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지맥 3구간 (불티재~월출산 천황봉~도갑산~월각산~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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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땅끝지맥

땅끝지맥 3구간 (불티재~월출산 천황봉~도갑산~월각산~밤재)

by 정산 돌구름 2009. 8. 17.

땅끝기맥 제3구간(불티재~월출산 천황봉~도갑산~월각산~밤재)..


○ 산행일자 : 2009. 8. 16(일)

○ 기상상황 : 맑고 후텁지근한 날씨(무더위에 바람도 없어 숨이 막힐듯한 날씨, 광주 33℃)

○ 산행인원 : 광주나사모산우회(45명) - 회비 23,000원

○ 산행코스 : 불티재~누릿재~천황봉~바람재~구정봉~미왕재~도갑산~묵동재~월각산~밤재 (전남 영암, 강진)

○ 거리 및 구간소요시간 : 16.5Km, 8시간05분소요 

  불티재(08:20)~누릿재(08:43)~해주최씨묘(09:15)~사자봉갈림길(09:53)~경포대삼거리(10:03)~통천문(10:14)~천황봉

  (10:21~32)~남근바위(11:00)~바람재(11:05)~베틀굴(11:15)~구정봉(11:21~26)~미왕재(11:59~12:03)~500봉

  (12:05)~410봉(12:15)~점심(12:20~33)~430봉(12:39)~도갑산(12:52)~도갑재(12:56)~386봉(13:23)~주지봉

  갈림길(13:44)~묵동재(14:34)~월각산갈림길(15:03~08)~383봉(15:18)~대월갈림길(15:34)~307봉(15:46)~출입

  금지표지판(16:19)~밤재(16:25)

주요 봉우리 : 천황봉(809m), 도갑산(401m), 월각산(456m)

○ 교통상황

  비엔날레(07:05)~ 호남~순환도로~13번~49번~1번~나주 외곽~13번~829번~불티재(08:10)

  밤재(17:20)~2번~13번~경포대~13번~821번~월출산온천 및 뒷풀이(17:55~19:30)~821번~13번~순환도로~빛고을로

         ~호남고속~비엔날레(20:50)

 

산행후기

  이번 산행은 땅끝기맥 제3구간인 「불티재~밤재」구간으로 불티재에서 시작된 능선길은 누릿재를 지나면서 오르막으로

  이어져 암릉구간이 땅끝기맥의 최고봉인 월출산 천황봉까지 이어진다.

  처음 시작부터 바람 한점 없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져 땀이 비 오듯 하고 암릉 암벽을 타고 오르는 사자봉 갈림길까지의 구간은

  정말 지옥같은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전남 영암군과 강진군에 걸쳐 있는 월출산은 1988년 2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비록 20개 국립공원 중 면적과 탐방객이

  가장 적지만 금강산, 북한산, 설악산 등의 절경을 모아 놓은 듯한 풍광 덕분에 탐방 후의 만족도는 어느 산보다 높다.

  또한 국보 13호 극락보전이 있는 무위사, 국보 50호인 해탈문이 있는 도갑사, 구정봉 밑의 국보 144호 마애여래좌상 등의

  문화재도 월출산의 자랑이다. 

  조망 또한 일품이다. 북쪽으로 영암 고을이 들판과 어울린 모습이 정겹고, 동쪽으로 우뚝우뚝 솟은 사자봉과 장군봉 일대의

  기암절경들이 넋을 홀딱 빼 놓는다.

  호남평야 남서쪽 끄트머리에 솟아오른 '달 뜨는 산' 월출산은 호남 제일의 명산으로 손꼽는 신령스런 산이다.

  빼어난 기암들의 집합장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암봉이 만들어낸 멋진 산세는 금강산에 비견할 만한 수려함을 자랑하는

  조물주가 바위로 정성들여 빚은 예술품이다.

  옴팡진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산세는 사시사철 가경을 연출할 뿐만 아니라 신기하고 영묘한 기운이 넘실대기로 유명하고

  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진 석화성이다. 그래서 암봉들은 모두 '돌불꽃' 처럼 피어오른다.

  천황사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의 바윗길로서 남성적 이미지라면 구정봉에서 억새밭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은 완만하고

  유순하여 여성적인 면모를 지녔다.

  구정봉 아래 여성을 닮은 베틀굴, 그리고 천황봉에서 구정봉에 이르는 능선엔 이와 어울리는 남근바위가 자리하고 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룬 영암의 명산이라 할 수 있다.

  또 돼지바위, 오리바위, 말바위, 코뿔소바위, 올빼미바위 등 마치 산전체가 만물상인 듯하다.

  매월당 김시습은 '남도에 그림 같은 산이 있다더니, 달은 하늘 아닌 돌 사이에서 솟더라'... 하며 월출산의 가장 큰 특징인

  달과 돌을 정확하게 짚었다. 또한 산 이름에서 전하는 그대로, 월출산과 달의 찰떡궁합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달과 어우러질 때가 가장 멋지고 아름다우며 휘둥그런 보름달이 수석 같은 산자락에 걸리면 보이는 그대로가 동양화가 된다.

  구정봉은 천황봉에 버금가는 월출산의 대표 봉우리다.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마르지 않는 아홉 개의 물웅덩이가 있어 구정봉이다.

  정상 아래로 호박돌처럼 둥글둥글한 바위 덩어리들이 교묘하게 균형을 잡으며 층층이 늘어서 있다.

  예전에 강진 유배길에 오른 정약용은 나주 율정점에서 역시 유배를 떠나는 형 정약전과 눈물로 헤어지고 월출산 누리령

  (누릿재)에 이르러 정약용은 고갯마루에서 쉬면서 월출산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라고 표현했다. 

  영암(靈巖)이라는 지명은 통일신라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생겨났는데 이때는 당나라와의 교역이 영암의 덕진포, 도포,

  상대포, 남해포 등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월출산을 화개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상선이 영암내해로 들어올 때 월출산 모습이 자색 빛을 발하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영암과 월출산이 인구에 회자되자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던 당나라 황제가 지관을 보내어 월출산을 조사케 했다.

  조사를 마친 지관이 월출산에는 3개의 동석이 있어서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보고하자 황제는 그 동석을 모두

  넘어뜨리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다시 제자리에 가서 섰다고 한다. 그 때부터 모두들 신령스런 바위가 있는

  고장이라 하여 영암군으로  칭했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

  현재도 이 신령스런 바위는 월출산 구정봉 벼랑에 선 채 영암을 굽어보고 있다.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왕인박사는 근초고왕 때 영암 구림 성기동에서 태어나 문산재에서 수학한 후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일본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천자문, 논어를 가지고, 도공, 야공, 직조공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 아스카문화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1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영암의 왕인 박사 유적지에서 춘계대제가, 일본 히라카타시 왕인 묘에서 추계대제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영암 구림에는 왕인석상, 책굴, 문산재, 양사재, 지침바위, 왕인박사탄생지, 성천(聖泉), 성천(聖川),

  왕인사당, 상대포(왕인박사 도일시 배를 탓던 곳)가 현존하고 있다. 

  구림(鳩林)이라는 지명은 도선 국사의 탄생설화에서 기인했다. 통일신라말 어느 겨울에 구림마을 처녀가 성기동 통샘에서

  빨래를 하던 중 참외 하나가 떠내려 오자 이것을 먹었는데 잉태하여 애를 낳았다. 

  처녀의 집안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마을 숲속 바위에 아이를 갔다 버렸는데 며칠이 지난 후에 그곳에 가보니 비둘기들이

  감싸고  있어서 다시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이 아이가 훗날의 도선 국사였다.

  도선국사 관련 유적으로는 국사암, 국암사, 백암, 도갑사, 월암사지, 도선국사비 등이 있다.

 

강진과 영암 경계인 풀치재 삼거리는 829번 지방도가 지나며..

누릿재가 가파른 고개로 이어진 험한 산길인 반면 풀치재는 구불구불 이어지기는 마찬가지지만 비교적 넓게 단장된 도로이다.

재의 정상은 영암과 강진의 경계로 삼거리가 나 있어 하나는 영암, 다른 두 길은 강진군 성전, 작천과 옴천으로 이어진다.

 

일제시대 뚫린 풀치재 삼거리는 한때 주변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으나 지난 2000년「풀치터널」이 뚫려  4차선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통행하는 차량을 거의 없는 거의 버려진 길이 되었다.

풀치재는 오랜 옛부터 풀치재, 불티재, 풋치재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렸으나 터널이 뚫린 최근에 와서야 풀치재로 통일됐다.

국토관리청이 터널 이름을 풀치재가 속한 강진, 영암군과 협의해 풀치재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널따란 삼거리 갈림길인 불티재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출입금지 표지판이 세워진 배롱나무 옆으로 오르면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나고 잠시 후 능선에 들어선다..

 

벌써부터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능선을 따라 고도를 높여 잡목이 우거져 조망이 없는 340봉을 지나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내리막을 내려서면 영암읍 개선리와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를 잇는 유서 깊은 누릿재 안부에 내려선다.

누릿재는 옛날 영암에서 강진, 해남으로 갈 때 이용했던 고개로 고개언덕에 풀밭이 많아 가을에 누런색을 낸다하여 누릿재라

불렀고, 지금은 이용되지 않아 잡초 무성한 소로만이 남아 있다.

한때 강진, 해남, 장흥, 완도 사람들이 광주로 향하기 위해 통과했던 관문이었으며 바로 주변에 상대적으로 길이 넓은 풀치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누릿재를 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풀치를 통하면 월출산 자락을 우회해 영암읍 반송정과 청풍 삼거리를

거쳐야 하지만 누릿재만 넘으면 영암읍 개신리로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풀치재가 일제시대인 1930년대 중반 넓은 신작로로 탈바꿈했지만 누릿재의 가까움을 대신하지 못하고 60년대 초반까지도

이 누릿재가 주도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길, 누리령....

풀치재로 영암 가는 버스가 다니기 이전까지 강진 작천이나 성전면 사람들은 모두 누릿재를 이용해 영암장을 보러 다녔는데

행정구역은 강진군에 속하지만 강진장보다 지리적으로 영암장이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장돌뱅이들은 누릿재를 통해 강진과 영암장을 넘나들었다.

특히 소장수들은 성전장과 신북의 바람장, 영암장, 강진장 등 우시장이 있는 장을 돌기 위해 누릿재를 주요 통로로 사용했다.

벌어먹을 논밭이 없어 보부상으로 연명하던 사람들도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누릿재를 넘었다고 한다.

산 정약용 선생도 강진으로 귀향길에 누릿재를 넘었으며 당시 목포와 해남으로 길이 갈라지던 나주의 주막 삼거리 율정점에서

흑산도로 유배 떠나는 형 손암 정약전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 정약용은 눈물로 누릿재 고개를 넘으며

 「탐진촌요(耽津村謠)」를 남겼다.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탐진촌요는 유배를 떠나는 자의 아픔과 두고 온 땅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다.

누릿재가 해발 230m인 데 비해 풀치재는 180m로 50m가량 낮다.

일제가 누릿재에 신작로를 내지 않고 풀치재를 택한 것은 해남 쪽보다는 장흥과 강진 병영에 비중을 더 뒀던 것으로 보인다.

 

누릿재를 지나 오르면 잡초가 무성한 공터에 칡넝쿨이 우거져 있고..

 

잡초사이를 지나 오름이 이어지는데 출입금지 표지가 있다.

 

가파른 오르막에 잡초와 산죽이 힘들게 하고 한참을 올라 뒤돌아보니 지나온 능선..

 

멀리 지난구간 국사봉과 활성산을 지나 이어지는 능선이 안개 속에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또다시 급경사를 따라 오르막은 계속되고 한참 후 산죽과 가시넝쿨 지대를 지나 오르면 우측으로는 월출산의 기암괴석이

바라보이지만 무더위와 가시넝쿨 때문에 오르기에 바쁘다.

 

조망이 트이며 암벽을 올라서면 「금강거사 해주최공현지묘(錦江居士海州崔公現之墓)」가 있는 550m봉이다.

 

사방이 조망되어 지나온 능선과 가야할 봉우리들이 아름답다.

 

잠시 숲속으로 들어섰다가 내려서면 본격적인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거대한 바위를 우회하여 오르막이 이어지는데

바람도 없어 온몸에 땀이 흠뻑 젖어든다.

로프가 있는 급경사의 바위지대 오르막을 기어올라 암봉에 이르면 다시 기암들이 조망된다.

 

 

 

 

 

 

다시 안부로 내려와 오르내림은 계속되고 너무나 빨리 지쳐온 탓에 앞으로 가야할 길이 걱정스럽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사람소리가 들리며 등산로에 접어드는데 로프에 「등산로아님」표지를 메달아 놓은 사자봉 갈림길이다.

본격적인 주능선 등산로에 접어든 것이다.

10여m우측에 이정표「구름다리0.9km/천황봉0.8km/경포대2.9km」가 있다.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가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등산로를 따라가면 전면으로 조망이 트이는 전망바위에 이르는데(10:59) 바로 앞에 천황봉이 올려다보이고

능선을 따라 오르는 사람들이 바라보인다.

 

사면길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능선에 이르러 잠시 후 이정표「천황봉0.4km/구름다리1.3km/경포대2.6km」가 있는

경포대삼거리에 이른다.

 

사자봉도 바라보이고..

 

이정표를 지나 가파른 암릉을 따라 오르면 사자봉을 비롯하여 구름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오르면 이정표「천황봉0.3km/경포대2.7km/구름다리1.4km/천황주차장2.7km/

바람폭포1.1km/천황주차장3.4km」가 있는 통천문삼거리에 이른다..

우측으로 내려서면 바람폭포를 지나 천황주차장에 이르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면 통천문 안내판을 지나 하늘로 오르는

관문이라는 통천문(通天門)을 지난다.

안내판에는 「이 문은 월출산(月出山)정상인 천황봉(天皇峰)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m아래에 있다.

천황사(天皇寺)쪽에서 바람폭포 또는 구름다리를 지나 천황봉쪽으로 오를 때 만나는 마지막관문의 바위로서, 이 굴(窟)을 지나야

천황봉에 오를 수 있다. 천황봉에 이르는 문(門)의 역할 때문에 통천문(通天門)이란 이름이 생긴 것인데, 이는 월출산 최고봉을

지나 하늘로 통한다는 높은 문(門)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바위굴에 들어서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월출산 북서(北西)쪽

능선이 펼쳐지며, 멀리 내려다보이는 영암(靈岩)고을과 영산강(榮山江)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통천문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섰다 봉우리 하나를 우회하여 오르면 월출산 정상인 천황봉이다.

 

월출산(月出山,809m) 천황봉...

 

달이 뜨는 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유수한 문화자원, 그리고 남도의 향토적 정서가 골고루 조화를

이룬 한반도 최남단 산악형국립공원이며 천황봉을 중심으로 산 전체가 수석 전시장이라 할 만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제 왕인(王仁)박사와 신라말 도선(道詵)국사의 탄생지이기도 하며, 호남의 소금강산이라 불리고 또한 천황봉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단아한 모습의 무위사, 서쪽에는 도갑사가 있는데 도갑사의 해탈문, 무위사의 극락전, 마애여래좌상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있다.

 

정상에는 표지석과 함께 삼각점(영암26/1990재설)있고 그 옆에 월출산소사지(月出山小祀址)가 있다.

 

서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풍경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며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수와 천황봉에 항상 걸려있는 안개,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 등 사시사철 다양하고 독특한 모습을

자랑한다.

정상에서 조망 중 다른 곳보다 특이한 것이 서쪽 향로봉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강진 앞바다와

우측에는 목포 앞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월출산소사지 안내문은 이 둥그런 계란형의 돌에 음각 되어 있다.

월출산 천황봉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낸 소사지(小祀址)로 전국명산대천(名山大川)의

제사터인 대사터 3곳, 중사터 24곳, 소사터 23곳 중 유구가 확인된 유일한 장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 왔는데 신라시대에는 천신(天神)이 산에 깃들었다하여 산신제(山神祭)를 주로 드렸다. 천신이 산에 깃들었다는 것은 천신

환웅이 태백산에 강림하였고 단군(檀君)이 아사달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신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천황봉 제사터에서 발굴된 유뮬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제향로와 토우편, 고려시대의 녹청자 접시와 청자탁잔편, 조선시대의

백자접시 및 기와편등이 있다. 출토된 유물은 제사관련 고급기송과 다수의 기와편들로서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하며 이 자리에는 제악(건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지방에서는 월출산 천황봉을 신성(神聖)시 하여 이를 찾기 며칠전부터 몸과 마음을 정갈이하며 국태민안(國泰民安)과

가문(家門)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천황봉에서 10여분을 보내고 일어서 가야할 건너편의 구정봉과 향로봉을 바라보며

이정표 「도갑사5.8km/구정봉1.6km/천황사2.6km/구름다리1.7km」옆으로 나있는 급경사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선다.

암봉들을 오르내리며 뒤돌아보면 천황봉에 이르는 능선이 선명하고..

 

가야할 구정봉과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암능 또한 아름답게 조망된다.

따가운 햇살이 드러나지만 나무그늘 하나없이 능선을 따라 계속 이어가는데...

 

 

 

 

 

남근바위 안내판을 지나 30m 가량을 지나면 우뚝 선 남근 바위에 이른다.

  

바위 정상에는 철쭉 한그루가 자라고 있다.

남근바위 사이를 빠져 나와..

 

뒤돌아본 천황봉..

 

바람재 뒤로 바라보이는 구정봉 장군암..

 

암릉을 따라 올랐다 내려서면 이정표「구정봉0.5km/도갑사4.5km/천황봉1.1km/경포대2.5km」가 있는 바람재 삼거리에

이르는데 좌측으로는 경포대로 내려서는 길이 있다.(11:05)

 

장군암..

 

 

억새밭 사이로 나있는 울타리를 따라 다시 오름길로 이어져 철계단을 지나면 이정표「억새밭1.6km/천황봉1.3km/베틀굴

0.1km/구정봉0.2km/마애여래좌상0.7km」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하여 베틀굴에 이른다.(11:15)

 

베틀굴 안내판...

「구정봉(九井峰)을 오르다보면 맨 먼저 나타나는 곳이 입을 떡 벌린 형상을 하고 있는 베틀굴이다. 이 굴(窟)은 옛날 임진왜란

(壬辰倭亂)때 이 근방에 사는 여인들이 난(亂)을 피해 이곳에 숨어서 베를 짰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굴의 깊이는 10m쯤

되는데 굴속에는 항상 음수(陰水)가 고여 있어 음굴(陰窟)또는 음혈(陰穴)이라 부르기도 하여 이는 굴 내부의 모습이 마치 여성

의 국부(局部)와 같은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더구나 이 굴은 천황봉 남쪽에 있는 남근석(男根石)을 향하고 있는데,

이 기묘한 자연의 조화에 월출산의 신비를 더해주고 있다.」

베틀굴을 지나 오르면 이정표와 출입금지 안내판이 서있는 곳에서 우측 구정봉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조망되고 멀리 지나온 천황봉은 구름에 잠겨 있다.

 

구정봉은 월출산의 제2봉으로 동굴 같은 좁은 길을 타고 올라서면 장정 20명이 앉을 수 있는 널찍한 암반이 전개된다.

편평한 바위 위에는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9개의 웅덩이가 있는데 이 웅덩이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하여 구정봉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한편 옛날 구림에 살던 동차진이란 사람이 이곳에서 하늘을 향해 오만과 만용을 부리다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아홉 번의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정상에 오르면 깎아지는 듯한 수천 척의 절벽이 눈앞에 전개되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이며

월출산 내에서는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이름난 곳이다.

 

구정봉에서 내려서 다시 마애여래좌상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직진하여 향로봉을 바라보며 진행한다.

구정봉에서 600m아래에 있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국보144호(國寶144號)인 이 마애석불(磨崖石佛)은 구정봉(九井峰, 해발 738m)에서

약 500m떨어진 벼랑아래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얼굴이 원만하고, 신체 각 부분의 비례가 적합하며, 몸길이는 6m,

무릎 폭 4m, 어깨 폭의 길이는 2.5m로 그 크기가 웅장하고, 정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오른손 옆에 86cm의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있어 더욱 이채롭게 느껴진다.

널따란 공터에서 향로봉을 향하여 이정표「천황봉1.5km/도갑사4.1km/마애여래좌상0.6km/구정봉0.1km」에서 잠시

휴식 후 멀리 월출산 천황봉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숲속으로 접어든다.(11:30) 

능선을 따라 직진하여 향로봉으로 올라야 하지만 향로봉은 휴식년제로 출입이 금지되어 우회한다.

 

대부분 사면길을 오르내리고 이정표「천황봉2.2km/구정봉0.8km/도갑사3.4km/억새밭0.6km」를 지나고(11:45) 

 

좌우로는 암봉들이 솟아있다.

 

온통 암릉으로 둘러쌓인 암릉..

 

잠시 후 헬기장을 앞에 두고 좌측으로 내려선다.(11:56) 

 

목장길처럼 양쪽으로 목책이 쳐진 길을 따라 내려서면 전망대에 이르고(11:58) 가야할 도갑산과 월각산이 바라보이고

그 뒤로 희미하게 별매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잠시 억새군락 사이로 내려서면 이정표「경포대4.3km/천황봉2.9km/도갑사2.7km」가 있는 억새밭삼거리로써 미왕재로

불린다.

 

국립공원특별보호구 안내판이 있는 목책을 넘어서면 다시 잡초가 무성한 널따란 헬기장에 이르는데(12:04)

 

좌측 능선을 따르면 무위사로 내려서지만 특별보호구로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무위사(無爲寺)」는 원효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로써 국보 제13호 극락보전과 보물 제507호 선각대사편광탑비와 3층석탑

백의관음도와 아미타삼존도를 포함 29점의 벽화를 보존하고 있는 벽화보존각이 유명하다.

락보전은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단아한 미학으로 유명하다.

무위사 건물들은 대부분 이 사찰의 네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지만 이 극락전만은 1430년(세종 12)에 지어졌다.

극락보전 건립 작업은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 참여한 국가적인 사업이었다고 한다.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벽이 삼각형으로 된 맞배지붕의 미학이 넘쳐난다.

또 맞배지붕은 측면 구조가 노출되므로 그 미관을 중요하게 여겼다.

 

헬기장을 지나 내려서면 가시덤불의 잡목들이 진행을 방해하고 잠시 내려섰다 오르면 이정표

「천황봉3.1km /구정봉1.6km/도갑주차장3.9km」가 있는 암봉 전망대인 500m봉에 이른다.(12:05)

잠시 내려섰다가 가로막은 목책을 넘어 올라서면 이정표「도갑주차장3.5km/억새밭0.5km/구정봉2.1km」가 있는 410봉을

지나서(12:15)

작은 암봉에 오르면 가야할 도갑산, 월각산, 별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우측에 노적봉이 우뚝 솟아 있다.  

또 좌측으로 성전저수지, 우측으로 도갑저수지가 바라보인다.

 

암봉을 내려서 그늘진 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12:20~33)

 

또다시 도갑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는 430봉..

 

잠시 내려서면 이정표 「도갑산주차장2.1km/구정봉3.5km/ 억새밭1.9km」가 있는 도갑재에 내려선다.

우측으로는 도갑사로 내려서는 하산로이다.

도갑사는 도갑산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잡은 도량으로 신라말(헌강왕 6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고려시대의 기록은 자료 유실로 알려진 것이 없고 조선 이후의 발자취는 소상히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옛부터「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이신 도선국사가 창건하신 대가람으로 그 뒤를 이은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깨달음의 참다운 이치를 널리 펼쳤다.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보현보살 사자 코끼리상

(보물 제1134호), 대형석조, 그리고 도선수미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산죽길을 따라 오르면 산죽능선을 지나고 고도를 낮추며 안부에 내려서지만 좌우에 아무런 길이 없고 다시 고도를 높여 오르면

386봉에 이르고 북쪽으로 우뚝 솟은 구정봉을 바라보며 다시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져 끝없는 산죽지대가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주지봉과 문필봉이 보인다.

329봉을 내려서면 바로 우측으로는 주지봉, 문필봉으로 분기되고 기맥길은 좌측으로 이어간다.

잠시 내려섰다가 오르막으로 이어지는데 능선길에 오르면 사방이 트이는 전망바위에 오른다.(13:51)

 

동으로는 340봉이 옆에 있고 남으로는 별뫼산, 가학산, 흑석산이, 서쪽으로는 주지봉과 문필봉이,

북으로는 우뚝 솟은 월출산 구정봉이 위엄있게 시야에 들어온다.

계속 고도를 낮추며 내려서는데 내려설수록 월각산이 높게만 느껴지고 한참을 내려서면 십자 안부 목동재 이른다.(14:34)

좌측으로는 성전저수지를 지나 성전면 죽전마을로, 우측은 영암군 학산면 목동리 목동마을로 내려설 수가 있다.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고 한차례 힘들게 올라서면 잠시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다시 가파른 오르막으로 변하여 한참을 오르면

조망이 트여 바로 앞에 월각산이 바라보이고(15:01)

 

잠시 후 이정표 「월각산정상0.3km/ 대월마을3.4km/땅끝기맥(월출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15:03~08) 

월각산 정상은 마루금에서 300m 가량 비켜나 있어 대월마을 방향으로 내려선다.

 

잠시 내려섰다가 오르면 전방바위에 이르고(15:09) 뒤돌아보면 월각산이, 동으로는 송월저수지,

남으로는 성전면 대월 뒷산 암봉들이 바라보인다.

 

능선을 따라가다가 봉우리에 올라 후미가 오기를 기다리며 바로 옆 정상부에 이르니

383봉으로 「땅끝기맥 383m/희,준」푯말이 나무에 걸려있다.(15:18)

 

잠시 내려섰다가 오르면 이정표「월각산정상1.3km/대월마을2.4km/밤재(땅끝기맥2.6km」가 있는 능선분기봉인

360봉으로 직진하면 대월마을로 내려서고 마루금은 우측으로 꺾어 내려선다.

후미를 기다려 휴식을 취하고(15:34~39) 내려서는데 조망이 트이며 멀리 별뫼산이 바라보이고 밤재로 이어지는 국도2호선이

바라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가야할 능선이 이어지는 것을 보니 까마득하다.

 

가파른 암벽을 내려와 다시 한동안 숲속을 헤치며 오르내림이 이어지다가 묘지를 지나면(16:16) 멀리 별뫼산이 바라보이고..

 

잠시 후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는 죽책을 넘어(16:19)..

 

넓은 가족묘지가 있는 곳에 이른다.(16:21)

 

잠시 후 도로 절개지 위에 이르는데 바로 아래로 국도 2호선과 우리들의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절개지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이정표 「땅끝기맥(월각산)3.9km/땅끝기맥(별뫼산)」가 있는 밤재에 내려선다..

밤재는 강진군 성전면과 영암군 학산면을 경계로 중앙분리대가 설치된 4차선(편도2차) 국도2호선이 지난다.

차들이 씽씽 달리지만 순간을 이용하여 중앙분리대를 넘어선다.

성화대학교 간판이 있고 건너편으로는 SK우진주유소가 있다.

이렇게 땅끝기맥 제3구간이 끝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