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칠암자순례길 칠암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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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아름다운 길

지리산 칠암자순례길 칠암자를 찾아서..

by 정산 돌구름 2022. 2. 6.

지리산 칠암자순례길 칠암자를 찾아서..


2022년 2월 5일, 지리산 칠암자능선에 있는 칠암자를 찾아서..

일명 삼정산능선이라고도 하는데 이 능선이 품고 있는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 실상사 등 일곱 곳의 암자와 사찰을 흔히 지리산 칠암자라 부른다.

도솔암과 상무주암, 문수암 등은 영원사 부속 암자들로 수행정진하는 청정도량답게 고산지대 능사면과 기암절벽을 등지고 천왕봉을 향하고 있어 앞에 막힘 없이 조망이 뛰어난다.

~^^~

첫번째 암자는 도솔암..

해발 1,165m의 도솔암(兜率庵)은 영원사의 부속암자로 영원사에 유명한 방광사리탑을 남긴 청매스님의 수도처로 유서가 깊다.

영원사와 함께 전란에 잿더미가 됐다가 최근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사립문에는 나무작대기 2개가 걸려있고, 사립문을 지나 우측 돌계단을 오르면 도솔암의 본채가 있다.

널따란 도솔암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504호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높이 44.1㎝, 무릎 너비 27.1㎝이다.

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1707년(숙종 33년) 조각승 진열(進悅)을 비롯하여 계초(戒楚), 신연(信衍), 태응(太應), 태원(太元), 청휘(淸輝)가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사찰, 영원사(靈源寺)..

해발 895m의 영원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고승이었던 영원조사가 건립했다고 하여 절 이름도 영원사라고 한다.

설화에 의하면 영원조사는 원래 범어사(梵魚寺)에서 수행하다가 욕심 많은 스승의 곁을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토굴을 짓고 10년 동안 정진대오(精進大悟)하였다.

그 뒤 다시 범어사로 돌아와서 흑 구렁이로 변한 스승의 업신(業身)을 제도한 뒤 영혼을 인도하여 지리산 토굴로 돌아가다가 한 부부를 만났다.

그는 부부에게 열 달 뒤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7년 뒤에 나에게 데려다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토굴로 돌아와서 7년 동안 절을 지어 영원사를 완성하였다.

찾아온 동자를 제자로 삼아 방안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뒤 문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 이 문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정진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뒤 동자는 문구멍으로 황소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도(悟道)하여 전생의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의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부용영관(芙蓉靈觀)을 비롯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12년을 수도하였고,

청매(靑梅), 사명(四溟), 지안(志安), 설파(雪坡), 상언(常彦), 포광(包光) 등 당대의 고승 109명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조실안록(祖室安錄)』에 기록되어 있다.

한 때 내지리(內智異)에서는 가장 큰 사찰이었다고 하며, 너와로 된 선방(禪房)이 9채에 100간이 넘는 방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도를 닦은 고승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원사는 여수사건 때 완전히 소실된 뒤 1971년에 중건되어 현재에는 인법당만이 있다.

문화재로는 영암당탑(靈巖堂塔), 설파당탑(雪坡堂塔), 중봉당탑(中峰堂塔), 청계당탑(淸溪堂塔), 벽허당탑(碧虛堂塔), 청매탑(靑梅塔) 등 부도 6기가 있다.

세번째 암자는 상무주암(上無住庵)..

해발 1,162m에 위치한 상무주암은 신라 경순왕 1년(861년)에 영원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선객의 벗 몇 명과 함께 상무주암에 머무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지눌 이후 상무주암에서는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가 수행하였다.

「원감국사비명」에 따르면 원감국사는 1284년부터 1286년까지 약 2년 동안 머물다 원오국사(圓悟國師) 천영(天英)을 이어 수선사의 제6세 사주가 되었다.

그러나 유서 깊은 상무주암은 6·25전쟁 때 무장공비 토벌작전 와중에 소실되었다.

이후 1954년 토굴 형태로 복원되었고, 현재의 당우인 법덩과 산신각은 그 후에 중창을 거친 것이다.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인법당(因法堂) 형태이며, ‘상무주(上無住)’라 편액하였다.

법당 뒤편에 있는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법당 동쪽으로 삼층석탑 1기가 자리하고 있다.

탑은 2중으로 된 기단석 위에 1층 탑신만 있고 2층과 3층은 지붕돌만 올린 형태로 고려말 고승 각운(覺雲)의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으로 전한다.

각운이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30권의 저술을 완료하였을 때 붓통 속에 떨어진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서광을 발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상무주암은 삼정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어 승려 수행처로 각광받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불자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네번째 암자는 문수암..

해발 1,060m에 위치한 문수암(文殊庵)은 신라 무열왕 6년(659년)에 마적(馬跡)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현재의 문수암은 선학원 소속으로 1965년 혜암(慧菴)스님이 중창하여 혜암이 이곳에 주석하던 때 영원사와 도솔암의 스님들이 와서 배웠다고 한다.

해인총림 제6대 방장과 대한불교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되기도 한 혜암은 쉼 없는 정진과 서릿발 같은 가르침으로 불제자들을 이끌었다.

혜암은 ‘위법망구(爲法忘軀)’ 즉,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몸을 버릴 정도로 하라’는 평생 법문과 함께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용맹 정진으로 유명하다.

돌층계를 오르면 바위는 석굴을 이루고 있고, 바위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동굴을 울린다.

천인굴로 불리는 이 석굴은 임진왜란 때 인근의 동네 사람들이 몸을 숨겨 피신한 곳이라 한다. 수십 명은 족히 들어앉을 정도의 크기이다.

삼불사(三佛寺)는 비구니 사찰로 절이라기보다는 깊은 산속 산골마을의 고향 집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삼불사는 조선시대 창건한 절이라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고, 지금은 비구니의 참선도랑으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해발 990m 고지대의 절이다.

법당을 중심으로 뒤로는 산신각이, 마당 앞으로는 탑과 석등이 서 있다.

법당에서 떨어진 곳에는 요사채 한 채 들어서 있고, 멀찌감치 해우소가 있다.

삼정산 자락 ‘견성(見性)골’은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사찰 앞 마당에 서면 건너편으로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 하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불주(三佛住)’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삼세불이 머무는 곳’을 의미하는데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의 삼신불이다.

6·25전쟁 때 기존에 모시던 3불이 소실되었으며, 현재 모시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1960년 경 개화사에서 이안(移安)하여 왔다고 전하여진다.

법당 위쪽의 황토와 돌을 섞어 만든 산신각에는 7점의 신산탱화와 7구의 산신석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중앙의 것은 여성상이다.

삼불주암에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용왕당에도 1구의 산신탱화와 산신석상을 봉안하고 있다.

법당 옆에는 3층 석탑이 1기 있고, 장독대 옆쪽으로는 삼불사와 관련한 5기의 비석이 있다.

삼정산 능선 끝자락인 772m봉 아늑한 능사면의 해발 560m에 자리하고 있는 약수암(藥水庵)은 보광전의 목조탱화(보물 제421호)가 유명하다.

1724년(경종 4년) 천은스님이 창건하였고, 서영대사가 중수하였으며, 경내에 항상 맑은 약수가 솟는 샘이 있어 약수암(藥水庵)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1918년 대유스님이 보광전을 다시 세웠고, 1937년과 1974년에도 중수하였으며, 현재 약수암은 목조 팔작지붕 집인 보광전과 목조 요사로 구성되어 있다.

1782년(정조 6년) 약수암에서 조성된 가로 183㎝, 세로 181㎝ 크기의 목각 탱화는 '실상사 약수암 목각탱화'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42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김제 모악산 금산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實相寺)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증각(證覺)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구산선종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3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다.

문화유적은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석등(보물 제35호), 부도(보물 제36호), 삼층쌍탑(보물 제37호),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 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약수암목조탱화(보물 제421호) 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제45호), 위토개량성책(제88호), 보광전범종(제138호), 백장암보살좌상(제166호), 백장암범종(제211호) 등 5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