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송시열 글씐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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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발길 머무는 곳에

보길도 송시열 글씐바위~

by 정산 돌구름 2021. 1. 29.

보길도 송시열 글씐바위..


2021년 1월 26일, 보길도 여행, 우암 송시열 글쓴바위를 찾아서.. 

보길도의 동쪽 끝자락 백도리의 해안절벽에 윤선도와 동시대를 살아간 우암 송시열이 유배길에 들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싯구를 음각한 곳이다.

해안절벽과 어우러진 햇살, 바다 건너 소안도 경관은 너무도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글쓴바위는 보길도의 선도리 마을 앞 바닷가의 암벽을 말한다.

우암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 유배길에 올라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잠시 쉬며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새기어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여든세살 늙은 몸이 만경창파를 해치며 바다를 가는구나....’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시로 표현하여 바위에 새겨 놓았다.

조선 숙종이 후궁 장옥정 사이에 낳은 윤(昀)을 원자로 책봉하고 후궁 장씨를 희빈으로 삼겠다고 하자 송시열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되어 제주 귀양길에 오른다.

암각시문은 귀양가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표착하여 머물면서 자신의 처지를 시로 표현하여 바위에 새긴것이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팔십삼세옹 창파만리중)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일언호대죄 삼출역운궁)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북국공첨일 남명단신풍)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초구구은재 감격읍고충)

이후 우암의 후학인 임관주라는 사람이 1707년 같은 바닷길로 유배를 가다 이곳에 들러 『동국의 』라는 오언 절구를 남겨 오늘에 전하고 있다.

글쓴바위는 보길도와 소안도 사이 해협으로 소안도가 손에 잡힐 듯이 바다에 떠있으며 주변은 해조류가 풍부하고 해식애가 발달한 천혜의 바다낚시터이다.

『청산(靑山)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늙고 병든 몸이 북향(北向)하여 우니노라 님 향하는 마음을 뉘 아니 두리마는 달밝고 밤 긴 적이면 나뿐인가 하노라』

『임이 헤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을 뉘 손에 옮기신고 처음에 뮈시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우랴 팔십세 늙은 몸이 거치른 만리길을 가노라. 한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만 궁하구나. 초구(임금이 하사한 옷)에는 옛은혜 서려 있어 감격하여 외로이 눈물 흘리네』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암 송시열은 서인, 윤선도는 남인을 대표하며 조선 중기 치열한 당쟁의 격론 속에서 송시열의 탄핵으로 윤선도가 유배를 떠났을 정도로 화합할 수 없는 정적이었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던 윤선도가 풍랑으로 잠시 머무른 보길도의 모습에 매료되어 세연정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반면, 역시 유배길에 이곳에 들른 송시열은 해안 절벽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싯구를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던 도중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송시열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이었을까.

바위에 새겨진 싯구는 탁본 등으로 시커멓게 훼손되어 있지만 바다 건너 소안도를 눈앞으로 두는 경관은 너무도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이다.

보길도 송시열 글쓴바위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 포함된 곳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