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청송 주왕산 대전사(大典寺)와 주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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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청송 주왕산 대전사(大典寺)와 주왕암

by 정산 돌구름 2024. 11. 5.

천년고찰 청송 주왕산 대전사(大典寺)와 주왕암


2024년 11월 5일, 주왕산 산행길에 찾은 주왕산 대전사와 주왕암에서..

경북 청송군 부동면 주왕산에 자리한 대전사(大典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주왕사적(周王寺蹟)에 의하면 진성여왕 6년(892년)낭공(郎空)대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또, 919년(태조 2년)에 눌옹(訥翁)이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 따 중창하였다고도 한다. 

<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자가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또한 신라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는 설도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1672년(현종 13년)에 새로 지어 현재 사찰의 중심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1976년에 보광전을 고칠 때 1662년의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이다.

또한 대전사는 최치원,나옹화상, 도선국사, 보조국사, 무학대사. 서거정, 김종직 등이 수도하였다.

조선 중기에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과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이 중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며, 옛날에는 이 암자에 큰 종이 걸려 있어 아침 저녁으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하나 지금은 걸려 있지 않다.

주왕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주방사로 추정되며, 나한전과 가학루·산령각 등이 남아 있다.

주요 건물로는 보광전과 명부전·산령각·요사채 등이, 유물로는 보광전 앞 삼층석탑과 사적비·부도 등이 남아 있다.

보물 제1570호로 지정된 보광전(普光殿)은 정면과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다포양식으로 천장은 '井'자 모양으로 꾸몄다.

공포는 내·외2출목을 이루는데 외부에서는 앙서(仰舌)로 되어있고 내부에서는 교두형으로 되어있어 조선 중기이후의 목조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로자나불(毘盧子那佛)을 모시고 있다.

내부에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李如松)이 유정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

경북문화재 자료 제468호로 지정되어 있는 명부전 지장탱화는 19세기로 넘어가는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지장보살의 머리에 원형의 두광, 신체에 키모양에 가까운 신광이 둘러져 있고, 채색이 짙어지고 물감이 두껍게 칠해지는 경향이 현저하다.

따라서 조선시대 후기의 불화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명부전 안에 있는 지장삼존 및 시왕상은 경북 문화재자료 제4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각성이 다소 미흡하고 재질과 제작연대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나 지장삼존과 시왕상, 권속이 완형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이 시기 지장삼존을 중심에 두는 명부계 존상의 조각경향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보광전 앞의 삼층석탑은 통일신라말기의 2층 기단 3층 석탑으로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 맞추어 복원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모양이 아름답고 조각수법이 정교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삼층석탑에는 부처님 진신사리 1과와 고승사리 3과도 함께 모셨다고 한다.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본래 이 절에서는 부처에게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하였다.

이를 귀찮게 여긴 승려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길어서 청수(淸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그 뒤 성지도사가 와서 이 절의 지세가 배가 바다에 떠서 항해하는 부선형(浮船形) 혈(穴)인데 여기에 우물을 파니 배 바닥에 구멍이 뚫어진 격이 되었기에 불이 나서 절이 타게 되었다면서 우물을 메우게 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노루가 우물에 빠져 죽은 뒤 메웠다는 설도 있고, 이 물을 마신 승려들의 힘이 넘쳐 난폭해지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많아지자 메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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