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이와 금봉이의 사랑, 제천 울고넘는 박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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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발길 머무는 곳에

박달이와 금봉이의 사랑, 제천 울고넘는 박달재..

by 정산 돌구름 2019. 6. 26.

박달이와 금봉이의 사랑, 제천 울고넘는 박달재..


 

2019622(토), 충북으로 떠난 캠핑여행 셋째날은 충주 솔밭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제천으로 향한다.

아침 일찍 제천으로 향하는 길에 둘러본 박달재공원..

지금은 터널이 뚤려 차량 통행이 뜸하여 아침에는 텅빈 주차장에 차를 두고 뒤편을 한바퀴 돌아나온다.

 

울고넘는 발달재(朴達峙)..

천등산() 박달재(朴達峙)라고도 하며,  제천시 봉양면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해발 453m의 고개이다.

이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박달재라고도 하고, 이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천등산과 지등산이 연이은 마루라는 뜻에서 이등령으로도 불렸다.

예부터 제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관행길이 나있으나 첩첩산중으로 크고 작은 연봉이 4면을 에워싸고 있어 험준한 계곡을 이룬다.

이곳은 1217년(고종 4년) 7월 거란군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해 왔을 때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전공을

세운 전승지로 유명하다.

인근 지등산·인등산과 함께 천()·지()·인()을 모두 갖춘 신령스런 곳으로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소로 알려져 있다.

산에는 잣나무 ·전나무 ·향나무 ·육송 등의 상록수가 울창하며, 도로가 구비돌아 9곡()의 유서 깊은 박달재로 유명하다.

박달재 아랫마을 금봉 처녀와 과거를 보러 가던 영남 박달 도령의 애달픈 사연이 전한다.

옛날 경상도 청년 박달도령이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 아랫마을 금봉이 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박달은 과거급제하면 돌아와서 금봉이와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언약하고 상경하였다.

금봉이는 도토리묵을 장만하여 낭군이 될 박달도령 허리춤에 매달아주고 먼길에 요기하도록 배려했다.

낙방한 박달이 슬픔에 잠긴 채 돌아오다가 평동 금봉이 집을 찾았는데 금봉이가 박달을 기다리다 지쳐 3일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때 마침 박달은 고갯마루 방향을 바라보니 꿈에 그리던 금봉이가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있는 힘을 다해

박달은 고개 쪽으로 달려가 금봉이를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박달은 간신히 고개 위에서 금봉이를 끌어안았으나 금봉이는 이내 사라지고 박달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천길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박달은 금봉이의 환상을 보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는 이 고개를 박달재라고 한다.

1948년에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울고넘는 박달재(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가 발표되었다.

제천시 국도변의 박달재휴게소 입구에는 노래 가사를 적어 넣은 박달재노래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