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기행] 역사속으로의 여행,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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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기행] 역사속으로의 여행,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by 정산 돌구름 2016. 8. 16.
역사속으로의 여행, 경주(慶州)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하계휴가 첫번째 일정으로 찾은 곳은 신라 천년 왕국의 역사도시 경주이다.

3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 도착한 동궁과 월지, 우리가 알고있는 안압지, 무더위 속에 사람들은 별로 없지만 한바퀴를 둘러본다.

 

○ 탐방일 : 2016년 8월 13일(토)

○ 소재지 : 경주시 인왕동 26

○ 동궁과 월지 소개

  사적 제18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된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신라 태자가 머물렀던 곳으로 특히 임해전(臨海殿)은 군신들이 연회나 회의를 하거나 귀빈을 접대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4년(문무왕 14년)에 건립하였다고 하며, 679년에 궁궐을 매우 화려하게 고쳤다고 하였다.

  804년(애장왕 5년), 847년(문성왕 9년), 867년(경문왕 7년)에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697년(효소왕 6년) 9월과 769년(혜공왕 5년) 3월, 860년(헌안왕 4년) 9월, 881년(헌강왕 7년) 3월에는 군신들이

  연회를 가졌다고 하였다.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931년에는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고려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었지만 신라 정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안압지가 건립된 시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뒤에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년)에 큰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전설 속의 해중선산(海中仙山)인 봉래(蓬萊)·방장

  (方丈)·영주(瀛州)를 상징하는 3개의 섬을 만들고서 꽃을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이 연못은 바다를 상징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중심 건물을 임해전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못의 북동쪽으로 중국 사천성 동쪽에 있는 명산인 무산(巫山)의 12봉우리를 본 따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신라가 멸망한 후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 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며, 기러기 '안(雁)'자와 오리'압(鴨)'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 '월지(月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이곳이 본래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 되어 '안압지'라는 이름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975년 3월∼1976년 12월에 발굴조사 결과, 신라시대에 축조한 연못이 거의 완전하게 확인되었고, 특히 못 주변에 쌓았던

  호안석축(護岸石築)도 매우 양호한 상태임이 밝혀졌다.

  연못에 물을 대는 입수구와 수로, 물이 빠져 나가는 배수구 등의 시설도 잘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한편 안압지 서쪽에서는 건물터와 행랑터가 확인되었으며, 서쪽에는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비교적 큰 건물터도 드러났다.

  안압지 바닥에서는 금동불상을 비롯한 금동 제품과 목조 건물의 부재 등이 출토되었고, 특수한 모습의 기와도 발굴되었다.

  특히 기와에는 697년인 ‘의봉4년(儀鳳四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임해전 터에서 출토된 680년인 ‘조로2년

  (調露二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상화(寶相華) 무늬의 벽돌과 함께 문무왕 때 임해전이 건립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밖에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신라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 굽다리접시(高杯)나 긴목항아리(長頸壺)과는 다른 것으로

  실생활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궁 및 월지 유적은 1980년에 정화공사를 거쳐 신라 궁궐의 원지(苑池)로 복원되었고, 3채의 누각도 발굴조사 때 출토된

  목조 건물 부재와 신라시대의 다른 유적들을 참조하여 복원되었다.

  그밖의 건물터는 주춧돌만 정연하게 확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