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기행] 제주 원주민 고(高)·양(良)·부(夫)씨의 발상지, 삼성혈(三姓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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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기행] 제주 원주민 고(高)·양(良)·부(夫)씨의 발상지, 삼성혈(三姓穴)

by 정산 돌구름 2017. 12. 12.

제주 원주민 고(高)·양(良)·부(夫)씨의 발상지, 삼성혈(三姓穴)..

 

2017년 12월 8일, 제주여행 1일차 마지막 코스는 제주KAL호텔 바로 앞에 있는 상성혈이다.

숙소가 바로 옆 하니크라운호텔(Hotel Honey Crown)이라 숙소에 짐을 풀고 삼성혈을 둘러본다.

 

삼성혈(三姓穴)은 제주도 원주민의 발상지로 고((, 뒤에는 ()씨의 시조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의 세 신인(神人)이 솟아났다는 구멍이다.

세 신인은 수렵생활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다가 오곡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碧浪國, 또는

日本國)의 세 공주를 각각 맞이하여 혼인하고 농경생활을 시작하여 삶의 터전을 개척한 인물들이다.

삼성혈은 지상에 패인 세 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구멍은 품자(品字)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둘레가 6자이고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하며, 나머지 두 구멍은 둘레가 각기 3자인데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흔적만 남아 있다.

위쪽 구멍은 고을나, 왼쪽은 양을나, 오른쪽은 부을나가 솟아난 곳이라 전한다.

19646월에 사적 제134호로 지정된 삼성혈은 그 주위가 성역화 되어있다.

그것은 1526(중종 21) 이수동 목사가 그 주위에 돌 울타리를 쌓고 혈() 북쪽에 홍문(紅門)과 혈비(穴碑)를 세워 삼성의

후예로 하여금 춘추제를 모시게 하고, 매년 11월 상정일(上丁日)에 도민으로 하여금 혈제(穴祭)를 모시게 한 데서 비롯하였다.

그 뒤 1698(숙종 24) 유한명(柳漢明) 절제사가 혈() 동쪽에 삼을나묘(三乙那廟, 지금의 三聖殿)를 세우게 한다.

1772(영조 48) 양세현(梁世絢) 방어사가 바깥 담장을 쌓아 소나무를 많이 심게 하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향청(鄕廳)

으로 하여금 혈제를 지내게 하였다.

1827(순조 27) 이행교(李行敎) 방어사가 전사청(奠祀廳)을 창건하고, 1849(헌종 15) 장인식(張寅植) 방어사가

숭보당(崇報堂)을 세워 오늘의 규모가 갖추어졌다.

현재 제례는 향교의 석전(釋奠)과 같이 제복을 갖추어 매년 봄(410) 춘기대체(春期大祭)와 가을(1010)에 추기대제

(秋期大祭)를 삼성전에 후손들이 모여 춘추대제(春秋大祭)를 봉향하고 있는데, 삼헌관은 고··3성씨가 윤번제로 한다.

매년 1210일에는 삼을나의 탐라개벽을 기려 봉향하는 건시대제(乾始大祭)가 제주도민제로 열린다.

초헌관은 도지사, 아헌관과 종헌관은 기관장이나 유지 중에서 선임한다.

춘추대제(春秋大祭)는 삼을나 위패를 모신 삼성전에서 지내고, 건시대제(乾始大祭)는 삼성혈단에서 지내므로 혈제라고도 한다.

1997년에는 1735(영조 11)에 제주목사 김정이 세운 삼사석비(三射石碑)를 발굴하였고, 이듬해에 표석을 건립하여

지방문화재 제4호로 등록되었다.

입구에는 홍살문(높이 300, 기둥 직경 30)이 세워져 있고, 높이 220의 돌하르방이 함께 놓여 있다.

그 옆에 탐라국발상지(耽羅國發祥地)’라고 새겨진 자연석과 사적지 표지(길이 77, 28, 두께 13)가 세워져 있어

도심의 다른 지역과 구분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자란 수목들이 수림을 이루고 있다.

이 홍살문은 조선 중종 21년 목사 이수동에 의한 것으로, 당시 중종이 홍문과 표단을 내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건시문(乾始門)을 지나 왼쪽에 붉은 흙인 송이를 바닥에 깔고 자리하고 있는 숭보당을 중심으로 동남쪽에 전사청, 숭보당과

전사청 뒷부분에 수직사, 수직사 뒤쪽에 종무청, 전사청 뒤쪽에 제기고가 각각 자리를 잡고 있다.

전사청(奠祀廳)은 제향(祭享)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집으로서 1827(순조 27)에 세워진 뒤 몇 차례 이건(移建) 중수

(重修)하였으며, 20009월에 중건(重建)하였다.

숭보당(崇報堂)1849(헌종 15)에 뛰어난 선비를 두어 면학하던 재사(齋舍)로서 몇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재생들이 학업을 연마하던 숭보당(崇報堂)197412월에 현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전면 7칸과 측면 4칸인 5량집으로 앞너비 15.95m, 옆너비 6.62m, 지붕은 팔작형이다.

높이 0.82m의 부초석 위에 높이 0.75m, 지름 0.28m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또 주두(柱頭) 위에 창방과 도리를 사래 맞춤하였으며, 끝막새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수직사(守直舍)는 삼성혈을 지킴이가 사는 집이었으며, 종무청은 삼성혈 제반 업무를 맡아보는 재단사무실로 이용되는 곳이다.

제기고는 제의에 사용되는 제기와 용품을 보관하는 곳이다.

제의처에는 입구에 삼성문이 세워져 있고 안쪽에 삼성전이 있으며, 후면 북동쪽에 북문, 남쪽에 전향문이 있다.

전향문 서쪽에 혈단문이 있고, 그 안쪽에 삼성혈, 혈단, 혈비가 자리하고 있다.

삼성전은 삼성사(三姓祠)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분향(焚香)하는 곳이다.

삼성전의 입구인 삼성문에는 향로와 향이 준비되어 있고,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삼성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 탐라(耽羅)를 창시한 삼을나(三乙那)의 위패가 봉안된 묘사(廟祠)이다.

신라에 입조(入朝)한 성주(星主), 왕자(王子), 도내(徒內) 삼고씨(三高氏)가 오늘쪽에 배향되고 있다.

1698(숙종 24)에 유한명(柳漢明) 목사가 혈()의 동쪽에 삼을나묘(三乙那廟, 지금의 三姓殿)를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 후 1703(숙종 29)에 이형상 목사가 가락천 동쪽으로 삼성전을 옮겼다.

1785년에는 정조가 삼성사(三姓祠)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왕에 대한 예우로서 국제(國祭)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 한다.

그러나 고종 8년에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우(祠宇)가 한때 헐렸다가 고종 27년에 다시 세웠고, 1910년에 중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에 낡은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고 웅건한 모습으로 또다시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전면 6, 측면 4칸의 7량 집으로 앞 너비 12.05, 옆 너비 5.5이고 지붕은 팔작형이다.

또 높이 0.15인 원형 주춧돌 위에 높이 1.55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을 사래 맞춤하였다.

양식은 주심포이며, 막새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그 후 수차례 중수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서원(書院)인 삼성사는 1740(영조 16)에 안경운(安慶運)목사가 재생(齋生)을 두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사액(賜額)이 내려진 것은 1785(정조 9) 2월이었다.

제주 유학(幼學) 양경천(梁擎天)의 상언에 따라 예관(禮官) 고택겸(高宅謙)이 와서 삼성사란 왕의 어필액자와 절목을 내렸다.

삼성사에는 장의(掌議) 한 명과 유사(有司) 두 명, 정원 내의 30, 정원 외 70명의 학생을 두었다.

전시관은 200112월에 개관하였으며, 전시실과 영상실을 두고 있는 한식 기와집이다.

전시실에서는 삼성혈과 관련된 현판, 고문헌, 제기 등 실증적인 자료들을 전시함으로써 고대탐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삼성혈의 신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상영하는 등 신비스러운 제주(탐라)의 역사와 이 고장 선조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탐라 개국신화를 영상화하여 관광객들에게 탐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 주고 있는 곳이다.

 

삼성혈에 얽혀 전해 내려오는 삼성신화(三姓神話)는 다음과 같다.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주산(主山)인 한라산이 그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毛興)’

이라는 곳에 삼신인(三神人)을 동시에 탄강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의 일이다.

삼신인(三神人)이 용출(湧出)하였다 하여 이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하며, 3개의 지혈(地穴)이 있다.

이 신인(神人)들을 이름하여 을나(乙那)라 하며 세 성씨의 시조이며 탐라국을 개국하였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으며, 자줏빛 옷에 관대를 한 사자(使者)가 있었다.

사자가 옥함을 연즉 청의(靑衣)를 입고 자색(姿色)이 출중하고, 품질(稟質, 품성)이 단아(端雅)한 공주(公主) 세 사람이 좌석을

정제(整齊, 정돈하여 가지런함)하여 함께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어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하였다.

사자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량국(碧浪國, 동해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라)의 사자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 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자소각(紫宵閣, 하늘에

있다고 하는 자줏빛 누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삼신인(三神人)이 강림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므로 이에 신()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

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항려(伉儷, 남편과 아내)의 예식을 갖추어 큰 국업(國業, 나라를 일으킴)을 성취 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동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에 삼신인은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공주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였다.

자줏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연혼포(延婚浦)라 하며, 지금도 세 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혼인지(婚姻池)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신방굴(神房窟)이라 하고

그 안에 각기 세 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 활 쏜 지역을 사시장올악(射矢長兀岳)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삼사석(三射石)이라 한다.

그 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爵號)를 받았다.

또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며 해상교역 활동도 하면서 수천 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