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기행] 삼국유사를 집필한 천년고찰 군위 인각사(麟角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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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기행] 삼국유사를 집필한 천년고찰 군위 인각사(麟角寺)~

by 정산 돌구름 2021. 5. 10.

삼국유사를 집필한 천년고찰 군위 인각사(麟角寺)~


2021년 5월 3일, 천년고찰 군위 인각사를 찾아서~

고려 명승 일연이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천년 고찰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사적 374호로 지정된 인각사지 경내에는 보물 428호인 보각국사탑과 비가 있다.

연등이 가득한 경내를 잠시 둘러보고 떠난다.

사적 제374호(1992년 5월 28일) 인각사지(麟角寺址)는 화산(華山) 최북단 기슭, 위천(渭川)변의 퇴적지에 자리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인 인각사(麟角寺)는신라 선덕여왕 11년( 64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번성하여 고려시대에는 국존(國尊) 일연(一然)스님이 충렬왕 10년(1284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5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이 당시 인각사는 구산문의 도회(都會)를 개최할 정도로 사세(寺勢)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퇴락하여 거의 폐사가 되었다가 1721년(경종 1년) 성화(性和) 스님이 화주를 맡고 배흥일이 시주하여 대웅전·극락전·승방·종루 등을 중수가 하였다.

1991년, 1992년 2차에 걸쳐 경북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대웅전터로 추정되는 기단부에서 통일신라시대 유구가 확인되어 신라 말기에 이미 존재하였 것으로 짐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각사는 화산에 있으며, 동구에 바위 벼랑이 우뚝한데 옛 말에 기린이 이 벼랑에 뿔을 걸었으므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으로 전한다”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사찰 경내는 좁고 좌우측에는 넓은 평지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경내에는 최근 해체·보수된 극락전과 요사 2동, 명부전, 국사전, 미륵전, 산령각, 일연선사 생애관, 인각사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 및 비(보물 제428호)가 있다.

보각국사탑비는 고려 의종 7년(1153년)∼9년(1155년) 사이에 죽허 스님이 왕희지 글씨를 모아 세웠지만 임진왜란 당시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426호(2002년8월19일)인 인각사 미륵당 석불좌상은 미륵당에 모셔져 있는 석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눈을 반쯤 뜨고 명상에 잠긴 듯하며 풍만한 얼굴엔 자비로움이 가득하고, 코는 파손되어 원래 상태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균형있게 처리되어 있다.

입술은 작고 도톰하게 새겨 풍만한 얼굴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고, 목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는데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어깨가 마멸되어 있긴 하지만, 세심하게 새긴 옷주름으로 보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우견편단으로 옷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두 팔과 무릎이 깨어져 없어졌는데, 무릎은 불신에 비해 높은 편이나 안정된 비례감은 잃지 않았다.

손 모양은 왼손의 팔꿈치를 굽혀 무릎 쪽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고, 오른손은 전체적인 조형상 촉지인(觸地印)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부피감 있는 얼굴, 평행계단식 옷주름선, 양감있는 가슴 표현 등의 조각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이 불상은 인각사의 창건 연대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불상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2002년8월19일) 인각사석불좌상(石佛坐像)은 불신과 배(舟) 모양의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는 굵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적당히 살이 오른 얼굴은 원만한 인상이며, 두툼하게 처리한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흐르고 있다.

특히 뺨을 솟아나게 처리하고 눈두덩을 불룩하게 처리한 데 비해 코와 입을 작게 하고 귀를 길게 처리한 점 등을 볼 때 잘 묘사된 불상으로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평행된 옷주름이 촘촘하게 물 흐르듯 새겨져 있으며, U자형으로 넓게 트인 가슴에는 속옷과 띠매듭이 드러나고 있다.

무릎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옷주름은 양팔뚝을 감싸고 흘러내린 대의(大衣)의 주름과 겹쳐져 무릎 부근에서 크게 3단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손 모양은 오른손으로 촉지인(觸地印)을 취하고 있고, 왼손으로 선정인(禪定印)을 취하였으며, 손 위에는 조그마한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으로 볼 때 10세기에서 11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이 시기의 불상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427호(2002년8월19일) 인각사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탑의 양식을 이어 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다.

지표면 위에 노출되어 있는 상대기단의 갑석은 2매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툼한 부채꼴 모양의 받침에 얕은 사각형의 받침이 겹쳐져 있는 이중의 탑신 괴임대가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옥신의 체감비율과 어울리게 줄어들고 있으며,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전체가 4단으로 되어 모서리의 선은 많이 둥글려져 있다.

3층의 옥개석 위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앙화(仰花) 등이 차례로 놓여 있고 그 위에 보륜(寶輪)이 얹혀져 있는데 앙화와 마찬가지로 문양이 많이 마멸되어 있다.

보륜의 위에는 불꽃 모양의 장식물이 이어져 있는데 상륜부의 다른 부재에 비해서 석질이 달라 원래 탑재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단의 우주하단에 있는 재목을 서로 이을 때 쓰는 나뭇조각 자국이나 갑석과 면석이 이완되면서 보이는 적심석을 볼 때 한번 해체되었다가 조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탑의 양식은 전형적인 신라탑 양식을 이어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가 남아 있어 양식과 구조연구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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