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주,낙양,서안여행 5일, 제3일(2) - 낙양 향산사와 백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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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중국

중국 정주,낙양,서안여행 5일, 제3일(2) - 낙양 향산사와 백거이

by 정산 돌구름 2012. 5. 10.
중국 정주,낙양,서안여행 5일, 제3일(2) - 낙양 향산사와 백거이 묘..

  

3일차(5. 2, 수)

  06:00 기상후 인근 산책 / 07:00 호텔 조식 / 07:40 호텔 출발 낙양으로 이동

  10:15 용문석굴, 향산사, 백거이묘 관광 / 12:20 점심식사

  14:05~15:40 고속철로 서안 이동

  17:00~19:10 고씨장원, 회족거리, 종고루 광장 관광 / 17:40~18:40 저녁식사(덕발장 만두)

  19:20~20:50 전신맛사지 / 21:00 호텔 투숙

여행개요

1) 선무호텔

  아침 6시 기상하여 호텔인근 산책 / 바로 옆 무술학교가 있다.

  호텔 1층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Check-out하여 호텔을 나선다.

2) 낙양 용문석굴, 향산사, 백거이묘 관광

  10:15 용문석굴 주차장에서 전동차로 타고 용문석굴로 이동한다. 거대한 석굴의 불상들을 관람한다.

  건너편의 향산사 아래에서 혼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 향산사를 관람한다.

  다시 백거이묘를 보고 내려와 입구 시설지구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3) 낙양에서 서안으로 이동

  점심식사 후 13:15 고속전철 역사에 도착 고속전철을 기다려 14:05 열차를 타고 이동한다.

  서안역에 도착하니 새로운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4) 고씨장원, 회족거리, 종고루광장 관광

  버스로 이동하여 고씨장원에서 우산을 쓰고 장원내부를 관람한다.

  회족거리를 둘러보고 덕발장이라는 거대한 만두가게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상당히 유명한 만두가게인 것 같다. 회족거리에는 대추와 곶감 등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종고루를 둘러보고 이동하여 전신맛사지를 받고 호텔로 향한다.

5) 군안왕조호텔(軍安王朝大酒店) 투숙

  21:00분, 군안왕조호텔에 들어와 방을 배정받아 저녁에 가족들과 함께 술한잔 하고 잠자리에 든다.

  이 호텔에서 2일간 묵을 예정이다...

여행코스 : 호텔~낙양으로 이동~용문석굴~향산사~백거이묘

 

향산사(香山寺)..

 하남성 낙양에 위치한 향산사는 이허(伊河)를 사이에 두고 용문석굴 건너편 향산 동쪽 해발 128m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북위(北魏) 희평(熙平) 원년(516년)에 건립된 고찰 향산사는 687년 인도에서 온 고승 지바하라(地婆訶羅)를 모시기 위해

 세운 불교사원이다.

 중국 선종 제2조 혜가(慧可)선사도 30세에 이곳에서 보정(寶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혜가는 40세에 달마대사의

 심법을 전수받았다.  천수(天授) 원년(690년),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주왕조를 세운 뒤 무삼사(武三思)의 주청에 의해

 향산사의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690년 측천무후가 장안에서 신도(神都)라는 이름으로 낙양으로 천도하여 황제에 올라 무주왕조(武周王朝)를 세웠으며,

 양왕무삼사의 뜻으로 향산사로 개명하고 재건축하였다고 한다.

 향산사는 향산부시탈금포(香山賦詩奪錦袍, 향산에서 시를 지어 비단옷을 빼앗다)’의 일화가 <당시기사(唐詩紀事)>에 전한.

 측천무후가 용문에서 노닐다가 신하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여 가장 먼저 짓는 자에게 비단옷을 하사하겠다고 했다.

 동방규가 가장 먼저 시를 완성해 비단옷을 하사받았는데, 바로 이어서 송지문(宋之問)의 시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송지문의 시가 동방규의 시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결국 동방규에게 하사했던 비단옷을 다시 빼앗아서 송지문에게

 하사했다고 한다향산사의 석루(石樓)가 바로 향산부시탈금포일화의 현장이라고 한다.

 특히, 청유아치(淸幽雅致)의 품격을 지닌 이곳 향산사를 좋아해 석루에서 용문시회(龍門詩會)를 열곤 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 향산사는 오래도록 방치되었는데, 이를 다시 보수하고 활기를 불어넣은 이가 바로 백거이다.

 그는 향산거사를 자처하며 이곳을 자신의 최종적인 귀속처로 여겼다.

 74살이 되던 해에 백거이는 호고·길교·정거·유진·노정·장혼과 함께 상치칠노인회(尙齒七老人會)’를 결성했다.

 이어서 백세의 이원상과 95세의 여만(如滿) 스님이 가입해 향산구로(香山九老)가 된다.

 향산사 구로당(九老堂)에는 의기투합하여 노년의 은거생활을 함께했던 향산구로의 화상이 걸려 있다.

 백거이 이후 향산사는 오래도록 다시 방치되었다가 청(淸) 강희 연간에 비로소 보수되었다.

 이후 건륭제가 향산사에 들렀다가 용문 10() 가운데 제일은 향산이라고 향산사를 칭송했는데,

 향산사 건륭어비정(乾隆御碑亭)’에 있는 석비에 그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청나라 말에 향산사는 다시 황폐해지1936, 향산사 남쪽에 이층짜리 건물이 세워진다.

  ‘쑹 별장(蔣宋別墅)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장제스(蔣介石)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36일 동안 지낸 곳이다.

 19361031일은 장제스의 50세 생일이었다.

 생일에 사람들의 축하를 피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있는 것을 피수(避壽)’라고 하는데, 장제스는 피수를 구실로 1029일에

 뤄양으로 왔다.

 ·쑹 별장에서 열린 생일 파티에는 장쉐량(張學良옌시산(閻錫山푸쭤이(傅作義) 등이 초대되었다.

 공군기 50대가 뤄양 상공에 장수를 의미하는 ()’자를 그렸다고 하는데,피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떠들썩한 생일이었다.

 장제스는 이곳에서 서북의 공산당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국민당 간부들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장제스의 별장은 훗날 해방군 총참모장 대리 양청우(楊成武) 장군의 감옥이 되기도 했다.

 양청우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린뱌오(林彪) 집단의 박해를 받아 비밀리에 향산사에 구금되었다.

 그는 1968년부터 1971년까지 2년이 넘도록 이곳 이층에 갇혀 지내며 아래층으로도 내려오지 못했다고 한다.

 

 

 

 

 

 

 

 

 

 

 

 

 

 

 

 

 

 

 

 

 

 

 

 

 

 

 

 

 

 

 

 

 

 

당대 풍유시인, 백거이의 묘(白居易墓)..

 향산, 용문교 왼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백거이의 묘인 백원(白園)은 당송 8대가의 한사람인 백거이의 묘가 있는 곳이다.

 백거이가 생전하던 839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도 향산에 왕래하며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 등의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며,

 8468월,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무덤을 조성한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나즈막한 언덕의 비탈길이 나오고, 여기저기에는 정자와 기념관도 서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돌아가면 평평한 곳의 백거이의 무덤은 직경 약10m, 높이 약2.5m로 밑부분에는 화강암으로 호석을 둘렀다.

 무덤 앞에는 일주석문과 거대한 백낙천의 사적비, 일본인 불교신자들이 세운 백거이의 시비들이 서 있다.

 백거이는 두보(杜甫), 이백(李白)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의 한사람이다.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이백이 죽은 지 10, 두보가 죽은 지 2년 후에 낙양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5살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고, 27세때 진사시험에 급제해 한림학사, 좌습유(左拾遺) 등을 지냈으나 그리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항주와 소주의 자사(刺使)를 역임하게 되었으며, 이후 이곳 향산에 은거하면서 시와 술로 만년을 보냈다..

 백원은 백거이의 묘원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가 돌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청윤(聽伊)’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만년의 백거이가 벗들과 더불어 술 마시고 시를 짓던 곳이며, 정자를 지나 더 올라가면 낙천당(樂天堂)’이 나온다.

 이곳에 있는 한백옥으로 만들어진 백거이의 좌상이 매우 인상적이다.

 낙천당에서 더 올라가면 비파봉 정상인데, 바로 이곳에 백거이가 잠들어 있다.

 무덤 앞에는 당소부백공묘(唐少傅白公墓)’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고, 무덤 옆에는 <취음선생전>이 새겨진 거대한 자연석비가 있다.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은 백거이의 자서전 격인 작품으로, 뤄양에서의 만년의 삶이 잘 묘사되어 있다.

 술에 취하여 시를 읊는다는 취음(醉吟)’의 의미처럼, 백거이는 술을 좋아하고 거문고에 탐닉하고 시에 푹 빠져 지냈다.

 그와 교류하는 이들은 산수를 함께 즐기는 벗, 시를 함께하는 벗, 술을 함께하는 벗이었다.

 그는 뤄양 안팎의 도관과 사원, 산수가 빼어난 곳을 유람하였고, 가마 안에 놓인 것은 거문고와 베개, 그리고 도연명과 사영운의 시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