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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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

by 정산 돌구름 2023. 7. 19.

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


2023년 7월 19일, 무등산 증심사를 찾아서..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증심사(證心寺)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 헌안왕 4년(860년)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이 개창(開創)하고, 고려 선종11년(1094년)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했다.

세종 25년(1443년)에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다시 중수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1년(1609년)에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의 3대 선사가 4창(四創)했다고 한다.

그 후 신도들의 정성으로 몇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6·25전쟁 때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970년에야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복구되었다.

경내에는 오백전(五百殿), 3층석탑, 5층석탑, 7층석탑, 오백나한 및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 석조보살입상 등이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광주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오백전(五百殿)과 대웅전, 지장전(地藏殿), 비로전(毘盧殿), 적묵당(寂默堂), 종각, 일주문,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오백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오백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강진 무위사(無爲寺)의 극락전과 같은 계통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전내의 오백나한상은 1443년 중창 때 김방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 오는데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불상이다.

오백전 옆 높이 205㎝의 석불은 고려시대(10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으로 광주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로전 안에 안치된 높이 90㎝ 정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철불은 본래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옮겨온 것이다.

이밖에도 문화재로는 증심사 창건 때 만들었다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인 삼층석탑,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1933년의 보수 때 탑내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 입상 등이 나왔던 오층석탑,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칠층석탑 등이 있다.

특히,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절 입구의 왼쪽 산록에는 약 3만여 평의 차밭이 있다.

원래 증심사에서 공양을 위하여 가꾸어왔던 것이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하였고 광복후에 허백련(許百鍊)이 인수하여 고유의 차를 재배하였다.

절 주변이 광주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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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3일 오후 경내 법당에서 사천왕상 복장 유물 안치 의식을 열었다. 6.25전쟁때 소실된 사천왕문(四天王門)복원 공사를 마치고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6.25때 불탄 것을 1971년에 중건하였다.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배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중앙 칸이 좌우 협칸이나 퇴칸보다 2배 정도 크며, 어칸은 솟을빗살창이 달린 4분합문이다. 협칸과 퇴칸은 2분합문에 나뭇잎 모양의 빗살문이고, 그 아래 부분은 청판을 대고 당초문을 그렸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상은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석가삼존상이면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문수, 보현보살이 상례지만, 여기에서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은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탱화이다. 구도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ㆍ보현ㆍ관음ㆍ지장 등 8대 보살과, 범천ㆍ제석천, 10대 제자, 사천왕 등이 등장하고 있다. 화면 가득히 배치된 보살과 성문(聲聞)들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석가모니불의 좌대 아래에는 두 명의 동자가 합장한 채 서있다. 이 탱화는 1997년 불모(佛母)인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하였다
지장전(地藏殿)은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모두 2분합문을 달았다. 원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창방(昌防) 아래에는 4면에 모두 돌아가면서 주악비천상을 그렸다. 정면의 중앙과 왼쪽에 ‘지장전(地藏殿)’과 ‘회심당(繪心堂)’이라는 편액을 각각 달았다.
지장전의 주존인 지장보살은 영화대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민머리에 석장을 쥐고 있다. 문관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과 수행하는 모습의 도명존자가 협시를 하고 있다. 후불화로 지장보살화가 있는데 지장보살과 그 권속들이 표현되어 있다. 사후세계인 명부(冥府)의 심판관인 십대왕(十大王)과 그들이 주재하는 지옥의 모습을 나타낸 시왕탱이다.
5층석탑은 이중기단에 5층으로 된 석탑으로 옥신에 퇴화된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전체적으로 3층석탑을 따르고 있지만 기법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 석탑은 대웅전의 북쪽 공터에 있던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1933년 이 탑을 해체, 복원할 때 탑 내에서 금동불상 2구와 오층철탑(높이 19cm), 소형 철불 2구, 수정 1점, 청옥(靑玉) 23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금동석가여래입상(높이 15.9cm)은 국보 제211호로, 금동보살입상(높이 18.2cm)은 국보 제212호로 각각 지정 되었으나 6.25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오층석탑과 나란히 서있는 칠층석탑은 탑신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범자가 새겨져 있어 범자7층석탑(梵字七層石塔)이라고도 한다.
3층석탑(三層石塔)은 통일신라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증심사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71년에 해체,복원하였으며, 전체 높이는 340cm로 비교적 작은 편으로, 현재 광주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백전 앞 축대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초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 각 부재가 완전한 형태의 3층석탑이다. 높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탑신의 체감비율이 뚜렷하여 매우 안정감 있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하층기단 중석의 네 모서리에 귀기둥을 표시하고, 면마다 2개의 면기둥을 새겼다.
비로전(毘盧殿)은 대웅전 뒤쪽의 높은 축대 위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이다. 덤벙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에 모두 2분합문을 달았다. 정면 중앙 칸에는 권창윤(權昌倫)이 쓴 편액을 달았다. 내부구조는 대들보와 종보 위에 마루대공을 올려 종도리를 가구한 5량집이며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불단 위에는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주존으로 봉안하였으며, 그 뒤에 비로자나후불탱을 봉안하였다. 1986년 영주스님이 중수하였다
비로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은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광배(光背)와 좌대(座臺)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전체 높이는 90cm이다. 상호는 원만한 타원형이며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오백전(五百殿)은 대웅전 뒤편에 세워진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현재 광주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에서 6.25 당시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당우일 뿐만 아니라 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막돌허튼 쌓기의 기단(基壇)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둥근 기둥 위에 간단한 쇠서를 둔 익공식 건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불단 중앙에는 연꽃 좌대에 앉은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인 가섭, 아난존자를 배치하였다. 좌우와 뒤쪽에 계단식탁자를 설치, 오백나한을 빽빽하게 배열하였는데, 이들 아라한상은 상호가 우수하며 영험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원통전(圓通殿)은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주심포 정자형 건물로 2003년 9월에 착공하여 11월에 상량하였다.. 오백전 옆에 범자칠층석탑과 함께 서 있던 석조보살입상(광주유형문화재 제14호)이 세월의 풍화에 훼손되어 이를 보존하기 위한 전각으로 신축한 것이다
석조보살입상은 원래 오백전 우측 범자7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었으나,원통전을 보호각으로 건립하면서 옮겨 봉안하고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의 원래 위치에 대해 여러 의견이 많으나 서봉사지(瑞峰寺址)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1966년 간행한 『광주시사』에도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 터에 있던 것을 현준호가 사재를 들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기록하였다. 전체 높이는 205cm로 연화대좌는 원형이며 상, 중, 하대석과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대석의 앙련좌는 11엽의 단판연화문과 2엽의 큼직한 연화당초문이 혼합 조각되어 있으며, 하대석의 앙련좌는 두툼한 16엽의 복판연화문을 돌렸다. 지대석 역시 원형으로 측면을 분할하여 연화문을 만들었으나 분할을 잘못하여 9엽이 되어 있다
취백루(翠栢樓)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2층 팔작지붕 누각으로 하층에는 종무소와 큰방을 시설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상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터서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건립되었으나 6.25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원래 취백루는 정유재란으로 증심사가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년)에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 세 스님이 증심사를 4창하면서 세운 정문 누각이라 한다. 당시에는 아래층에 사천왕을 봉안하고 대웅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경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된 2층 건물로, 마루가 깔린 2층에는 법고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취백루라는 누각의 명칭은 ‘취백홍도(翠栢紅桃)’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시구에서 취해진 것이라 전하고 있다.   취백루가 처음 건립된 시기는 1574년(선조 7)에 쓴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취백루에 올라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증심사가 4창 되던 1609년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