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시간이 머무는 마을, 광주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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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이 머무는 마을, 광주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by 정산 돌구름 2017. 11. 12.

100년의 시간이 머무는 마을, 광주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20171111일 토요일 오후, 맑은 날씨에 파란 하늘이 드러나 양림동을 찾았다.

100년 전 서양 선교사들의 흔적을 따라 양림동 시간여행은 양림교회에서 출발한다.

휴식이 있는 시인의 길, 잘 보존된 전통가옥을 둘러보는 정취와 더불어 시인 김현승의 흔적을 만나는 시간이 반가운 길이다.

 

 


광주양림교회는 광주 최초의 교회로 1904년 미국 선교사 배유지가 자신의 사택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그 시작이다.

현재의 건물은 1954년에 지어진 것으로 양림동 여행에서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1904년 창립된 양림교회는 1906년 북문 안으로 이전하여 1912년 북문안교회, 1919년 금정교회로 개칭하였다.

1924년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에서 양림교회가 분립되었다..

 

양림교회는 장로교단 분열에 따라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 196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98년 목포에서 선교를 시작한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는 광주 선교를 위해

190412월 선교사 벨(배유지 Eugene Bell 1868~1925)과 오웬(C. C. Owen)을 광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김윤수(金允洙변창연(邊昌淵) 등과 함께 양림리(楊林里)에 사택을 마련하고 1225일 주일에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양림교회의 시작이다.

이 교회는 공간이 비좁고 교통이 좋지 않아 19066월 북문안 사창골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전했으며,

1912년 김윤수·최흥종(崔興琮)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고, 북문안교회(北門內敎會)로 개칭하였다.

 

양림교회 바로 앞에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오웬기념각이 있다.

1914전남 최초의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순교한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당시의 유교적 관습에 따라 남녀가 들어가는 문이 달랐기에 출입문이 2개이고,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되어 있다.

개화기에 다양한 문화행사가 이곳에서 열리며 근대문화의 전당으로 사용되었다.

2012530일부터 KBS 2TV에서 방송된 TV 드라마 <각시탈>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광주의 기독교와 근대문화를 이끈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은 목사이며 의사였다.

1900년대에 광주에 들어온 양림동의 서양촌 외국인 중 한 명으로서 간호사인 부인과 함께 선교 및 의료봉사 활동에

헌신하다가 1909년에 과로로 사망했다.

2층의 회색 벽돌 건물로 1층 바닥과 2층 발코니가 설교단을 향해 경사져 있어 객석에서 설교단을 내려다보는 구조가 특이하다.

정면과 측면 입구의 장식은 이슬람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나며, 현관은 2층까지 뚫려 있다.

개화기 광주 지역의 서양 선교사 활동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 건물은 광주 신문화운동의 요람지가 되기도 했다.

한때 교회로도 사용되었으며, 최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관련 집회는 물론 강연회, 음악회, 영화, 연극, 무용 등 지역의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이곳에서 열리면서 지역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미국 친지들이 보낸 기금 4,200 달러로 1914년에 세워진 연면적 434평방미터(부속건물 포함)인 양옥건물이다.

이 건물은 평면 형태로 보아 예배당 및 집회실로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양림교회 맞은 편에 있는 어비슨 기념관(Avison Memorial Center)..

광주YMCA와 광주양림교회가 고든 어비슨(Gordon W. Avison 1891~1967) 부부의 희생적 발자취를 기려

광주 남구 양림교회 맞은편에 어비슨기념관을 짓고 동상을 세워, 2010411일 준공식과 제막식을 가졌다.

 

기념관 1층에는 '어비슨기념홀', 2층에는 '어비슨카페'가 들어섰다.

기념홀에는 양림동 문화지도와 어비슨의 행적을 담은 사진 자료들이 전시됐다..

 

고든 어비슨은 올리버 어비슨의 큰아들로 189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농민강습소를 개설 양학을 열고 문맹퇴치에 기여 하였고, 청소년 사회체육 운동도 지원하였다.

YMCA가 전개한 농촌사업 가운데 호남지역을 맡아 헌신하였고, YMCA국제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농촌계몽 운동 전개하였다.

현재 광주 수피아여자중학교 건너편에 있던 자택을 중심으로 1933년 어비슨은 광주YMCA의 최흥종, 최영균 등과 협력해

광주YMCA농업실습학교(어비슨농업학교)를 세웠다. 그는 호남 농촌각지에서 인재들을 선발, 기숙사를 제공하며 농사 교육과

성경 교육을 비롯한 실습 교육을 함으로써 유능한 농촌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또 일제의 수탈에 대응하기 위해 신협운동을 벌여 농산물 직거래 운동과 시민운동을 지원했다.

특히 캔 제품 개발로 어린이 사망률을 낮추고 축구, 유도, 권투 등 다양한 사회체육 활동을 통해 청소년들의 체력을 높였다.

어비슨의 외아들은 한국인 2세와 혼인한 후 보병으로 한국전에 참여했으며, 그 부인도 전쟁 중 초창기 한국군 간호부대

고문으로 간호 인력을 양성하고 굶어 죽어가는 전쟁고아들과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하기도 했다..

 

부친 올리버 어비슨(1860~1956)은 영국에서 출생하였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파송받아 고종황제의 어의(御醫)를 지냈고, 한국 근대의료와 의학교육의 기틀을 놓았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에게 한국에 와서 일해 달라는 제의를 받아드려 1893년 제중원 4대 원장으로 한국에 와서

당시 콜레라와 전염병이 유행하던 조선에 와서 전염퇴치에 앞장 섰으며, 고종의 주치의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안식년에 뉴욕의 선교대회에 초청되어 연설을 했는데 그의 연설을 들은 철강백만장자인 세브란스가 한국에 새로 지을

병원을 위해 기금 10.000달러를 기부했다.

그리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 종합병원을 1902년 착공하여 1904년 완공하였으며, 이름을 세브란스연합병원이라 하였다.

이처럼 한국인 의사들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올리버 에비슨은 1934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브란스의학교

교장 자리를 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인 의사인 오긍선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웬기념관에서 바라본 양림교회..



길을 따라 오르면 2015915일 개관한 소심당(素心堂) 조아라기념관이 나타난다.

기념관은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선생의 기독교운동, 여성운동 및 민주화운동과 여성 복지향상을 통한 사랑, 정의, 평화,

봉사정신을 계승 선양하기 위해 생전에 조아라 여사께서 기거하셨던 계명학사를 리모델링해서 준공했다..

 

1912년 나주시 반남면에서 태어나 1927년 광주 수피아여고에 재학 중이던 조아라여사는

이 학교 교사로 광주YWCA를 창립한 김필례여사를 만나 YWCA와 인연을 맺고 항일운동 및 여성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광주독립학생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고 졸업 후에도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감옥살이를 되풀이하였다.

광복 후에는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던 광주YWCA 재건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뒤 총무에 이어 회장까지 활동하며

35년 동안 여성운동에 앞장섰다.

더불어 5.18 민주화운동 당시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가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에도 구속자와 부상자들을 적극적으로

돌보며 시민들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대모’, ‘광주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여사는 1952년 전쟁고아 등 불우아동 복지사업에도 앞장서며 성빈여사(聖貧女舍)를 세우고,

또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불우소녀 가장들을 위한 야간 중학교인 호남여숙(湖南女塾)을 열었다.

1962년에는 청소년 야학인 별빛학원과 윤락여성들의 직업 훈련을 위해 계명여사를 열어 이후 35년간 빈민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도우는 등 소외계층 여성들의 힘이 되었다.

또한 각종 상금, 축의금, 사비를 털어 광주YWCA 회관 건립 기금 등으로 내놓고 자신은 근검, 절약한 생활을 실천했다.

1992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린 남북여성토론회에 한국 여성계 대표로 참석했다.

이러한 공로로 광주시민대상, 정일형자유민주상, 무등여성대상, YWCA전국대회 대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여받았다.

200378일 향년 92세로 별세하였다..

 

골목길의 풍경도 정겹다..


잠시 골목길로 내려서 이장우 가옥을 들러본다.

평상시에는 대문을 닫아놓고 있어 좌측의 샛문을 이용해 들어가면 된다..

 

일본식 정원과 사랑채, 멋스런 안채가 아름다운 이장우가옥(李章雨家屋)..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1989320)로 광주의 옛 부자동네인 양림동에 있는 커다란 집이다..


동서로 길게 늘어선 축에서 약간씩 빗겨나며 대문간, 곡간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가 배치된 상류주택 양식의 기와집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과 사랑채, 멋스런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채 상량문 광무 3년 을해 2(光武三年乙亥二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1899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건립 당시의 소유자는 정병호(그의 부친은 정낙규)인데 1965년 현 소유자 이장우가 사들였다고 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안채의 평면 형태는 정면 6, 측면 4칸 규모에 전후좌우퇴가 있다.

자형으로 되어 우측면은 4칸과 후퇴, 좌측면은 1칸과 전후퇴로 되어 약 36평 규모의 큰집이다.

좌로부터 툇마루, 1칸 작은방, 2칸 대청, 2칸 큰방, 11퇴의 부엌, 그리고 자형으로 꺾인 2칸의 작은방으로 구성되었다.

세벌대의 다듬돌 기단 위에 원형주초를 놓고 두리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웠다.

보아지와 우미량 퇴보에 도리를 결구하였고, 가구는 2고주 5량의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서까래와 부연이 굵은 목재로 튼튼하게 결구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합각의 중앙부에는 채광창이 있다.

대청의 문은 4분합 들어열개문으로 되어 있다. 여닫이문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중방에 문잡이 거북 장식물을 두었으며,

들어열개 4분합문을 고정하기 위하여서는 참새모양의 장식물을 장혀에 두고 있다.

최근에 욕실을 개조하였으며 전면에 유리창을 설치하였으나 전반적으로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전통가옥이다.

이장우가옥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공간과 광주 최고 부자들이 살았던 공간을 분리하는 기준이 되는 집이었다.

1899년에 지어진 전통가옥으로 일자형이 주를 이루는 남부 지방의 가옥과 달리 한양의 가옥처럼 ''자 구조다.

나름 부를 과시하고 멋을 부린 것이다..















 

이장우가옥을 나서면 멋스러운 골목길이 이어진다..

 

새롭게 단장한 풍경이 아름답다..

 

옛모습을 지닌 집들이 곳곳에 있다..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2호인 최승효고택..


최승효 고택은 1920년 최상현이 지어 일본 요정으로 운영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 한편으로는 본채에 비밀 다락을 두어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 사용했던 공간이다.

현재는 설치미술가 최인준이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 꾸미고 있다고 하지만 출입문이 굳게 닫혀 출입이 통제된다..


한희원 미술관을 지난다..


양림동에서 낳고 자라 살아오고 있는 서양화가 한희원씨가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2015728일 개관하였다.

이장우가옥과 최승효고택 사이에 지난 1967년 지어진 한옥을 ‘한희원 미술관’을 리모델링했다.

부지 47, 건평 25평 규모로 양림동에 산재한 역사문화공간들과 함께 또 다른 문화명소이다.

 

한희원 작가는 2003년 문학관미술전을 통해 양림동의 유서깊은 문화예술을 널리 알린 주인공으로,

김현승 시인에서부터 TV드라마 극작가인 조소혜씨 등에 이르기까지 양림동 출신 예술인들과 양림동에서 집필된 작품들을

알리는 등 양림동의 문화전도사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희원은 조선대 미술과를 나와 개인전 33, 국립현대미술관 민중미술 15년전 등 다수 단체전에 참여했고, 영화 ‘친정엄마’

테마그림 제작, 대동미술상과 전남연극제 무대미술상, 원전미술상 수상, 광주 남구 양림축제 조직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숱한 역사 문화유산이 오롯이 자리함은 물론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과 풍경이 많은 이들에게 추억과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담쟁이 덩쿨과 가을..


호남신학대학교로 길을 잡으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했던 서양 선교사들의 사택을 만난다.

호남신학대학교가 자리한 야트막한 언덕은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나 어린 주검들을 풍장(風裝)했던 곳이라고 한다.

선교사들은 이곳에 사택을 짓고 병자들, 특히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 언덕은 ‘광주의 예루살렘’, ‘선교사 마을’로 불리며 치유의 공간, 교육의 공간으로 발전하였다...

 

근대문화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하다..


선교사 사택 구역으로 들어선다..


양림역사문화마을 안내도..


정겨운 풍경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우일선 선교사 사택..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광주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이다.

미국선교사 우일선에 의해 1920년대에 건립되어 졌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을 뿐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장애아와 고아들을 돌보며 한센병 치유에 앞장섰던 우일선(R. M. Willson)1905년에 건축하고 1921년에 증축했다고 한다.

사택 앞마당에는 선교사들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고국에서 가져다 심은 은단풍나무, 아름드리 피칸나무, 흑호두나무 등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건축 시기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선교사 사택으로 쓰였던 다른 건축물들도 함께 볼 수 있다.

양림산 기슭에 동향으로 세워진 고색창연한 2층 벽돌 건물이다..


평면은 정방형으로 1층은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부엌, 욕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사생활공간으로서 침실이 배치되었다 한국의 전통건축과는 달리 현관이 남향에 위치하지 않고 동향으로 된 것이 특이하다.

벽은 두께 약 55의 회색벽돌로서 네덜란드식 쌓기를 하였으며,

내부는 회반죽 마감으로 하고 벽 아래 고막이 부분 처리는 화강석으로 쌓았다.

개구부는 모두 반원아치를 만들었고 창대부분은 벽돌 마구리 세워쌓기를 하였다.

창문은 외부는 여닫이창, 내부는 오르내리창의 이중창으로 구성하였고,

1층과 2층을 구별하기 위하여 벽돌로 돌림띠를 두어 외벽에 변화를 주었다.

정면 현관 기둥은 벽돌 두장두께로 쌓아 가다가 2층 바닥 부분에서 4켜내쌓기로 기둥머리부분을 형성해서 단조로움을 없앴다.



사택에는 400여 년 수령의 호랑가시나무가 아카시아나무, 왕버즘나무, 팽나무 등 100년을 훌쩍 넘긴 노거수와 함께

아름드리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1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은단풍..


단풍도 붉게 물들어간다..


선교사 묘원으로 오르는 길..


우일선 선교사 사택 뒤편 산책로를 따라가면 선교사 묘원에 이른다..


고난의 길의 65디딤돌의 의미를 새겨본다.. 


선교사 묘원..


배유지와 우일선을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잠든 곳이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고요한 무덤들..






호남신학대학 너머로 광주 사직공원이 바라보인다..



호남신학대학교는 1955년 미국남장로교선교회에서 호남지역 농어촌교회에 희생적으로 봉사할 교역자 육성을 위하여

광주시 백운동에 호남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1961년 당시 교회의 급격한 부흥발전에 비하여 절대 부족한 목회자 양성 때문에 호남신학원으로 개편하고,

브라운(Brown,G.T.)이 초대원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에는 호남신학교로 개칭하였고, 1971년 학교법인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대학에 준하는 4년제 각종학교인 장로회호남신학교 설립 허가를 받아 신학과 40명을 모집하였다.

1976년에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다..

 


다시 선교사 사택으로 내려선다..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는 언덕을 오르고 수피아여학교를 내려다보며 시를 쓰던 시인, ‘가을의 기도’를 쓴 김현승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후 양림교회 목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내려와 생활한 그는 선교사 사택이 있는 현 호남신학대학의

언덕길을 자주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고 한다..


김현승 시비 옆의 쉼터, 휴식이 있는 시인의 길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하는 <가을의 기도>를 새긴 시비가 있다..

 

언덕에 들어선 현대식 건물, 저렴한 가격으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쉬어갈 수 있는 카페가 자리했다..

 

카페 앞 야외 공간에 서면 양림동 일대와 무등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다시 길을 따라 내려서면 오래된 돌담에 우체통 하나..


아름다운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