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의 선비의 고장, 영주 선비촌..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발길 머무는 곳에

소백산 자락의 선비의 고장, 영주 선비촌..

by 정산 돌구름 2019. 7. 29.

소백산 자락의 선비의 고장, 영주 선비촌..


 

2019년 7월 28일(일), 7박8일 캠핑여행 7일차..

이른 아침 평창 육백마지기를 출발, 영월 선돌, 영주 부석사를 거쳐 소수서원에 도착한다.

세찬 빗줄기가 오락가락한 날씨에 소수서원을 거쳐 인근 선비촌에 이른다.

소수서원을 나와 죽계천변을 걸으면 백운교 건너편에는 소수박물관이 있고 죽계교를 건너서는 선비촌이다.

기와집과 초가를 중심으로, 강학당, 대장간, 물레방아 등이 모여 있다.

집집마다 생활 도구를 전시해 선비의 학문과 생활공간을 같이 체험, 교육하도록 했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육룡이 나르샤> 등의 촬영지로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역사 여행은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고, 위로와 치유의 다독임을 넘어 마음의 다스림에 이르는 여정이다.

선비촌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여행 1001’ 에 포함된 곳이다.

 

소백산 자락 선비의 고장 영주 선비촌..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 354번지 일대에 자리잡은 선비촌은 조선시대의 전통가옥을 복원하고 생활상을 재현하여 유교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는 테마파크이다.

조선 선비와 상민의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된 전통 민속마을이다.

1997년 12월 17일 1단계 1차 공사가 착공된 뒤, 여러 차례 나누어 진행된 공사를 거쳐 2004년 9월 22일 문을 열었다.

죽계천()에 접한 논을 흙과 돌로 메워 마련한 1만7,459평(57,717㎡) 부지에 들어선 선비촌은 문화쇼핑영역, 전시숙박영역,

휴게영역, 교육영역, 편익시설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선비촌의 핵심을 이루는 12채의 고택은 영주 관내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던 기와집과 초가집의 본디 모습을 되살려 지었다.

입신양명(), 거무구안(), 우도불우빈() 등의 선비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만죽재 고택, 해우당 고택, 김문기 가옥, 인동장씨 종택, 김세기 가옥, 두암 고택, 김상진 가옥 등 기와집 7채와 장휘덕 가옥,

김뢰진 가옥, 김규진 가옥, 두암 고택 가람집, 이후남 가옥 등 초가집 5채는 가족 관광객들이 숙박할 수도록 개방된다.

또 고택에 따라 윷놀이, 제기차기, 장작패기, 지게지기, 새끼꼬기 등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고택 12채 외에 정자, 물레방아, 강학당, 원두막, 대장간 등의 민속시설과 강학시설, 음식점, 주차장 등도 마련되었다.

만죽재고택(晩竹齋古宅)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1990년8월7일)로 지정되었다.

반남박씨() 판관공파()의 종가()이자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현종 때 박수()가 무섬마을에 입향하면서 지었으며, 당호()는 원래 마을의 옛 명칭인 섬계()를 따서 섬계초당이라고

하였으나 후대에 중수()하면서 만죽재()를 사용하고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모양의 안채와 '일()'자 모양의 사랑채가 합쳐져 'ㅁ'자 모양을 이룬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5칸에 대청 3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상방 1칸, 고방 반칸, 문간 반칸이 연달아 놓여 있다.

문간은 안마당 쪽으로 벽체 없이 개방하고 서쪽에 널문을 달아 옆마당으로 통하게 하였다.

중문 좌측은 사랑채 부분으로 전면은 낮은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툇마루에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기단은 시멘트 몰타르로 상면을 마감하고 그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았다.

기둥은 안대청 전면과 사랑채 툇기둥만 둥근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안대청 상부는 간결한 3량가()이고 사랑채는 5량가()이다.

지붕은 사랑채 부분만 독립된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얹었다.

마을의 고가들이 대부분 대문 우측에 사랑이 있으나 이 집은 좌측으로 독립된 사랑을 두었다.

해우당고택(海愚堂古宅)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2호(1990년8월7일)로 지정되었다.

고종 16년(1879년)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락풍()이 지은 살림집이다.

문수면 수도리는 예안() 김씨와 반남() 박씨의 집성촌이며 주변 자연 형국이 하회마을과 유사하다.

이 집은 마을에서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데 산기슭에 자리잡고 북서로 향을 잡았다.

현재는 ㅁ자형 평면의 안채 1동만 남아 있는데 사랑채가 부설되어 있다.

6칸 대청이 중심에 있고 우측에 2칸의 안방, 좌측에 상방()과 아랫상방이 있다.

다 모기둥을 세웠으나 앞쪽 기둥 둘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안방과 사랑채 사이에 부엌이 2칸 있고 부엌에 이어 사랑채의 책방이 있다.

그 책방 우측으로 다시 방이 되면서 돌출, 사랑채 평면을 확보하였다. 책방 앞쪽에 마루방 그 좌측으로 사랑방 2칸, 방 앞에 3칸

대청이 전개되고 앞의 두리기둥 밖으로도 반반 칸 나간 마루가 있고 그 끝에 난간이 설비되어 있다.

이 사랑방은 앞에서 보면 댓돌 없이 높은 다락기둥이 서있는 구조며, 마루방은 사분합 띠살문이 달려 상당히 고품격으로 보인다.

사랑방 뒤로 반반 칸의 반침과 안마당으로 통하는 통로가 열렸고, 사랑방 좌측이 중문칸, 다음이 마루방에 이어 아랫사랑이다.

북쪽으로 꺾이며 고방, 다음이 ‘목방’인데 이는 신혼 부부가 초야를 지내는 곳이라 한다. 목방 북쪽이 부엌이고 상방으로 이어져

ㅁ자 평면이 마감된다. 부엌에는 다락이 있다.

구조상에서는 별다른 특색이 없으나 평면 구성에서는 종가로서의 다용도와 기능이 고려되었던 듯하다.

아랫사랑은 젊은이들의 전유 공간으로 큰사랑에서 분할된 듯하고 큰사랑은 누마루가 지니는 격조나 권위를 고려했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다수 모일 수 있도록 평면을 증대시키느라 애를 썼다고 느껴진다.

인동장씨종택(仁同長氏宗宅)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8호로 중종 때에서 명종년간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세조 때 적개공신() 장말손()의 현손()인 장언상()이 집을 짓고 살기시작한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장씨집성촌이 되고 이 집이 종가가되었다.

안채 장말손공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과 유물보호각이 있고, 보호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것과 여타의 자료가 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이어져 있으나 구조적으로 분리되면서 다락집이 되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6칸 중 방이 2칸이고 나머지는 마루이다. 굴도리의 소로 수장집으로 5량집을 구성하였다.

안채는 사랑채 우측의 중문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청은 3칸, 좌측에 큰방과 부엌이 있고 우측에 상방, 부엌, 고방등의 기능으로 분할되어 있다.

사당은 3칸에 간반통으로 앞퇴가 있고 맞배지붕 구조이다. 특색은 없다.

유물각은 안채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1984년에 콘크리트조로 건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