), 객사가 있는 마을이라 객사마을로도 불리었다..

람천을 가로지르는 신기교를 건넌다..

 

람천은 남원 운봉읍·인월면·산내면 일대를 지나 경남 함양 마천면에서 임천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지리산 북서 사면에서 발원되는 주촌천, 운봉천, 준향천 등의 소하천이 합쳐져 람천이 형성된다.

아영면·인월면 일대를 흐르는 풍천과 산내면 일대를 흐르는 만수천도 람천에 합쳐진다.

람천은 임천과 남강을 거쳐 최종적으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가므로 낙동계수계에 속하는 하천이다.

지형도에 람천의 표기가 다르게 된 경우가 있는대, 발원지로부터 운봉읍 신기리까지의 하천을 람천이라 하고,

그 이후의 하천을 광천(廣川)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고, 전체를 광천으로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우거진 소나무 숲을 대하고..

 

시야가 탁 트인 들녘과 능선을 바라볼 수 있다..

 

신기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의 섬처럼 조그만 숲 동산..

 

바위면을 깎아 초봉(草峯)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거북바위가 있어 귀암(龜巖)이라 불렀다..

풍수지리상 이 마을이 와우혈이라 소가 먹는 풀(밥구시)을 의미하는 초봉으로 그 이름이 바꾸었다 한다..

 

신기마을은 선조 28년(1595년) 임진왜란으로 혼란스러운 때 이곳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인동 장씨 장덕복(長德福)이었다고 한다.

영남의 전란에 고통을 받다가 지리산이 바라보이고 우뚝 솟은 운봉고원이 마을을 보호하고 만복이 자손대대로 이어지는 명당터인지라

새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란 뜻으로 새터, 즉 신기(新基)라 하였다.

소(牛) 형국인 마을 북쪽 쇠잔등이가 잘려 마을의 쇠한 기운을 막고자 주민들이 직접 토성(土城)을 쌓았다고 한다..

곳곳에 둘레길 표지가 세워져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람천에서 노니는 철새, 청둥오리..

 

한가로운 풍경이다..

 

람천을 따라 길은 계속 이어진다..

 

흐느적거리는 억새와 철새..

 

하천 정비사업을 추진 중인 람천.. 자연 그대로가 좋을 것인데..

 

널따란 주차장.. 멀리 지리산 바래봉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위로 구름은 마치 거대한 산을 이루고 있다..

 

동편제 마을 쉼터..

 

꼭 가볼 곳..

 

다리를 건너면 비전마을...

황산대첩비가 세워지고 이 비각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이 비(碑) 앞에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비전(碑前)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마을 5리 전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를 지날 때면 하마비가 서있는 이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 이곳에는 구한 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의 주막과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말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으로 동편제의 고향으로 국악의성지가 있는 곳이다.

비전 마을이 동편제의 발상지가 된 것은 이곳 하마정과 무관하지 않다..

 

사적 제104호로 지정된 황산대첩비지..

고려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서 있던 곳이다.

황산은 운봉면 면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높이 695m의 바위산이다.

이 산하의 협곡에서 1380년(우왕 6년) 삼도순찰사의 임무를 띠고 온 이성계는 배극렴·이두란 등 휘하의 여덟 원수를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공격해오는 왜구들과 일대격전을 벌여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대첩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하여 그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당시의 승전사실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1577년(선조 10년)에는 호조판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여성군 송인의 글씨로 새겨진 황산대첩비가 서게 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비각·별장청 등의 건물을 지어 그 수호에 임하게 하였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그러나 1945년1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따라 남원경찰은 소방대를 동원하여 비를 폭파하고 비문의 글자를 말소시키는 등

야만적인 행동을 저질러 옛 비석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뒤 정부수립 이후에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깨어진 거북돌을 다시 맞추고 오석(烏石)으로 비신을 재건하였으며,

1973년 비전(碑殿)·홍살문·삼문·담장, 그리고 부속건물 등을 새로이 정비하고 단장하였다.

지금 새로 세워진 대첩비는 높이 4.25m에 용을 새긴 이수(螭首)와 1.20m의 귀부(龜趺)를 갖추고 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대첩비각이 마주한다..

 

이성계가 1380년(우왕 6년)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기리기 위해 1577년(선조 10) 왕명을 받아 이곳에 세웠다.

4.25m인 이 비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으나 1957년에 귀부와 이수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중건된 비는 쌍귀(雙龜)를 떠서 새겨진 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은 김귀영이 짓고 송인이 썼으며, 전액은 남응운이 하였고, 박광옥이 세웠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박계현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하였음을 비롯,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 있다.

글씨는 오로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체를 닮은 것으로 결구에 허한 곳이 많고 필력도 주경하지 못하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 그의 글씨를 비(肥)와 속(俗)으로 평하였는데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사적비각..

 

이 비는 1882년(고종 19년)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 중건한 비이다.

일제강점기 때 황상대첩비와 비각 등이 함께 파괴되었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기록되어 있다...

 

파비각(破碑閣)은 황산대첩비지에 있는 비각(碑閣)으로, 1977년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고려 말 이성계가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를 황산에서 격퇴한 전공을 기록한 황산대첩비를 파괴하였는데,

파비각에는 그때 파괴된 황산대첩비의 일부 파편들이 보관되어 있다..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는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라는 공문을 각 도의 일본인 경찰부장들에게 발송해

조선의 일본관련 비석들을 찾아내 없애라고 지시했다.

그때 일본경찰들은 황산대첩비를 비롯한 전국의 일본 관련 전승비와 대첩비 20여 기를 깨부수고,

비석의 비문을 정으로 쪼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황산대첩기념비..

 

어휘각(御諱閣)은 정면 4칸, 측면 1칸 맛배지붕 형태에 두리기둥이다.

특이한 것은 절벽에 새긴 글씨를 보존해야 하였기 때문에 어휘각은 정면 앞 기둥 네 개는 길고 뒷면 기둥 네 개는 짧다..

 

어휘각은 운봉읍 화수리 석벽(石壁)에 도원수가 본인과 8원수 4종사의 명단을 새기게 하여 황산대첩이 자신만의 공로가 아니라

여러 충신들의 공로임을 알리는 내용의 어휘(御諱)를 새겨 만든 비전(碑殿)이다..

 

1945년1월17일 일제가 비전(碑殿)을 폭파하고 어휘(御諱) 새긴 내용을 철정(鐵釘)으로 쪼아버려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1973년 다시 어휘각을 건립하여 비록 훼손되었지만 글씨가 새겨진 돌을 보존하고 있다.

 

비전마을 정자..

 

가왕 송홍록과 국창 박초월의 생가가 있다..

 

잘 단장된 생가터.. 

 

내부에 들어서면..

 

판소리의 풍경이 리얼하다..

 

기념으로..

 

송흥록(宋興祿) 생가터..

남원시 운봉 출생인 송흥록은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았다.

판소리의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金成玉)은 그의 매부이고, 광록(光祿)은 동생이다.

그는 역대의 판소리 명창 가운데 기량이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그때까지 없었던 진양장단을 도입하여 소리를 짜고

평타령으로 일관되었던 원초적인 판소리 선율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의 선율을 오늘날과 같이 발전시켰다.

기량이 출중하고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기에 독보건곤(獨步乾坤)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신재효도 그를 시중천자로 꼽히는

이태백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모든 판소리에 뛰어났으나 그 중 <변강쇠타령>, <춘향가>, <적벽가>를 잘하였는데,

특히 <춘향가> 중 <옥중가>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이 대목의 귀곡성이 유명하다.

또한 동편제 판소리를 확립하여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도 꼽히며, 그의 소리는 동생 광록과 수제자 박만순(朴萬順)에게 전승되었다..

박초월(朴初月) 생가..

박초월의 본명은 삼순(三順), 아호는 미산(眉山)으로 순천 주암면 봉암리에서 태어나 남원시 운봉면 갈계리에서 성장하였다.

김정문·송만갑, 임방울·정광수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1930년 전주에서의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여러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흥보가>·<심청가>·<춘향가> 등을 취입하였다.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참가, 여러 선배명창들과 창극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광복 후 여성국극동지사를 창단하였다.

1955년에는 현재의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모체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박귀희와 함께 설립하고 교사로서 많은 신인을 양성하였다.

1966년부터는 집에 당대의 명창 156위의 신주를 모셔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정성을 보였다.

1964년 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로, 1973년 11월에는 <수궁가>의 보유자로도 지정을 받았다.

장기는 <춘향가>와 <심청가>인데, 조순애·한농선·성우향·남해성·조통달·전정민·김봉례 등이 그의 소리를 계승하였고,

이중 조통달·남해성·전정민·김봉례 등은 그의 후계를 담당하였다. <춘향가>와 <수궁가>일부가 음반으로 남아 있다.. 

 

생가터를 나서면 쉼터가 있는 둑방길로 이어진다..

 

비전마을, 그리고 당산나무..

 

황산 중턱에 알 수 없는 건축물..

 

군화마을로 가는 길목..

 

군화마을 정자에서 잠시 쉬어간다..

 

군화마을은 1961년 대홍수 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주둔하며서 13가구를 건립하였는데,

이주 후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지은 화수 마을>이란 뜻으로 군화동(軍花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길가의 석불..

 

도로에 서면 건너편으로 대덕리조트가 바라보인다..

 

옥계저수지 둑이 바라보인다..

 

저수지 수로를 건너고..

 

옥계저수지는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축조한 저수지로, 1991년 착공하여 1997년 준공되었다고 한다..

 

얼어붙은 저수지 너머로 바래봉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들..

 

임도롤 들어서면 포장마차가 있지만 오늘은 문을 닫았다..

 

수북히 눈으로 덮인 도로..

 

얼어붙은 숲속의 옹달샘..

 

길목에서..

 

아래로 흥부골자연휴양림이 내려다보인다..

 

1997년 조성되기 시작하여 2002년 개장한 흥부골자연휴양림...

지리산 밑자락에 있는 잣나무 숲으로 잣나무 군락지로는 경기도 가평과 함께 손꼽힌다..

 

99만1,735㎡나 되는 면적에 잣나무가 전체의 90%이고, 이 또한 60~70년생의 큰 것들이 주를 이룬다.

잣나무가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뿜어내는 피톤치드도 상당하여 삼림욕 효과가 그만이다.

또한 잣나무에서 떨어진 잣이 지천인데, 굳이 줍지 않고 다람쥐들의 먹이로 그냥 둔다.

휴양림 한가운데는 맑은 계곡수를 지체시켜 만든 자연 풀장이 자리 잡고 있다..

규모도 아담해 여름철 가족 단위 물놀이 장소로 그만이며, 관리사무소 위로는 민가가 한 채도 없어서 물이 오염될 여지가 없다.

산 아래 달오름마을과 구인월마을에서는 이 물을 그대로 식수로 쓴다.

단체수련동(2동)·숲속의집(7동)·방갈로(3동)·취사장·공동샤워장·급수대를 비롯하여 향토민속놀이마당·교육자료관 등 총 17동이 있다.

덕두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새롭게 세워진 지리산둘레길 표지목..

 

월평마을 민박집이 모두 모였다..

 

도로에서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숲길로 이어지는 길..

 

한적한 산길이 정겹다..

 

인월의 들판이 펼쳐진다..

 

바래봉도 운무에 잠겨 희미하다..

 

내려서는 숲길..

 

월평마을에 내려선다..

 

마을은 벽화로 담장을 장식하였고..

 

거의 모든 집이 민박집..

 

한가로운 풍경..

 

월평마을 정자를 지나고..

 

월평마을운봉에서 박씨가 처음 입주하고 새마을 신촌으로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국이 반월형이라 월평(月坪)이라 불렀다.

또는 마을 터가 동쪽 팔랑치를 마주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

월평(月坪)이란 마을 이름이 말하여 주듯이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이란 뜻으로 월평이라 하였다.

1800년대 후반 천석꾼이 운봉 박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사람을 모아 살기 시작하였다..

 

달오름마을 안내도..

 

동절기 지리산둘레길 정비로 이용을 자제한다고 한다..

 

 

 

월평마을 냇가 구 인월교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영월정(迎月亭)..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동향이다..

이 정자를 짓게 된 유래는 1380년(우왕 6년)에 당시 3도 도원수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섬멸할 때,

어느 날 밤 너무 어두워 적을 탐지하기 어렵자 하늘을 우러러 달뜨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밝은 달이 떠올라 적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이를 기리기 위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상량문에 의하면 단기 1960년 정월에 중건하였다..

 

영월정기적비..

 

구인월교에서 바라본 광천.. 지금까지의 람천에서 이곳부터 광천으로 불린다..

서룡산, 투구봉, 삼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희미하다..

 

람천과 영월정..

 

구인월교옆 어탕 전문점, 두꺼비식당..

 

오랜만에 찾아온 남원 맛집..

 

뜨끈한 어탕으로 추위에 지친 몸을 달래본다..

 

인월면은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서울, 남원, 함양 등지에서 접근이 쉽다.

인월에서 비전마을로 가는 길은 조선시대의 7대 대로중 하나인 통영별로의 일부로 이 길은 비전에서는 여원재를 지나

남원, 오수, 전주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고, 인월에서는 팔랑치, 함양을 거쳐 진주로 이어지던 옛길이다...

 

담양에서 온천욕으로 몸을 풀고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