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380호,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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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제주여행

사적 제380호,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by 정산 돌구름 2023. 3. 23.

사적 제380호,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2023년 3월 23일, 사적 제380호,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제주지방 통치 중심지였던 제주목 관아는 관덕정(보물 제322호)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 주요 관아시설이 자리하였던 곳으로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조선시대의 관아시설인 동헌(東軒)과 내아(內衙)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어 제주목의 관아지로 밝혀진 중요한 유적이다.

발굴조사로 밝혀진 건물지는 동헌터를 비롯하여 내아터·내대문터·홍화각터 등이며, 이들의 기단석 열과 주춧돌, 담장터 등이다.

시대상으로는 조선 전기 말 16세기경부터 후기 19세기경까지의 건물터와 담장터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들 조선시대 유구 밑에서는 통일신라시대(탐라국)의 문화층도 나타났다.

출토 유물은 기와조각이 대부분인데 그중에는 ‘시주목사겸만호이(施主牧使兼萬戶李)’·‘동원차처관(同願此處官)’·‘천승석(天承錫)’·‘남조(監造)’·‘명숭정사(明崇貞四)’·‘갑술년(甲戌年)’·‘고내촌(高內村)’·‘대문(大門)’·‘성소임신이월(城所壬申二月)’·‘시주만호부승석(施主萬戶夫承碩)’·‘만호겸목사(萬戶兼牧使)’·‘만호겸목사태(萬戶兼牧使泰)’ 등의 명문기와가 있다.

막새기와에는 연꽃무늬를 오목개김한 수법의 목판 형식과 단판 형식의 연판무늬장식이 있다.

도자기는 15∼16세기의 조선시대의 각종 분청사기 및 백자조각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내등(內謄)’·‘대해(大海)’·‘충(忠)’·‘향공(享供)’·‘정(丁)’ 등의 명문도자기가 출토되었다.

제주목 관아지는 조선시대 이후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등 많은 기록이 있어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1993년 3월 3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전문가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2002년 12월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제주시의 중심가에 자리한 관덕정(觀德亭)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어있다.

이중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익공집으로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인들이 보수하면서 15자 정도나 나왔던 처마를 2자 이상 잘라버렸다.

또한 1969년 대대적인 보수로 인하여 관덕정이 가지고 있던 제주도 특유의 맛은 반감되었다.

세종 30년인 1448년에 제주목사인 신숙청(辛淑晴)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지은 관덕정은 성종 11년인 1480년에 중수되었다.

관덕정은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 관덕정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에서 지은 이름이다.
이 정자에는 ‘관덕정’,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등 세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안평대군이 처음 썼던 현판은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이덕형의 장인이기도 한 이산해가 쓴 현판이 남아 있고,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901년에 일어났던 신축교난 당시 지도자였던 이재수가 관덕정 광장에서 효수되었다.

1947년 2월 10일에는 제주시내의 중학교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양과자를 먹지 말자”고 외쳤다.

그리고 근세의 역사에서는 4·3항쟁 당시 무장유격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시신이 며칠이나 내걸려 있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질녘 잠시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를 둘러보고 떠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