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는 곳, 너븐숭이 4.3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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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제주여행

제주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는 곳, 너븐숭이 4.3기념관..

by 정산 돌구름 2020. 3. 24.

제주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는 곳, 너븐숭이 4.3기념관..


 

2020년 3월 15일(일), 15박16일 일정으로 떠난 제주도 캠핑여행 13일차이다.

김녕해수욕장 주차장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김녕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한다.

먼저 제주밭담테마공원을 둘러보고 올레길 20코스가 시작하는 김녕서포구로 이동하여 금속공예벽화마을을 잠시 둘러본다.

다음 코스로 둘러본 곳은 너븐숭이 4.3기념관, 이곳은 제주올레 19코스가 지난다..

 

북촌리는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이다.

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지만 서우봉과 접해 '해동'이라는 마을이 서쪽에, 또 산간 선흘리 방향으로 '억수동'이란

마을이 흩어져 있기도 했었다.

북촌리는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관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부터

늘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고, 4․3의 와중에는 많은 청년들이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자의반타의반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1948년 12월 16일에 첫 번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민보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고 토벌대에 협조하던 24명의 주민들이 느닷없이 군인들에 끌려가 동복리 지경 '난시빌레'에서

집단총살 당한 것이다.
이 엄청난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1949년1월17일,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학살 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쪽 들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다.
명절처럼 제사를 한날 한시에 지내는 북촌리에는 너븐숭이 애기무덤 등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느낄수 있는  많은 흔적들이 있다.

1949년1월17일 함덕주둔 2연대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100여명씩 끌려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주민들을 집단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녀자 등 일부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들의 시신은 임시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당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이 지금의 너븐숭이 소공원이다.
이곳은 4․3 이전부터도 어린아기가 병에 걸려 죽으면 묻던 곳이라 한다.

지금까지 소나무와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무덤이 드러나지 않았다가 2001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사업으로 부지가 정리되면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금 현재 이곳에는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있고 그 옆 밭과 길 건너에도 몇 기의 애기무덤이 있다.

 

그중 적어도 3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이곳의 모든 무덤들이 4․3 희생자의 무덤은 아니지만 당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잔디나 변변한 장식도 없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 참혹하고 무모한 학살을 알려주는 소중한 공간이다.

따라서 어설프게 무덤을 치장하거나 양지로 이장하는 성역화보다는 지금 현재 상태로 과거의 아픈 역사를 반추하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