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산 향로봉 중턱에 자리한 천년고찰, 고성 운흥사(雲興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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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산 향로봉 중턱에 자리한 천년고찰, 고성 운흥사(雲興寺)..

by 정산 돌구름 2023. 2. 17.

와룡산 향로봉 중턱에 자리한 천년고찰, 고성 운흥사(雲興寺)..


2023년 2월 17일, 향로봉 산행길에 만난 조용하고 정갈한 사찰 운흥사..

천년고찰 운흥사(雲興寺)는 경남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와룡산(臥龍山) 자락의 향로봉 중턱에 위치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고려 충정왕 2년(1350년)에 창건되었다고도 한다.

이 절에 부속된 천진암(天眞庵)과 낙서암(樂西庵)은 조선 1692년(숙종 8년) 응화선사(應化禪師)가 창건한 암자이다.

임진왜란 때 이 지역 승병의 본거지로서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지휘하던 승군 6,000여 명이 왜적에 대항하여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수륙양면 작전을 꾀하기 위해 의논 차 세 번이나 왕림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실은 운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임진전망축원유전(壬辰戰亡祝願遺傳)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절의 규모는 부속암자인 천진암과 낙서암을 포함해 아홉 군데의 암자가 있었고 절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절터와 맷돌, 전방 1km 떨어진 언덕에 옛 고승들의 사리가 안장되어 있는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병화로 소실된 것을 효종 2년 (1651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는 화원양성소로도 유명하였는데 영조때 불화의 대가 김의겸스님 등을 배출하기도 한 도량이다.

이 절에는 영조 6년에 만들어진 괘불이 보존되어 있는데 우아하고 규모가 크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6존의 여래를 그리고 뒷면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친필로된 진언과 어언이 새겨져 있다.

그 외 다수 문화재급 유물이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일본으로 반출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일본의 동경 근진미술관에 있는 운흥사 종이며, 현재 대웅전에 봉안된 괘불은 세 번이나 해로로 반출하려다 실패하였다.

대웅전은 1624년에 중건된 독특한 이조 양식 건물이며 내부에 그려진 불화와 장식은 화려하면서도 예술성이 높다.

이 지역 호국불교의 사찰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면면히 이어오면서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숨져간 호국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영산재를 숙종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매년 행사로서 치루고 있다.

영산재에는 모든 생명들이 큰 화해와 하나 됨을 위해서 상생(相生)을 향한 산사(山寺)음악회가 열린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영산전·범종루·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경남유형문화재 제82호(1974년2월16일)인 대웅전은 안정사 대웅전으로 지정되었다 2018년12월20일 현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크기에 비해 기둥이 대단히 높아 건물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인다.

기둥은 민흘림과 배흘림이 섞여 있는데 배흘림기둥은 굵기나 곡선의 비율이 안정되어 있어 아름답다.

건물의 장식은 단순하게 처리했지만 장식물의 간격이 일정하고 기둥과도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부의 모습은 외부에 비해 훨씬 화려한데 중앙을 향해 피어오르듯 처리한 장식은 미려함을 더해준다.

천장은 층급을 두고 중앙을 높게 처리함으로써 거대한 공간감을 느끼게 하였다.

부처가 거처한다는 수미단을 상징하는 불단 위에는 닫집을 씌움으로써 신성성을 더해주고 있다.

마루 틀을 짜고 그 사이에 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운 우물마루는 소박하면서도 고급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계 맞배집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부에 삼존불상과 수월관음도·감로탱화·신중탱화가 있다.

수월관음도는 1730년(영조 6년)에 제작한 것으로 가로 2.4m, 세로 1.72m의 크기이다. 

1998년에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걸었다.

감로탱화는 아래 부분에 당시의 풍속을 살펴볼 수 있는 그림이 있어 당시 사회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운흥사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1985년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유물로는 운흥사 영산회괘불탱 및 궤·운흥사소장경판이 각각 보물 제1317호와 제184호로 지정되었다.

운흥사괘불탱은 1730년 의겸(義謙) 등 20명이 그린 불화로서 가로 768㎝, 세로 1,136㎝에 이르는 대작이다.

괘불궤는 이것을 담았던 보관함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세 번이나 본국으로 가져가려다가 심한 풍랑으로 가져가지 못했다고 한다.

뒷면에 휴정과 유정의 진언(眞言), 영조의 어인(御印)이 새겨져 있다.

운흥사소장경판은 모두 16종 194장의 목판으로 17∼8세기에 새긴 것이다.

그밖에 1690년에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산내 암자로는 절에서 와룡산 정상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천진암이 있고, 천진암에서 200m 위쪽에 낙서암이 있다.

절에서는 숙종 때부터 매년 음력 2월 8일 호국영령을 위한 영산재를 여는데 음력 2월 8일은 임진왜란 때 승병이 가장 많이 죽은 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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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암

천진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