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발길 머무는 곳에

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by 정산 돌구름 2022. 4. 30.

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2022년 4월 28일, 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모란은 져버렸지만 울긋불긋 핀 연산홍이 그나마 아름답다.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시문학파문학관을 둘러보고 떠난다.

강진 영랑생가(永郞生家)는 전남도기념물 제89호(1986년2월17일)로 지정되었다가 국가민속문화재 제252호(2007년10월12일)로 지정되었다.

김영랑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으로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생가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지붕을 시멘트기와로 보수하였고, 기단부와 벽체는 시멘트로 발라 원형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1985년 강진군이 그 집을 다시 사들여 복원작업을 하였고 원래 초가집의 원형으로 다시 지었다.

현재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등 3동만 남아 있고, 주변에는 영랑의 시어(詩語)가 되는 모란밭이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초가집이지만 뼈대가 굵은 네모기둥을 사용한 규모가 큰 집이다.

상량문에 “광무 10년 병오 4월(光武十年丙午四月)…”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집의 건립연대는 1906년임을 알 수 있다.

집 뒤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져 있고 언덕에는 오래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어 운치를 더하며, 봄이면 생가 마당에 조성된 모란이 만개한다.

사랑채는 흔히 안채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랑생가는 옆으로 길게 위치한다.

1930년대 건물로 전해지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오히려 본채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특이한 것은 전면과 양측 2칸에 ㄷ자형으로 마루를 깔았고 우측 1칸에는 마루 앞에 나지막한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안상형 궁창을 뚫었다.

창문은 이중창문으로 내창은 아(亞)자살 모양의 미서기창이며 외창은 띠살 모양의 여닫이창이다.

영랑(永郎)의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으로 1903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휘문의숙으로 유학을 가는데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려다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朴烈), 시인 박용철(朴龍喆)과도 친교를 맺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과 재혼하고, 순수문학의 길을 걷는데 그때가 1930년대이다.

이 때 쓰인 작품들이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모란이 피기까지’ 등의 작품들이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롭게 살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영랑생가 뒤편에 조성된 세계모란공원은 영랑생가 뒤편으로 이어져 영랑의 문학적 감성과 보은산 도시공원의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생태문학공원이다.

사계절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유리 온실과 세계 각국의 다양한 모란의 자태를 느낄수 있는 8개국 50종류의 세계모란원, 영랑 추모원, 생태연못, 전망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2,000여개의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하여 자연스러운 빛과 공원 내의 모란 폭포 및 다양한 조형물을 아름다운 조명으로 꾸며 밤의 매력을 연출하고 있다.

영랑생가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도 포함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