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여행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불국사이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38℃의 무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찾은 곳이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화엄의 세계인 불국토를 현세의 사바세계에 구현시킨 열정적인 신앙의 완성체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비롯한 수많은 국보문화재와 보물문화재가 있고 매년 수백만의 내외국인 방문객들이 한국의 뛰어난
불교예술작품들이 자리한 불국사를 방문하고 있다.
또한 한국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전시관으로서 세계에 한국불교와 한국의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1600년 한국불교 수행정진과 지혜의 도량으로서 푸르른 서기가 흐르고 있는 곳이 바로 불국사이다..
○ 탐방일 : 2016년 8월 13일(토)
○ 소재지 : 경주시 진현동 15
○ 불국사 소개
사적 제502호(2009년12월21일)로 지정된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751년(경덕왕 10년)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670년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을 짓고 신림(神琳)·표훈(表訓) 등 의상(義湘)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년)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대성의 중창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년)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구역이다.
이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 큰 건물로는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 32칸)·천불전(千佛殿, 25칸) 등이 있고, 이 두 개의 건물만큼 크지는 않아도
중요한 건물로는 시왕전(十王殿, 5칸)·십륙응진전(十六應眞殿, 5칸)·문수전(文殊殿, 5칸) 등이 있다.
또한 승방이라고 생각되는 동당(4칸)·서당(4칸)·동별실(5칸)·서별실(5칸)·청풍료(淸風寮)·명월료(明月寮)·객실·영빈료 등이
있었으며, 그 밖에 누·각·문·고·욕실 등이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887년(진성여왕 1년)과 1024년(현종 15년)에는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고, 1172년(명종 2년)에는 비로전과 극락전의
기와를 갈았으며, 1312년(충선왕 4년)에도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다.
1436년(세종 18년)에는 대웅전과 관음전과 자하문을 중수하였고, 1470년(성종 1년)에는 관음전을, 1490년에는 대웅전과
각 절을 중수하였다. 1514년(중종 9년)에는 극락전의 벽화를, 1564년(명종 19년)에는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左兵使)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 버렸다.
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와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극락전·
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광해군 4년)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인조 8년)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효종 10년)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밖에 안양문(安養門)·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뒤 또다시 퇴락되어 가던 이 절은 박정희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2월에 공사를 착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毘盧殿)·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泛影樓)·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차료 1천원을 받아 주차료가 싸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매표소에는 입장료 1인당 4,000원을 받는다..
불국사 배치도를 살펴보고 들어선다..
토함산 불국사..
숲속으로 들어서 한참을 걸어간다..
불국사 천왕문..
불국사 천왕문의 사천왕상..
왼쪽은 증장천왕으로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오른쪽은 광목천왕으로 손에 보탑을 들고 있다.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수미산 남쪽의 유리타(瑠璃埵)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구반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왕은 온몸이 적육색이며 노한 눈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대개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잡아 가슴 바로 아래에 대고 있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서쪽을 방어하는 신으로 수미산 중턱 백은타(白銀埵)에 살고 있는이다.
그는 흔히 잡어(雜語)·비호보(非好報)·악안(惡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남다른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그의 몸은 여러가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고 한다.
또 눈을 크게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고 하여 악안·광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광목천왕의 근본 서원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道心)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탑을 받들어 쥐고 있다. 그의 권속으로는 용(龍)과 비사사(毘舍闍) 등이 있다..
다문천왕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오른쪽은 지국천왕으로 검을 쥐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한때 불법에 귀의하여 광명신(光明神)이 되었으나,
본래 자신의 원을 지킨다 하여 금비라신(金毘羅神)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북쪽 수정타(水精埵)에 살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안민(安民)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에 있는 천궁에서 살고 있다.
16선신(善神)의 하나이기도 한 지국천왕은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을 고루 보살핀다.
얼굴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었고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있다.
휘하에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건달바(乾達婆)를 거느리고 있다..
권역으로 들어선다..
불국사 자하문(紫霞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건물로 대웅전 앞 중문(中門)으로서 앞에는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고,
이를 오르면 넓은 석조기단 위에 인 이 문이 세워져 있다.
문의 양옆에는 1973년에 복원한 남회랑(南回廊)이 연결되어 있다.
건물 가운데 달린 판문의 바깥쪽에는 갓기둥의 간격에 맞추어 계단참 형식의 공간을 두었고,
문 안쪽에는 기둥 간격보다 넓게 기단을 마련하여 주춧돌을 놓고 건물을 세웠다.
기둥은 조선 후기식 민흘림 수법으로 처리하였고, 기둥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르고,
이 위에 안팎 2출목(二出目)인 다포계(多包系)의 공포(栱包)를 짜올렸다.
한편, 기단의 주춧돌·신방석·문지방돌 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건립연대는 불분명하지만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1436년(세종 18)에 중수된 적이 있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인조 6년(1628년)에 재건하였다.
그 뒤 1630년에 수리를 하고 1708년(숙종 34)에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또 1966년에 이 건물을 수리할 때 발견한 상량문에 의하면, 1781년(정조 5년)에 다시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보 제23호,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
대웅전 구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 등의 옛기록에 의하면
위쪽이 청운교, 아래쪽이 백운교이다..
계단을 ‘다리(橋)’라고 한 것은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감을 상징한 것이다..
청운교는 16단, 백운교는 18단이며, 계단 경사면이 45°의 안정된 각도로 되어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되어있어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석축(보물 제1745호),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 제22호)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불국사 범영루(梵影樓).
고서에 범영루를 수미범종각이라 부른 것으로 보아 이 누각 은 원래 종을 안치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다고 한다.
이 범영루는 불국사 창건과 더불어 지어진 건물로 생각되는데 임진왜란 당시 재난을 당하여 소실된 이후 수차례의 중수와
중건을 거쳐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웠다.
석주 위에 정면 1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포식 팔작 지붕 형식의 건물로,지금 이 자리에는 법고(法鼓)가 놓여 있다..
처음에는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불렀다.
수미산 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게끔 하고, 아래에는 오장간을 세울 수 있겠끔 하였다.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 범영루는 751년에 건립하였고, 1593년에 불탄 뒤 1612년과 1688년에 중건하였으며, 1708년에 단청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의 복원 공사 때 중건된 것으로 옛 모습대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3층으로 된 아담한 누각이다.
범영루의 동편에는 좌경루가 있었으나 조선말에 완전히 없어졌던 것을 1973년 복원 공사 때 재건하였다..
범영루 아래의 석주는 아주 특이한 형태로 석단위에 판석(板石)을 세웠는데, 밑부분을 넓게 하고, 중간 돌기둥을 지나면
다시 가늘고 좁게 하였다가 윗부분에 이르러 다시 밑부분과 같이 넓게 쌓았다.
쌓은 형태는 기둥돌이 전부 8개씩 다른 돌로 되어 있고, 이 다른 돌을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조립하였다..
국보 제22호, 연화교(蓮華橋) 및 칠보교(七寶橋)..
극락전 구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아래쪽의 연화교는 10단, 위쪽의 칠보교는 8단이다.
청운교 및 백운교보다 규모는 작으나 형태와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계단은 45°각도의 안정된 기울기를 보이며, 연화교와 칠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무지개 모양의 곡선으로 되어 있다.
연화교의 층계에는 계단마다 넓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계단을 밟는 사람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석축(보물 제1745호), 청운교 및 백운교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불국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대석단 앞에 동서방향으로 2쌍이 나란히 서있다.
서편 당간지주는 좌우 기둥의 크기와 제작수법에 차이가 있어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편 당간지주는 전반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나 양 기둥의 하부가 절단된 것을 1924년도에 시멘트로 접합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위치에 남아있는 동편 당간지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석조유물일 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형이나 장식적인 의장면에서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의 양식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편 당간지주는 당간지주의 원래 용도가 단절된 조선시대에 이르러 괘불을 현괘하기 위한 용도로 다시 고안된 사례로
중요한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양 기둥의 양식이나 제작연대가 다른 것을 조합하고 있어 조형성이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불국사 석조..
신라 최대의 석조로, 입부분과 내부 바닥에 섬세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서 주목을 끈다.
지금도 청운교(靑雲橋) 남쪽, 즉 사역의 남동쪽 진입로 부근에 놓인 채 샘물을 받는 그릇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국사 경내에는 3개의 석조가 더 있다. 2007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8호에서 보물 제1523호로 승격되었다..
보물 제1745호, 불국사 가구식 석축(架構式 石築)..
불전과 불탑 등을 배치하기 위해서 조성한 구조물로서 경사진 지형 여건에 따라 대웅전과 극락전 회랑 외곽에
자연석과 가구식 석축을 상·하 2단으로 조화롭게 축조했다.
장대석재로 구획한 공간에 여러 형상의 석재를 채워 쌓은 가구식기법과 석난간의 구성 등은 국·내외 유일무이의 구조이다..
불국사 범종각..
불국사 범종각은 수미범종각으로 범영루에 있었다..
범종각에는 범종만 남아있다..
범종각 옆의 불교 미술관..
불국사 회랑(回廊)..
불국사 건축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회랑(回廊)이다.
회랑은 신라 왕실의 사찰이었던 황룡사와 불국사, 백제왕실의 사찰이었던 익산 미륵사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것이다.
현재 이런 회랑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불국사에만 있는 것으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같은 궁궐에서 볼 수 있다.
회랑은 달리 보랑(步廊)·무랑(廡廊)이라고도 한다.
흔히 바깥쪽은 벽이나 연자창을 만들고 안쪽은 기둥만 세워 개방하고 있다.
들보 사이는 한 칸이 보통이며, 이것을 단랑(單廊)이라 하고, 두 칸으로 된 것을 복랑(複廊)이라고 한다..
불국사 극락전(極樂殿)..
정면3칸, 측면 3칸으로 대웅전의 서쪽 한단 낮은 곳에 세워져 있다..
국보 제22호인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를 거쳐 안양문(安養門)을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위치에 있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1750년(영조 26년)에 오환(悟還)·무숙(武淑) 등이 중창한 것이지만,
기단(基壇)과 초석·계단 등은 신라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변주(邊柱)의 상부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얹고 다포작(多包作)의 공포(栱包)를 짰는데,
공포는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외부로 뻗어나온 쇠서(牛舌) 위에 연봉(蓮蕾)을 조각하고 그 위에는 봉두(鳳頭)를
조각하여 조선 후기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 안에는 내고주(內高柱) 4개를 세웠는데,
뒤쪽의 고주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세워 그 앞에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국보 제27호인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불국사 황금돼지, 복돼지 상 모형을 극락전 앞에 만들어 놓았다....
극락전 뒤편의 나한전(羅漢殿)..
70년대 보수공사시 신축된 건물이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들을 봉안한다.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모신 응진전과 석가삼존을 중심으로 500인의 아라한을 모신 오백나한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안양문에서 바라본 청운교와 백운교..
보물 제61호, 불국사 가리탑(舍利塔)..
높이는 2.06m이고, 재료는 붉은색을 띤 화강암이다.
사리탑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탑으로 부도(浮屠)라고도 한다..
이 탑은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데, 외형이 석등과 흡사하며 사적기(寺蹟記)에는 ‘광학부도(光學浮屠)’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상(眼象)이 새겨진 팔각형 하대석 위에 도드라진 연꽃을 조각한 복련석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중대석이 올려져 있고,
그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상대석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의 장식은 일부 남아 있다.
이 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35년 무렵에 불국사로 옮겨 세웠다.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여겨왔으나, 하대(下臺)의 안상수법(眼象手法)과 중대석의 구름무늬를 새긴 수법,
탑신의 감실(龕室) 주연선(周緣線)이 고려시대 안상의 윤곽선과 흡사하여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식(彫飾)이 화려하고 조각 기법도 섬세할 뿐만 아니라 전체가 조화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탑신은 원통형으로 연화(蓮花)와 보상화(寶相華)를 조각한 기둥 모양을 세워 4구역으로 구분하고
얕은 불감(佛龕)을 개설하여 그 안에 여래좌상(如來坐像)과 보살입상(菩薩立像)을 각각 2구(軀)씩 양각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은 추녀 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을 향하면서
6개의 능선이 소멸되어 6각을 이루고 경사는 완만하다.
불국사 비로전(毘盧殿)은 비로자나 화엄불국토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비로자나란 '무한한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뜻으로 대광명의 화엄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불국사 복원시에 중창된 비로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 일곽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높이 1.8m의 금동비로자나불 좌상을 안치하고 있다..
국보 제26호, 비로전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象)..
극락전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백률사 금동약사여래 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의 하나로 꼽힌다.
높이 1.77m, 머리 높이는 55cm, 폭은 1.36m이다.
본래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극락전 아미타부처님과 함께 극락전으로 옮겨졌고,
그 뒤 현재의 비로전 주존불로 안치되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여 삼신불(三身佛)사상의 본존으로 여겨진다.
현재 대좌나 광배는 결실되고 불신만 봉안되어 있다..
회랑의 끝은 범영루와 연결된다..
범영루에 안에 거북이 등위에 올려져 있는 커다란 북, 법고(法鼓)..
일반적으로 법고는 범종각(梵鐘閣)에 범종, 목어(木魚), 운판(雲版)과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을 보관하고 있다.
불국사에는 범영루에 법고(法鼓), 좌경루에 목어와 운판, 범종각에 범종(梵鐘)을 나누어 봉안하고 있다...
법고(法鼓)는 축생(네발 달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울리며, 운판(雲版)은 하늘을 날라 다니는 공중의 중생을,
목어(木魚)는 수중의 중생을, 범종(梵鐘)은 지옥의 중생을 각각 제도하기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법고는 예불이 시작하기 전인 오전 3시30분, 오후 6시30분경에 불전사물과 함께 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물 제1744호, 불국사 대웅전(大雄殿)..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으로, 대웅(大雄), 즉,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미한다..
대웅전은 8세기 중엽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처음 세워졌고, 임진왜란 중인 1593년 건물 석조 기단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탔다.
1765년 남아 있던 기단 위에 재건되어, 통일신라 때의 기단과 18세기의 건물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多包系)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기단은 지대석(地臺石)·면석(面石)·
갑석(甲石) 등을 고루 갖춘 것으로 4면의 중앙에 계단 1개씩을 두고 다듬은 주춧돌을 놓았다.
내부는 안두리기둥(內陣柱)과 바깥두리기둥(外陣柱)을 세웠으며, 안두리기둥은 모두 고주(高柱)로 하고 뒷면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였으며, 이 앞에 불단을 마련하고 불상을 모셔놓았다.
기둥은 단면을 원형으로 만들고 민흘림으로 처리하였으며, 바깥두리기둥의 윗몸에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바깥쪽은 3출목
7포작, 안쪽은 4출목 9포작의 다포계 공포를 짜올렸다. 중앙 어간(御間)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돌출시켜놓았다.
또 첨차의 쇠서(牛舌) 위는 연꽃봉오리와 봉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조선 후기 불전건축 모습을 보인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으며, 금모루단청을 칠하였다.
이 건물은 1765년(영조 41년)에 중창(重創)된 것인데, 중문인 자하문과 함께 당시 불국사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이 건물의 앞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좌우로 놓여 있다..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木彫)의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미륵보살(彌勒菩薩)과 갈라보살(碣羅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弟子像)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확한 조성년대는 알 수 없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손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보물 제1797호, 불국사 대웅전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
1769년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와 상궁 김씨 등이 시주하여
제작한 불화로 영산회상 탱화와 2점의 사천왕 벽화가 있다.
영산회상도란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불이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일반적으로 부처와 보살, 나한, 사천왕 등을 함께 표현한다.
불국사 대웅전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불과 보살, 나한을 한 폭에 배치하고 사천왕은 따로 벽화에 그려 넣은 독특한 구성이다.
이 불화는 18세기 중·후반 통도사와
봉정사 등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들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색감과 안정적인 구도 등 경상도 지역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국보 제20호, 다보탑(多寶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형식인 석가탑과는 달리 목조 건축의 여러 요소들을 조합한 독창적인 형태의 탑으로,
높이 10.3m이다..
기단 위에 놓인 돌사자는 원래 4마리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없어져 현재 1마리만 남아 있다...
탑 내부에 안치되었던 사리장엄도 1925년의 수리공사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탑, 다보탑이라는 이름은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신 진리를 다보 부처님이 증명하였다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탑 모두 8세기 중엽 신라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세워졌다..
국보 제21호, 석가탑(釋迦塔)..
석가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통적인 신라 석탑으로, 높이 10.6m이다..
엄격한 조화와 균형의 미를 갖추어 통일신라 석탑을 대표하는 탑으로 꼽힌다.
1966년 도굴범에 의해 훼손된 석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비롯한 다수의 사리장엄(국보 제126호)이 발견되었다..
자하문에서 본 불국사 좌경루(左經樓)
대웅전 좌측에 축조된 경루(經樓)의 내부에는 오늘날 목어(木魚)가 걸려 있으나,
건물의 명칭으로 미루어 볼 때 원래는 경전(經典)을 보관하였던 장소로 여겨진다.
지금의 경루는 1973년에 중창된 건물로 단칸의 정면에 측면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다포식 팔작 지붕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건물의 성격과 규모는 대웅전의 우측에 있는 범영루와 같으나,
석단과 회랑보다 앞으로 돌출된 건물을 받치기 위하여 마련된 석주는 상호간에 서로 다른 독특한 형태로 조형되었다..
자하문의 오른 쪽에 보이는 누각이 좌경루(左經樓)로 좌경루는 불국사에서 유일하게 현판(懸板)이 없는 건물로
예전에는 경전(經典)을 보관했던 곳이나 지금은 목어(木魚)와 운판(雲版)이 걸려 있다.
불국사 고금창기에는 좌경루가 3칸이라는 기록이 전하고 그동안 건물터만 남아있던 것을 1973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불국사 무설전(無說殿)..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은 언어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 경지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명명하였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불국사 내 건물 중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670년경 의상(義湘)대사가 이곳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규모가 32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708년(숙종 34년) 중창되었고,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73년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정면 8칸 측면 4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목조 건물로, 전면 4곳과 양쪽 측면, 후면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2009년 5월 태국 왕실이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만든 석가모니불 좌상이 이곳에 봉안되었다..
불국사 관음전(觀音殿)..
751년 창건되어 1470년(성종 1년)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95년(숙종 21년), 1718년(숙종 44년) 두 차례 중창되었다가 폐허가 된 것을 1973년 복원하였다.
불국사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건물로 내부에는 4개의 안두리 기둥이 있고 다포식의 사모지붕을 얹었다.
관음전은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성전이다.
관세음보살은 남쪽바다에 솟아있는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면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중생을 구원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불국사의 관음전은 비로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관음전에는 천수천안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과 관음보살상은 1973년 조성한 것으로 높이 1.7m, 너비 60cm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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