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 진주성(晉州城), 그리고 촉석루(矗石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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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 진주성(晉州城), 그리고 촉석루(矗石樓)

by 정산 돌구름 2018. 4. 22.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 진주성(晉州城), 그리고 촉석루(矗石樓)..


2018년 4월 20일 금요일, 맑은 날씨..

모처럼의 휴가, 창원과 진해로 캠핑카를 보러가는 길에 진주성을 둘러본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인 진주대첩의 현장이자 임진왜란의 최대 격전지였으며, 그리고 호남을 지키는 방패이기도 하였다.

진주성은 진주시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 있는 둘레 1.7km의 석성(石城)으로 삼국시대 백제 때 처음 축성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진주대첩의 현장이기도 하다.

진주성은 고려 말까지는 토성이었으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석성으로 수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병사 김수와 이수일이 성을 증축하면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게 되었고, 광해군 때 남이홍이 성을 증축하면서 11개의 포루를 설치하게 되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던 진주성은 한일합방 이후 원형이 훼손되어 내외성의 구분이 사라졌으며, 1983년에 복원정비를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진주시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찾는 대표 명소로 1963121일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시내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관광객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진주 논개제를 비롯해 개천예술제, 제야 타종행사, 각종 사생대회 등 진주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야외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성공적인 지역 축제의 사례로 꼽히는 진주남강 유등축제의 행사장으로도 매년 사용되고 있다.

원래 남쪽의 남강, 그리고 북쪽은 연못이 해자(垓子) 역할을 하는 천혜의 요새였으나, 일제강점기 때부터 도시 개발이 진행되며

연못들은 전부 매립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서장대 아래 나불천을 북쪽으로 이어 지금의 진주경찰서, 진주교육지원청, 중앙로터리, 동방호텔 일대를 해자로

하는 둘레 4km의 외성(外城)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외성복원의 의미로 촉석문부터 진주교 사이 구간에 진주대첩광장을 조성하고 있다.

진주성에는 촉석루(矗石樓), 의기사(義技司),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 공북문(拱北門), 영남포정사(嶺南

布政司), 진주성 비석군(碑石群), 청계서원(淸溪書院), 경절사(擎節祠), 북장대(北將臺), 국립진주박물관(國立晋州博物館),

창렬사(彰烈司), 호국사(護國寺), 서장대(西將臺) 등 진주시의 많은 문화유적들이 경내에 흩어져 있다.

촉석루는 2012CNN go에서 선정한 한국의 명소 50’ 안에 선정될 만큼 건축미와 풍경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추고 있다.

촉석루에서 남강과 함께 내려다 보이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강 건너편 망경동 강변에서 바라보는 야경 또한 몹시 아름다워서

진주성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진주성 공북문(拱北門)

17세기 말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공북문(拱北門)은 내성의 북문이자 정문에 해당하는 문이다.

<진주성도>, <진주성 병풍도>, <여지도서> 등에 공북문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공북이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공북문은 성벽과 나란히 자리 잡고 있고, 홍예문 위로 2층의 누각을 올린 형태였다.

누각은 정면 3칸 구조로 2층은 1층보다 각 칸의 넓이를 좁히면서 올렸음을 알 수 있다.

또 왕을 바라보는 문으로 위엄을 갖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주성의 다른 문보다 높게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공북문 바로 앞에는 진무청과 중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북문은 조선말 훼손되었다가 19965월, 6월 경남문화재연구원 발굴조사를 거쳐 200253일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현재 높이는 5.3m, 1층 면적 약 66m², 2층 면적은 46로 되어 있다.

공북문은 병사 이수일(李守一)이 김수(金睟)가 쌓은 성이 너무 넓어 전체를 지키기가 힘이 들자 유사시 내외성을 모두 지키기

어려우면 내성만을 지키고자 쌓은 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진주성도를 참고로 하면 공북문은 내성의 북문에 해당하며,

홍예문(虹霓門) 위로 2층의 누각을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도 내성의 북문은 2층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북문은 공북문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진주성도에 그려진 것을 참고로 한다면 공북문은 성벽과 나란히 위치하며 홍예의 높이는 성벽의 높이와 거의 같고,

홍예 위로 올린 누각은 정면 3칸의 구조지만 2층은 1층보다 각 칸의 넓이를 좁히면서 올렸음을 알 수 있다..

 

공북문(拱北門)의 ()’은 두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절한다는 뜻이고, ‘()’은 북쪽이라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 남면한 임금을 올려다보는 방향이 된다.

고려사공립(拱立)’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공경을 표하기 위하여 두 손을 마주 잡고 서 있다라는 뜻이다.

, ‘공북이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공손하게 절을 올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북문을 들어서면 충뮤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장군의 동상이 자리한다.

김시민장군은 본관이 안동(安東)아며, 자는 면오(勉吾)로 목천(木川) 출신이다.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김충갑(金忠甲)이다.

1578(선조 11)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軍器寺)에 입사하였다.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 자연 재해로 입은 피해를 구제함)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기 위해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김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방식을 모방해 염초(焰硝) 500여 근과 총통(銃筒) 70여 병()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해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10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했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탄환을 맞았고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진주성 비군(碑群)..

 

진주성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축물인 영남포정사 문루(嶺南布政司 門樓)서북쪽 언덕에 모여 있는 비석들이다.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진주성과 시내 각처에 흩어져있던 공덕비와 유애비 30여기를 이곳에 모아 배치하였다.

대표적인 비석은 1606년 건립된 병사겸목사 이수일 유애비(兵使兼牧使李守一遺愛碑)’이다.

이 비석의 비문은 <촉석루중수기>를 썼던 진주의 이름난 선비 송정 하수일이 지었으며, 글씨는 봉강 조겸이 썼다.

이수일(李守一)1604년 당시 합포(지금의 마산)에 있던 경상우병영을 진주로 옮겨온 인물이다.

그밖에 진주목사 이상일(1600~1674)의 선정을 기리는 이상일선정비(李尙逸善政碑, 1654년 건립)’,

병사 이진경의 공을 기리는 이진경선정비(李眞卿善政碑, 1702년 건립)’

정기택선정비(鄭騎澤善政碑, 1888년 건립), ‘한규설선정비(韓圭卨善政碑, 1887년 건립)’ 등의 비석이 있다..

 

슬픈 전설을 간직한 용다리의 흔적들..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4(1983720)로 지정된 북장대(北將臺)..

 

북장대(北將臺)는 진주성 북문의 지휘장대로 임진왜란 때 군 지휘소로 사용되었다.

그 당시 소실된 것을 1618년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건물이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한 것이다.

 

내성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성내외의 포진까지 살피며 지휘할 수 있었던 곳으로 편액은 진남루(鎭南樓)라고 되어 있다.

 

형태는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락집형 건물이다.

건물 위에는 좌측으로 인사동이 보이고, 정면으로는 비봉산이 보이며, 오른 편으로는 진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진남루 옆 성벽..

 

무슨 건물일까?

 

진주성 사랑나무, 팽나무와 느릅나무가 서로 합쳐져 있다..

 

포루(砲樓)..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이 있다..

 

창렬사로 들어서는 첫관문인 외삼문, 유중문(有重門)..

 

내삼문인 전파문(傳葩門)..

꽃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꽃 파(葩)를 써서 즉 헌화한다는 의미이다..

 

우측에는 제장군졸지위(諸將軍卒之位) 비석..

그 옛날 박정희 육군대장이 세운 것인데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있을 때이다..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5(1983720)로 지정된 창렬사(彰烈祠)..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39위와 모든 군졸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였다.

사당의 규모는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서무, ·외삼문, 비각 등 7동의 건물이 있다.

사당의 현판은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가 썼다.

1593(선조 26) 서울에서 물러나 부산 등지에 집결되어 있던 왜군은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10여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김천일 등은 끝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순절하였다.

이에 왜란이 끝난 뒤 관민이 협력하여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사우를 세웠으며, 1607년 창렬사(彰烈祠)로 사액되었다.

1712(숙종 38) 병사 최진한(崔鎭漢)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김시민 목사의 신위는 본래 진주성 안에 있었던 충민사(忠愍祠)에 모셨으나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민사가 훼철되자 이곳 창열사 주변에 옮겨 모셨다.

창렬사에서의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지내고 있다.

 

중앙의 정사(正祠)에는 충무공(忠武公)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을 필두로 하여,

문열공(文烈公)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무민공(武愍公)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황진(黃進),

 

충의공(忠毅公)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의공(忠毅公)장윤(張潤), 효열공(孝烈公)고종후(高從厚),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유복립(柳復立) 등 모두 7분을 열향(列享)하고 있다..

 

나머지 신위는 동사(東祠)와 서사(西祠)에 모셔져 있다...

 

 

창렬사 앞의 거대한 나무가 푸르름을 더한다..

 

 

월영산 호국사(護國寺)..


진주성 안에 있는 호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고려시대에 창건하여 산성사(山城寺)라 하였다.

왜적의 침범이 심하였던 고려 말에는 이곳에서 승병(僧兵)을 양성하여 성 안의 장병들과 더불어 이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 때에는 승군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고 왜병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때 왜병에 의하여 소실된 뒤 중건되었으며, 숙종 때 호국사라는 이름을 사액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삼존불을 안치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칠성각·누각·요사채 등이 있고,

대웅전 앞뜰에는 7층 사리탑 2기가 있다.

또한, 최근의 진주성곽 보수 당시 일주문지(一柱門址)를 지하 2m에서 발견하여 현재의 문으로 신축하였다.

주변에는 월영산(月影山)과 남강·촉석루 등이 인접하고 있고, 거목들이 절을 에워싸고 있어 참배객과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진주 제일의 명찰이다. 근대의 고승 청담(靑潭)이 이절에서 포명(明抱)을 만나 귀의한 바 있다..


명부전..


 

명부전 지하의 천불전..

 

대웅전 옆의 종각..

 

대웅전 좌측의 삼성각..


천왕문의 사천왕상..


 

호국사를 나와 성벽을 따라간다..


서장대에서 바라본 남강..

 

남강을 가로지르는 천수교와 음악분수..


경남도문화재자료 제6(1983720)로 지정된 서장대(西將臺)..

 

진주성에서 가장 높은 망루인 서장대는 절벽 위에 위치해 서쪽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좋은 지휘소로 남강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진주성 서문의 지휘장대로 사방을 전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확실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18(광해군 10)에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기록되어 있는데 규모는 작았으나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진 것을 1934년 독지가 서상필(徐相弼)이 재건하였다.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목조기와 팔작지붕이다..


원래의 서장대란 현판은 없어지고, 현재 걸린 현판은 1979년 은초 정명수(鄭明壽)가 쓴 작품이다..


서장대에서 내려선다..


천자총통 옆에서..


3.1독립운동기념비와 진주지구 전승비..


진주지구 전승비(晋州地區戰勝碑)는 한국전쟁 당시 진주지구 내 북한군을 격퇴시킨 전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1950729일 미 제25사단 기동부대가 진주지구에 쳐들어온 북한군 제6사단과 제9사단 병력을 격퇴시킨 전승을

기리기 위해 1958(단기4291) 710일 육군 제1206 건설공병단에서 건립하였다.

진주지구 전승비에 기록된 비문의 내용은..

남강은 논개의 옛 사적으로 더불어 빛나고, 진양은 이제 자유수호의 신()의 꽃다운 전적으로 새롭도다.

호남 일대를 유린(침해하여 짓밟음)한 괴뢰군 제6 9사단은 단기 4283729일 진주지구에 진출하여 왔으므로

(미국) 25사단의 기관으로 편성된 기동부대도 진주 서방(西方)에서 이를 맞아 연일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특히 서부능선(구릉진 산줄기)을 물리치고 전개된 피아(적군과 아군)의 쟁탈전은 열세 번을 거듭하도록 가열하였으며,

대구 침공에 실패한 적은 마산을 점령하여 서쪽으로부터 부산에 진출하려는 새 기도 밑에 831일 밤 전면적인 대공세를

취하여왔다. 초토(剿討: 적을 죽여 무찌름) 거듭하기 8일간을 계속하여 현 전선을 고수한 결과 총반격의 계기를 조성하고

국련(國聯: 국군과 유엔연합군)은 승리의 원인을 이루어왔다.

이 영웅적인 무훈을 높이 찬양하고자 이 돌을 세워 영원히 후세에 전하노라..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제인 ‘개천예술제’ 창제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개천예술탑’으로 1990년에 제막식을 가지고 건립됐다.

좌측의 ‘진제양주예연기념비(晉濟兩州藝緣紀念碑)’는 제15회 개천예술제 서제의 날에 세워졌다.


전망이 좋은 곳..


촉석루와 남강을 가로지흐는 진주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진주성 내에는 고목나무들도 많다..


수령은 100~400년으로 추측되는 600여 그루의 고목..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문루(門樓)는 경상남도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였던 관아 영남포정사의 정문이다.

광해군 10(1618) 병사를 지내던 남이흥(南以興)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내성의 동쪽문을 고쳐 세우고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망미루(望美樓)의 본래 건물이다.

후에 1895(고종 32)에 전국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로 시행되어 진주부가 되면서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하자 망미루가 경상남도관찰사의 정문이 되어 영남포정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진주부가 설치되면서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된 후, 1896년에 경상남도관찰사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방형의 초석 위에 원기둥으로 하층을 구성하고 그 위에 마루를 깔고 다시 상층을 구성하였으며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출입은 하층에 계단을 통해 하층에서 진입하지 않고 사다리를 이용해 측면에서 진입할 수 있도록 상층 측면의 난간 일부를

제거하였다.

망미루(望美樓)’라는 영남포정사 문루의 현판은 수원유수(水原留守)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지낸 서영보(徐榮輔)가 썼다.

조선시대 때 경상남도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의 정문으로 조선시대 관아건축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현재 영남포정사 문루 앞에는 수령이하개하마비(守令以下皆下馬碑)가 있다..







진주성 우물..


 

쌍충사적비(雙忠事跡碑)가 있는 쌍충각..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목숨을 바친 제말(諸沫 ?~1592제홍록(諸弘祿 1558~1597) 두 장군의 공을 기념하는 사적비이다.

두 제씨의 충절을 기린다는 의미로 제씨쌍충비(諸氏雙忠碑)라고도 한다.

왕명에 의해 1792(정조 16) 촉석루 옆에 쌍충각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출입구가 북쪽이며 비각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제말은 경남 고성 출신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웅천·김해·정암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워 성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대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제홍록은 제말의 조카로서 1581년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숙부인 제말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웠고, 이순신 장군의 막하(幕下)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진주성을 지원하기 위해 출전하던 중 전사했다. 정조 때 병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1792년 세워질 때는 촉석루 서쪽 옆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비각이 헐리고 비는 문산 도로 변에 방치되었다.

1961년 지금의 위치에 비각을 새로 지어 비를 옮겼다.

진주성 내에 있어서 외부는 잘 단장되어 있으나, 비석의 일부 글자가 훼손되어 있으며 귀부 역시 마모가 심한 편이다.

비두와 비신이 접해지는 부분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

 

비두는 용 2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며, 아랫부분에 4개의 국화무늬를 새겨 넣었다.

귀부(龜趺)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두 눈을 돌출시켜 강조했다.

비의 제목은 제씨쌍충사적비명(諸氏雙忠事蹟碑銘)’이다.

 

비문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크게 세운 성주목사 제말과 이순신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는 내용이.

今上十六年 下敎若曰 諸沫與郭再佑 同時討倭 竟以身殉 再佑旣蒙褒賞 而諸沫未之及 且固城之役星州之捷 豈讓李忠武露梁哉

可贈正卿賜諡 其侄宣功臣弘祿一體 訑贈立石於戰地 以旌其烈曰諸氏雙忠之址然 國人曉然悟曰 憶 信有是人也.

금상십육년 하교약왈 제말흥곽재우 동시토왜 경이신순 재우기몽폄상 이제말미지급 차고성지역성주지첩 기양이충무로양재

가증정경사호 기질선공신홍록일체 챠증입석어전지 이기기열왈제씨상충지지연 국인효연오왈 억 신유시인야:

지금의 임금이 정사를 맡은 지 16년에 교지를 내려, ‘제말과 곽재우는 같은 시기에 왜적을 쳐서 무찌르다가 끝내 순절하였는데,

곽재우는 이미 그 공로를 칭찬하고 기리어 상을 받았으나, 제말에게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고성 싸움이나 성주에서의 승리가 어찌 이충무공의 노량해전의 승리에 뒤질 수가 있겠는가! 높은 벼슬과 시호를 내릴 만하다.

그의 조카 선무공신 홍록도 죽은 뒤 그 공로에 따라 벼슬을 높여 주고 싸움터에 비석을 세워서 그 열렬함을 세상에 널리 알려,

제씨 두 사람의 충성의 터라고 하라고 하였다.

그 뒤 나라 사람들이 깨달아 말하기를, ‘! 진실로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라고 하였다.”

 

쌍충각 옆의 촉석루..

 

경남도기념물 제235(2001927)로 지정된 의암(義巖)..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인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바위이다.


1593(선조 26) 2차 진주성 싸움으로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이에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촉석루에서 벌어진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열 손가락 모두에 가락지를 낀 채

남강의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면적은 약 400에 이른다..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진주 지방의 양반들과 백성이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하였다.

1629(인조 7) 정대륭(鄭大隆)이 바위벽에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겼고,

의암의 강 쪽 절벽에는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이라고 새겨 충의를 기리고자 하였다.


의암에서 바라본 남강..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

의암에 있는 논개(論介)의 공적비로 경남도유형문화재 제353(2000131)이다.

의암에서 촉석루로 올라가는 길목 암반 위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임진왜란 후 진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광해군 12)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진주지역 사민들은 진주성이 함락된 날에 남강변에 제단을 마련하여 논개의 혼을 달래는 한편, 논개의 의로운 사적을

인정해 줄 것을 국가에 요구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논개의 사적을 잊지 않기 위하여 1722(경종 2) 진주의 선비 명암(明庵)정식(鄭軾 16831746)

어우야담의 기록을 바탕으로 지은 비문을 내용으로 담아 이 사적비를 세웠다.

이후 비석을 다듬어 놓은 해로부터 18년 뒤인 1740(영조 16) 가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왕의 명을 받고

이듬해인 1741(영조 17년) 봄에 비각을 세우고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비각은 정면 1, 측면 1칸의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양쪽에 풍판을 달았다..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금석자료로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상황과 논개의 순국사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석의 높이는 145이며, 너비는 60, 두께는 15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獨峭其巖 特立其女 女非斯巖 焉得死所 巖非斯女 焉得義聲 一江高巖 萬古芳貞

홀로 가파르게 우뚝 선 바위에 그녀가 서 있구나.

그녀가 이 바위 아니었다면 어찌 죽을 곳을 얻고, 이 바위 그녀가 아니었다면 어찌 의로움을 들었겠는가.

남강에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다운 정절이로다.

 

의암에서 바라본 촉석루 현판..


경남문화재자료 제7(1983720), 논개의 사당 의기사(義妓祠)..


의기사(義妓祠)1721(경종 1)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崔鎭漢)이 진주지역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柳夢寅)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1740(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다.

1779(정조 3)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고,

사위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게 의기사기를 지어 걸도록 하였다.

또한 1823(순조 23) 진주목사 홍백순(洪百淳)과 경상관찰사 이지연(李止淵)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춘추(春秋)로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지연(李止淵)의 글씨로 '의기사(義妓祠)'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1868(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이 의기사를 보수하고,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한 이래로

현재까지 여성들이 제관이 되어 논개의 의로움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이후 6·25전쟁으로 의기사는 완전 소실되었다가 1960년 사단법인 진주고적보존회가 재건하여 현재의 건물로 유지되고 있다. 1962년에 사당 보호를 위해 모의당(募義堂)을 세웠다.


정면 3, 측면 2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 맞배지붕이며, 안에는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의기사의 정면 좌측에는 을사5으로 악명 높은 친일파 이지용에게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꾸짖었던 의기 산홍(山紅)의 시가 걸려 있다.

또 정면 우측에는 다산 정약용의 의기사기와 시 1수가 판각되어 걸려 있다..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

 

경남도문화재자료 제8(1983720)촉석루(矗石樓)..

 

촉석루는 정면 5, 측면 4칸으로 고려 말 진주성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이다.

남강(南江)의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어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1241(고종 28)에 창건하여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으며, 1365(공민왕 14)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여 남장대(南將臺)라고 하였으며,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晉陽誌)』에 고려 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하였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725(영조 1) 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중수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

 

호국(護國)의 종(鐘)..

198012월에 선조들의 거룩한 호국의 얼을 계승, 선양하기 위하여 진주시민들의 뜻을 모아 제작하였다.

호국의 종 주조는 김철호(金哲怙)가 맡았으며, 처음에는 1972년에 준공된 촉석문(矗石門)에 걸었다.

그러나 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자 촉석광장에 호국의 종각을 건립하여 보관하고 있다.

호국의 종각은 재일동포 최복순(崔福順)의 희사금을 받아 19871212일에 준공된 종각이다.


종의 높이는 2.7m, 지름은 1.7m이며, 무게는 500kg이다. 종신에는 문양이 부조되어 있는데, 종두에는 호국을 상징하는

용을 주조하고, 상하대와 유곽에는 진주시의 상징인 석류꽃과 석류를 연속적으로 새기고, 유두에는 무궁화를 장식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상원사종과 성덕대왕신종을 본뜬 것으로 종신에는 논개 부인상과 촉석루, 그리고 대나무가 조각되어 있다.

중대에 새겨져 있는 1980년에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호국의 종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진주성 옛 성 안에 울려 퍼지는 호국종소리 / 대처럼 푸른 절개 석류꽃보다 붉은 충성 / 피나는 역사전통을 잊지 말라 울리네

가슴을 파고드는 은은한 호국종소리 / 내 고장 내나라 사랑 우리 소원 번영과 통일 / 겨레의 자랑과 영광 이룩하라 울리네

호국종 치는 소리 이 종소리 들리거든 / 몸을 바로하고 옷깃 여미시고 /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다시 다짐하시오..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혼들을 위무하기 위해 세운 단이다.

임진왜란 진주성 제1차 전투(159210)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을 비롯한 아군 3,000여 명이 왜군 2만여 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쳤다.

이듬해 15936월 진주성 제2차 전투 때에는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黃進) 등의 민··7만여 명이 진주성을 공격해 온 왜군 10만여 명을 맞아 10여 일 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순의(殉義)한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1987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건립하였다.

매년 음력 629일에 이 단에서 제향을 하고 있다.




촉석광장의 김시민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


경남도유형문화재 제2(1972212)로 지정된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들의 충정과 전공을 기리기 위해 1686(숙종 12)에 세워졌다.

비신의 높이는 1.43m이며 너비는 0.92m, 두께는 0.21m이다. 비신은 수성암(水成岩)을 사용하였다.

비문의 하단부는 마멸된 상태이다. 귀부(龜趺)는 비신과 같은 수성암으로 높이 35이며 한 돌로 조각되어 있다.

이수는 쌍용(雙龍)을 조각하고 있는데 높이는 92.5이며, 쌍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이다.

그 아래 부분에는 화문(花紋)을 조각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다른 비석과 다르게 이수부분이 커서 윗부분이 넓고 하부가 좁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으며, 아래쪽이 판독되지 않을 뿐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비문은 정헌대부 이민서(李敏徐)가 지었고 성균관사 신익상(申翼相)이 비문을 적었으며 홍문관제학 지연경사 김만중이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에 따르면 2만여 명의 왜군이 패배하였던 진주성의 치욕을 씻고자 왜적이 다음 해인 1593(선조 26년)에 제2차의

진주성 공략을 하게 된다. 왜군은 1216백여 명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세 겹으로 에워싸며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629일 성이 무너졌다고 전해주고 있다.

이와 함께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하여 기술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인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임진왜란 당시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또한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이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한 명은 황진(黃進 ?~1593)으로 황희(黃喜)5대손이다.

그는 1591년 통신사와 함께 일본을 다녀와서 그들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용인(龍仁)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패전하자 진안(鎭安)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으며 진주성에서 마지막까지 성을

고수하다 전사한 인물이다. 이 외에도 장윤(張潤) 등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을 기록하고 있다..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진주성 내에 단층 맞배지붕의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받침대 위에 비신을 세웠고, 전체 높이는 277, 너비는 99이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 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성여신의 문집인 부사집(浮査集)에는 진주목사김공전성각적비명(晋州牧使金公全城却敵碑銘)’으로 되어 있어서

 진주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라고도 불린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비의 뒤편에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을 건립해 놓았다.

김시민(1554~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619(광해군 11)에 진주 지역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세워졌다. 


비의 제목은 故牧使金侯時敏全城却敵碑銘(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적비명)”이며,

성균관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嗚呼 急病攘夷 忠所激也 死守不去 義所決也 出奇却敵 勇所奮也 能是三者 而轟轟烈烈 至今耀人耳目者 故牧使金侯是也

오호 급병양이 충소격야 사수불거 의소결야 출기각적 용소분야 능시삼자 이첩첩렬렬 지금휘인이목자 고목사김후시야:

! 위급한 병중에서도 오랑캐를 물리치신 것은 충성심이 솟구쳤던 때문이요, 죽음으로써 지키며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의로움에 의해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리친 것은 용맹을 드날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능히

하시니 소리 드높고 성대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귀와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이는 돌아가신 목사 김후이시다.”

 

진주성 여행을 마치고 마산에 있는 영남캠핑카놔 스타모빌, 드림캠핑카를 둘러보고 통영항 인근에 숙소를 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