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기행] 웅장한 규모의 나주향교(羅州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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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기행] 웅장한 규모의 나주향교(羅州鄕校)

by 정산 돌구름 2016. 7. 20.

웅장한 규모의 나주향교(羅州鄕校)

 

 

○ 탐방일 : 2016년 7월 17일

○ 소재지 : 전남 나주시 교동 32-1

○ 나주향교 소개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28(1985225)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나주목 관아와 함께 사적 제483호로 지정되었다.

  1398(태조 7)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정확하지 않다.

  1407(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고도 한다.

  1597(선조 31) 당시 대성전 수복이었던 김애남이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없어질 위험에 처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위패를 금성산으로 옮겼다가 왜병이 물러간 뒤 다시 안전하게 봉안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나라에서 듣고 그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의 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가 있다.

  현종·숙종 때에도 중수, 중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성전은 이때 중수된 듯하다.

  그러나 1900년대 사마재·수복청·양사재 등이, 1920년대에 서재·충복사가, 1952년에는 동무·서무·동재 등이 헐리게 되었다.

  이후 1959년 동재·서재를 중건, 1980년 명륜당과 동·서익당 보수, 1981년 담장 개축, 대성전과 동재·서재 보수하였다.

  건물 배치는 전묘후학(前墓後學)으로 앞에 제향을 두는 대성전을 두고 강학을 하는 명륜당을 뒤에 두는 방법이다.

  이는 서울의 성균관과 같은 배치법으로 평탄한 대지에 건물을 배치할 때는 이와 같은 법칙을 따랐다.

  , 강학은 명륜당이라 명명하여 경전학업의 중심으로, 문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의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성전으로 두 부분을 기본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현존하는 향교의 시설물들은 한국의 전통적 공립학교 건축으로 의미가 크다.

  이 향교에는 1701(숙종 27)에 창건한 계성사(啓聖祠)가 있는데, 이로 인해 배치가 다른 향교와는 다른 특색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교궁의 배치는 대성전이 위에 있고 그 밑에 명륜당이 위치하고 있으나,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하는 계성사가

  있는 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가 바뀐 것이 특색이다.

  호남지방의 향교 중 계성사가 있었던 곳으로는 나주향교 이외에 전주향교와 함평향교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신학제 실시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소장 전적 145195책 중 필사본인 <금성연계방안

  (錦城蓮桂榜案)>·<유림안(儒林案)>·<청금안(靑衿案)>·<통문(通文)>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향교 앞에는 이 향교를 지킨 김애남을 기리는 충복사유허비가 남아 있고, 박성건의 금성별곡시비가 세워져 있다.

  해마다 여름에는 서당이 개설되고 시민들의 전통혼례식장으로도 이용된다.

  대성전 앞에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그루가 서있다.

  보물 제394(196392)인 대성전(大成殿)은 서울 문묘(보물 제141) 대성전, 장수향교 대성전(보물 제272),

  강릉향교 대성전(보물 제214)과 함께 향교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향교 건물의 원형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五聖), 송조4(宋朝四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나주향교 배향(配享)

  공간의 중심이다.

  대성전은 정면 5,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단층 팔작지붕으로 제향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였으나 우설은 익공(翼工)과 비슷한 형태로 변하였고, 기둥과 기둥 사이 창방(昌枋) 위에는

  화반(花盤)을 배치하였다. 앞면은 1칸을 열어 툇간으로 하고, 그 안쪽에 고주(高柱)를 세웠으며, 중앙과 좌우 끝간에 각각

  문짝을 달았는데, 출입문이 없는 기둥 사이는 큼직한 살창을 마련하였다.

  이 툇간에 배열된 초석들은 윗면에 연판(蓮瓣)을 새긴 특별한 구성이다.

  내부에는 후면에 4개의 고주를 세우고, 전면에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앞뒤의 고주에 대량(大樑)을 걸쳐 지붕을 가구(架構)하였고, 그 위에 접시받침과 첨차와 양봉형을 갖춘 동자주형

  대공(臺工)을 세우고, 종량(宗樑) 위에 배치한 대공은 파련대공(波蓮臺工)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건물 내부의 고주와 주위의 평주는 퇴량으로 연결하였으며, 공포의 살미첨차는 한몸으로 합쳐져 양봉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부에도 기둥머리 위의 첨차들은 1개의 장식판처럼 합쳐졌고, 아래의 기둥머리에 꽂힌 첨차는 하부의 윤곽이 복잡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공포와 지붕 가구재(架構材)의 세부 특징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조성된 건축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