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기행]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사당, 영광 내산서원(內山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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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기행]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사당, 영광 내산서원(內山書院)

by 정산 돌구름 2017. 1. 8.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사당, 영광 내산서원(內山書院)..

 

 

2017년 1월 7일 토요일, 태청산 산행을 마치고 영광 불갑사 인근의 내산서원을 찾았다.

 

내산서원(內山書院)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 있는 서원으로 전라남도기념물 제28(19771020)로 지정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으로 수은(睡隱) 강항(姜沆) 사후 18년째 되는 해인 1635년(인조 13년)에 강항의

도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관찰사와 향리의 협의 하에 사우(祠宇) 건립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최초의 건립지는 강항의 태생지이자 선영이 있던 불갑면 금계리 서봉(酉峯)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우 명칭이나 규모 등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더 이상 상세히 확인할 수 없다.

강항 유적을 충심으로 보살폈던 윤순거를 추가로 배향(配享)하였고, 훼철(毁撤) 후 복원시에 내산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는 강항의 수제자였으며, 향토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특히 용계사 창건이나 강항의 저서인

<수은집(睡隱集)> 편찬 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1684(숙종 10)에 강항과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했던 팔송(八松) 윤황(尹煌 윤선거 부)을 추배(追配)하였다.

창건 이듬해인 1636년에는 화재로 인하여 사우의 이건이 추진되었다.

이때에는 김지수, 임담, 김방급 등의 주도하에 많은 사림들이 참여하여 불갑면 순룡리 용산마을에 사우를 복설·이건하였다.

이때 사우 명칭도 마을 이름을 따 용계사라 하였는데, 액판의 휘호(揮毫)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고 전한다.

이 편액은 훼철 후 후손들에 의해 가전(家傳)되다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1702(숙종 28)에 대대적인 중수를 했던 용계사는 1868(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어 그 터만

유지해 오다가, 1974년 후손과 유림들의 발의로 현 소재지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이라 개칭하였다.

임진왜란 400주년 재조명사업의 일환으로 1992년부터 연차적으로 유적지 정비사업을 하였다.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외삼문과 용계사(사당)를 중심축으로 외삼문(忠義門), 강당(內山書院),

내삼문(日星門), 사당(龍溪祠)순으로 배치하여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랐고, 서원 좌측으로 경장각(敬藏閣)이 있다.

사당은 정면 3, 측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아담하고 소박하며, 서원은 정면 4,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이다.

원내에 경장각(敬藏閣), 함평이씨열녀각(咸平李氏烈女閣), 장절비(奬節碑), 용계사사적(龍溪祠事蹟)이 있다.

내산서원 경장각(敬藏閣)에<강감회요(綱鑑會要)> 목판과 <수은집>, <운제록>, <문선>, <간양록(看羊錄)>의 필사본

<수은선생 유묵>이 보관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간양록>은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잡혀 있는 처지에서도 선비의 정신으로

일본의 지리와 내정을 기록한 것으로,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인 1656년에 제자 윤순거 등이 펴냈다.

서원 뒤쪽으로 돌아 산을 올라가면 강항과 두 아내의 무덤이 있으며, 주변 산기슭에는 강씨 문중의 무덤이 여러 기 있다.

첫 아내가 죽은 후 맞아들인 두번째 아내 함평 이씨는 강항이 세상을 떠나자 음식을 먹지 않고 자진하여 뒤를 따랐는데,

내산서원 입구의 정려문은 그 부인에게 내려진 것이다.

강항(姜沆 15671618)의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영광 출신이며, 좌찬성 강희맹(姜希孟)5대손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이다.

할아버지는 오복(五福), 아버지는 극검(克儉),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郞) 김효손(金孝孫)의 딸이다.

1593년(선조 26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선조 28년) 교서관박사가 되고, 1596년 공조좌랑과 이어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1597년 낙향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分戶曹參判)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격문을 돌려 수백 의병을 모았다.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들과 해로로 탈출하고자 했으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출석사(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

(賊中見聞錄)>에 수록,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惺窩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알아 조선의 과거 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경연조저(經筵朝著

공자묘(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제례·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일본억류 중 두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그들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1602년(선조 35년) 대구교수(大邱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곧 사직했으며, 1608년(광해 1년) 순천교수

(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함으로써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몸소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소학(小學)>·<근사록

(近思錄)>·<근사속록(近思續錄)>·<근사별록((近思別錄)>·<통서(通書)>·<정몽(正蒙)>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

(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들은 모두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문장달덕록(文章達德錄)>과 동양문고 소장본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1882(고종 19)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吏曹判書兩館大提學)이 추증되었다.

영광의 용계사(龍溪祠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고,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성주 아카마쓰(赤松廣通)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

<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