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의 목포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그리고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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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산행2015

해질녘의 목포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그리고 둘레길..

by 정산 돌구름 2015. 5. 5.
해질녘의 목포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그리고 둘레길..

 

○ 산행일자 : 2015년 5월 5일(화)

○ 기상상황 : 맑음(맑고 화창한 날씨 20~26℃)

○ 산행코스 : 유달산주차장~노적봉~마당바위~일등바위~이등바위~봉후쉼터~낙조대~아리랑고개~목포시사~주차장(전남 목포)

○ 거리 및 소요시간 : 5.2km(GPS), 2시간15분소요

  유달산주차장(17:25)~노적봉(17:30)~대학루(17:35)~달선각(17:40)~유선각(17:45)~애기바위(17:50)~마당바위(17:55)

  ~홍법대사상(18:00)~일등바위(18:10~15)~얼굴바위(18:20)~이등바위(18:30~35)~봉후쉼터(18:45)~낙조대(18:55~

  19:05)~아리랑고개(19:15)~목교(19:20)~학암사(19:25)~유달산휴게소(19:30)~목포시사(19:35)~주차장(19:40)

 

 

○ 유달산과 둘레길 소개

  삼학도, 갓바위와 함께 전남 목포의 3대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유달산(儒達山, 228m)은 기암절벽이 첩첩하여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하며, 목포 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정상에 서면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으며, 예부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렸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하였다.

  이후 구한말 대학자인 무정 정만조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

  (儒達亭) 건립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

  노적봉을 비롯하여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하여 이름 붙여진 해발 228m의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바위)로 나눠진 유달산은 갖가지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첩첩하며 그 옛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유달산(儒達山)은 온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바위산이다.

  날카로운 암봉들이 많은 유달산은 악하고 모난 기운을 없애려고 많은 나무를 식재하였다고 하는데, 바위와 수목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

  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으며 산마루마다 칼날 같은 암봉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어 목포 사람들의 단단한 기개를 보여주는 듯하다.

  자연의 기묘한 조화로 만들어진 유달산의 수많은 기암괴석들은 오랜 세월동안 전설과 사연을 간직하면서 목포를 굽어보고 있다.

  노적봉에서 일등봉까지의 길은 목포시민들이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등산로이자 산책로이다.

  유달산보다 더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노적봉이 산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유달산 입구 도로 건너편에 일부러 가져다 높은 듯 서 있는 큰 바위덩어리 하나가 보이는 데 그곳이 바로 노적봉이다.

  노적봉(露積峯)은 해발 60m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군량미를 쌓아놓은 큰 노적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를 본 왜적들은 저렇게 많은 군량을 쌓아두었으니 군사는 얼마나

  많겠느냐며 지레 놀라 도망쳤다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일주도로 주변 1,2부 능선을 따라 편하게 한바퀴 돌아볼 수 있는 유달산 둘레길 6.3㎞를 개설했다.

  목포시가 2014년 3월부터 11월까지 총 사업비 1억2,000만원을 투입해 수원지 뚝방길 40m, 봉후샘 개발, 쉼터, 학암사길 테크

  설치, 암반계단, 이정표 27개소 설치, 수목 300주를 설치했다.

  유달산유원지∼목포시사, 조각공원∼어민동산∼봉후샘 쉼터, 아리랑고개∼수원지 뚝방길∼학암사∼유달산 휴게소 등 3.4km를 새로

  개설하고, 기존 목포시사∼조각공원, 봉후샘 쉼터∼낙조대∼아리랑 고개 등 2.9km를 정비해 둘레길을 완성했다.

  12월11일 개통식을 가진 유달산 둘레길은 총 7개 구간으로 구성됐다.

  제1구간은 유달산유원지 주차장에서 목포시사까지 0.7km로 동백나무 숲이 볼만하다.

  제2구간은 목포시사에서 조각공원까지 0.8km로 1982년 조성된 조각공원이 볼거리다.

  우리나라 최초 야외 조각공원인 이곳에는 46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제3구간은 조각공원에서 어민동산까지 1.1km로 단풍나무, 은행나무, 튤립나무숲으로 꾸며져 있어 운치 있고 독특한 정감을 준다.

  제4구간은 어민동산에서 봉후샘까지 0.7km로 편백숲길, 코끼리바위 약수터가 있고, 다도해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제5구간은 봉후샘에서 아리랑고개 2.1㎞로 2003년 개설된 낙조대 전망이 볼만하다.

  제6구간은 아리랑고개에서 뚝방길, 유달산 휴게소 0.8㎞다. 1911년 일제강점기 축조된 제2수원지 뚝방길위에 데크가 설치됐다.

  버드나무 그늘 사이로 유달산 얘기바위의 운치도 눈길을 끈다.

  학암사 앞길은 노적봉과 삼학도 영산강 원도심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뛰어난 코스다.

  제7구간은 유달산휴게소에서 유달산 주차장 0.1㎞다.

  유달산 둘레길은 기존 숲길을 최대한 원형 복원하고, 숲길과 뚝방길, 밭뚝길 등 기존 길을 적극 활용해 친환경적으로 조성했다.

  여기에 구간마다 다양한 종류의 군락서식 나무숲을 연결해 계절별 색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 Prologue

 맑고 푸른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 해질녘 잠깐 시간을 내어 유달산에 오른다.

 유달주차장에서 노적봉을 거쳐 주 능선을 따라 마당바위를 지나 일등바위에서 이등바위까지 오른다.

 맑게 개인 하늘에 일등바위에서의 조망은 환상적이다. 다도해의 섬들과 목포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능선에서 내려서 살기슭을 따라 개설된 유달산 둘레길을 따라 가면 지난번 갔던 길과는 다르게 새롭게 개설되었다.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해질녘의 목포 앞바다의 풍경이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유달산 무료주차장에 차를 두고 산행을 시작한다..

 

가야할 노적봉과 이순신장군동상이 바라보인다..

 

유달산 입구에 이르면 노적봉이 솟아있다.

해발 60m의 바위산 노적봉은 원래 유달산의 한 봉우리였다고 하는데 일정감정시기에 일본인 거주지와 구 시가지를 연결하기 위한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노적봉은 유달산 능선에서 떨어져 나와 섬처럼 외로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유달산 공원 입구..

 

계단을 올라 바라본 노적봉..

전해오는 말로는 일본인들이 유달산에서 내리 뻗은 노적봉의 맥을 끊기 위해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은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로 가장한 후 석회가루를 바다에 뿌려 뿌연 쌀뜨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적을 속이고,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허수아비를 곳곳에 세워놓아 전의를 상실한 왜군이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로 노적을 쌓았다고 하여 노적봉이라 불렸다고 한다..

 

노적봉 정상 큰바위얼굴은 사진으로 찍어 90도를 회전할 경우 사람의 얼굴 윤곽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일부에서는 노적봉 큰바위 얼굴을 이순신장군이 호령하는 모습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쥐바위, 탕건바위로 불리는 복바위..

마치 쥐 한 마리가 바위를 타고 있는 듯한 모습이 아주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쥐바위라고 부르는데 노적거리 앞에는 쥐가 살아야 한다고하는 풍수설의 설명과 맞아떨어지는 바위인 것이다.

반면 옆에서 볼 때는 노적봉을 향해 두 손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복을 비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 ‘복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옛날 어른들의 탕건과 같다하여 ‘탕건바위’로도 불린다..

 

공원 중앙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이 목포를 수호하듯 서있다.

충무공 정신 구현을 위해 1974년5월20일 총 209명으로 된 이충무공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1974년8월15일 세워졌다.

비명은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 탁련하(卓鍊河)선생의 조각을, 이은상·최순우·최영희 선생의 사료에 의한 고증 및 심의를 거쳐,

1974년 문화공보부 등록 제1호가 되었다고 한다..

 

유달산의 루각중 가장 먼저 맞이하는 대학루(待鶴樓).. 바로 옆 오포가 있다.

1909년 4월, 목포시민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최초의 포는 조선식 선입포로 1671년(현종10년) 제작되었으며, 높이 5자, 구경3치5푼, 중량 733근으로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와 천기산에서 시험발포 했는데 발포 때마다 뒤로 밀려나가는 구식이었다.

1913년 가격 160원에 일본식 야포로 대치되었고 이전의 조선식 대포는 일제의 송도신사(목포시 동명동소재)에 보관하던 중 일제말에

태평양전쟁을 위해 일본정부가 공출해 가져가 버렸다.

예전에 이 오포는 포탄없이 화약만 넣어 포를 쏘아 시민에게 정오를 알리는 기능을 하였는데 전쟁도구를 생활도구로 이용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며 지금도 목포토박이들은 이 오포소리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1986년 지방문화재자료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의 이 오포는 같은 해 현충사 박물관에 전시된 천자총통을 복제한 모형이다..

 

대학루에서 바라본 목포시가지..

 

삼학도와 목포 앞바다..

 

목포항 너머로 영암삼호시가지가 바라보인다..

 

대학루에서 내려서면 유달산휴게소.. 주능선과 둘레길의 갈림길이다..

 

능선을 따라 오르면 어린이헌장탑..

 

어린이헌장탑을 지나면 암반 위에 목포가 낳은 국민가수 이난영(본명 이옥례)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노래비에는 사시사철 이난영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녹음 장치를 해 놓았다.

<울밑에 선 봉선화>는 가곡으로 당시 우리나라를 상징하였고,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랫말이 되었다.

유달산 기슭에 세워진 이 비는 1969년6월10일 목포악기점을 하는 박오주(朴午周)씨가 기증하여 세워졌는데

이 노래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로서 더욱 의미가 있다.

1934년 조선일보에서 전국 6대 도시를 대상으로 한 향토노래 공모를 했다.

이때 목포에서 응모한 문일석(본명 윤재희)의 <목포의 노래>라는 작품이 전국 신민요가사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선정되자,

당대의 유명한 손목인 씨의 작곡을 거쳐 <목포의 눈물> 이라는 노래로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는 1935년에 발표되어 일제 수탈의 서러움으로 응어리진 2천만 온 겨레의 심금을 울림으로써

가수 이난영을 전 국민적인 불멸의 가수로 기억되게 하였다..

 

잠시 오르면 달선각(達仙閣)..

1959년8월15일 시민의 휴식처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유달산 입구에서 유선각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중간에 루각을 세울 것을 결의

하였고, 준공일이 8월15일 즈음이라 해방14주년(광복절) 행사와 함께 기념식을 가졌으며, 면적 42㎡, 육각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달선각을 지나면 목포천자총통 유달산 체험장이 나타난다.

이 체험장은 시민과 관광객이 천자통통을 발포하고 의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장소이다.

천자총통 체험은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 또는 목포시청 사이트에서 신청 가능하며,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 사이트에는 천자총통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채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정을묘명천자총통은 이름 그대로 중국 가정(嘉靖) 년간 을묘년(1555)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는 천자총통을 말한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물건을 세거나 순서를 말할 때, 천자문(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그 순서를 표기한 방법에

따라 이 총통이 조선시대 가장 큰 총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천자총통은 최무선(崔茂宣)이 고려말에 이미 제작하였던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발전시킨 것이다.

장군화통(將軍火筒)도 이 천자총통의 전신(前身)이다. 천자총통의 제원에 관한 문헌기록은 <융원필비>와 <화포식언해>에 남아있다.

발포체험은 주말 및 공휴일, 축제기간 등 오전 11시~오후 1시(발사는 12시)에 행해지는데 참가비는 1팀 2만원(1팀 3,4명 구성)이다.

 

유선각으로 가는 계단 왼편 투구모양 같기도 하며 코뿔소의 뿔 모양 같기도 한 투구바위가 눈에 든다.

위로 솟아 있는 장식이 없어 밋밋한 투구처럼 보이지만, 비스듬히 서 바라볼 때 투구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투구바위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설화를 지니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고하도에서 108일 간 머무르면서 목포 앞바다를 무대로 고금도 쪽으로 싸움터를 옮기기 위해 군량미를 확보해야 했다.

오가는 배를 통한 통행세를 곡물로 받아 군량미를 확보하고 목포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략상 목포를 떠나야했던 마지막 날 이순신장군은 유달산에 올라 내려오면서 일본이 목포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투구를

벗어 놓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투구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잠시 올라서면 유선각(儒仙閣)..

유달산에 세워진 6개의 정자(대학루·달선각·유선각·관운각·소요정·팔각정) 중 하나로 유달산 중턱에 있다.

목포의 최고 전망대로 알려진 정자로, 이곳에 서면 목포항과 목포시가지, 삼학도, 영산호, 다도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32년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하여 세웠다가 태풍으로 인해 무너져 중건하였고,

중건한 건물도 퇴락하자 1973년8월1일 옛 모습 그대로 개축하였는데 원래는 목조건물이었으나 현 건물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전통적 건축양식을 갖춘 누각(樓閣)이다.

한말의 유학자로 시문에 능했던 무정 정만조(鄭萬朝)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유달산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시를 읊었던 곳이라 하여

유선각(儒仙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누각 전면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해공 신익희(申翼熙)가 유달산에 들렀다가 기념으로 남긴 것이다.

유선각 앞쪽 암반에는 1973년 개축 때 세운 유선각 표비가 있다..

 

유선각의 천장..

 

유선각을 지나면 바람골쉼터.. 좌측은 아리랑고개, 우측은 달성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가파르게 계단으로 오르면 거대한 고래가 입을 벌리고 있다.

고래의 입 모양처럼 생겼다하여 고래바위라 하며, 일명 <두꺼비 바위>라고도 부른다..

 

고래바위를 지나 관운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 종 모양의 종바위가 나타난다.

절에서 흔히 볼수있는 범종과 다른 서양식 종으로 아래쪽에서 볼때 확연히 종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우측 아래로는 목포시의 대표 사찰, 달성사(達聖寺)..

달성사는 목포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동남쪽 중턱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 대둔사의 말사로 전통사찰 69호이다.

문화재(전남 유형문화재 제228호, 제229호)를 보유하고 있는 목포에서 유일한 사찰이다.

대웅전 옆에는 달성사 창건주인 노대련선사를 기리기 위한 창건주노대련선사창공비(創建主盧大蓮禪師彰功碑)가 세워져있다..

목포 8경에 속하는 풍경이 달사모종(達寺暮鐘)..

지옥까지 소리 들려 해가 저물 즈음에 들리는 종소리다. 오전 28회, 저녁 33회의 소리가 달성사 마당부터 은은하게 퍼진다.

28회 종소리는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을 합한 것으로 종소리가 세상에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한다는 뜻을 담고있다.

33회의 종소리는 지옥까지 소리가 퍼진다는 의미가 있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 전망데크..

 

건너편으로 가야할 이등바위, 그리고 북항너머로 목포와 압해도를 잇는 압해대교..

 

당겨본 압해대교..

 

능선 좌측의 암봉, 애기바위..

 

관운각 맞은편에 있는 바위로 ‘애기바위’, ‘큰 엄씨·작은 엄씨바위“라고도 한다.

높이 솟아있는 두 개의 바위 주변에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널려 있으며, 조금 아래의 남쪽에는 몇 개의 벤치가 있다.

큰 엄씨가 애기를 업고 작은 엄씨에게 등을 돌리고, 작은 엄씨도 애기를 업었는데 큰 엄씨를 보려고 하는 형상이다.

이곳은 마당바위로 오르는 능선이 남동쪽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어 두 엄씨는 거센해풍을 등지고 애처롭게 서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조대바위는 애처롭게 서 있는 애기바위 뒤편 아래쪽에 있다.

고하도 앞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팔짱을 끼고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낚시꾼을 보는 듯하다.

등뒤의 큰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모양인데 네 개의 바위가 합쳐져 이러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서는 다도해의 잔잔한 바다와 길게 늘어진 고하도, 옹기종기 모여있는 온금동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으며,

안개자욱한 날에 바라보면 더 이채롭다고 한다..

 

건너편의 고하도 용머리와 목포대교, 화원반도와 신안군 다도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산기맥의 끝자락과 그너머로 고하도와 허사도, 영암 삼호중공업, 그 뒤로 화원반도..

 

관운각 바로 아래에 있는 거북바위는 모양이 고개를 내밀고 엎드려 있는 거북이와 닮았다.

관운각을 지나 바다로 다시 돌아가려는 거북이의 모습인데 여기 이외에도 유달산에는 거북형상을 한 바위들이 많다..

 

관운각에서 바당바위로 오르는 길에 있는 바위로 크고 작은 장방형의 네모 반듯한 두 개의 바위가 입석바위이다.

일등바위의 능선에 걸쳐있는 이 바위는 바위능선의 지질변화 과정 중 수직으로 절리되어 기둥처럼 우뚝 서 있게 된 것이다.

정면에서는 사각기둥 모양의 평범한 입석으로 보이지만 옆면이 길에 뻗어있어 상당한 규모임을 자랑하고 있다..

 

마당바위 오르는 길목의 관운각..

 

마당바위에 올라서면 기괴한 손가락바위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목포의 어느지역에서나 보이는 것으로 유달산의 상징적인 바위라 할 수 있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차이가 난다.

약속하자는듯 새끼손가락을 내세우는 것도 하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유달산 바위중 내가 최고라고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이 손가락 바위가 워낙 반듯하여 아무리 암벽을 잘 타는 전문가라도 장비 없이는 오를 수가 없다.

그러나 손가락바위를 아무런 기구없이 마치 서커스하듯 자유자재로 오르고 내린 기인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유달산 타잔’이라

불렀는데 그가 바로 해방직후에 살았다는 정인조이다.

그가 손가락바위를 타는 일요일이 되면 바위 타는 걸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바위를 타는 신기를 타고 난 그도 결국 산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목포대교와 고하도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마당바위..

어른 10명이 앉아서 쉴 정도의 마당같이 넓은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당바위로 오르는 길은 계단을 만들기 힘들어 바위의 능선을 계단모양으로 깎아 내고 시멘트를 발라 만들었다..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고하도와 목포대교.. 

 

이등바위와 그 너머로 압해도를 잇는 압해대교..

 

목포 구도심 시가지, 양을산과 입암산..

 

삼학도와 목포항, 멀리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영산강 하구둑..

 

관운각으로 오르는 계단 옆 마당바위로 가는 길과 곧장 일등봉으로 가는 갈림길의 나막신바위..

아래 길 쪽으로 기울어져있으며, 갈림길에서 보이는 부분이 나막신의 앞부분이다.

둔탁한 직사각형의 바위인데도 앞끝이 살짝 위로 올라가 나막신을 연상시킨다..

 

마당바위에서 내려와 우측 마당바위 바로 아래에 일본불교의 흔적을 찾아 들어간다..

 

1920년대 말 일본인들이 일본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목포 유달산에 88개의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을 만들었는데,

현재 유달산 일등바위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암각상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홍법대사(弘法大師) 마애불..

774년 시코쿠 사누키국(讚岐國)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불교 진언종(眞言宗)의 창시자로, 본명은 구카이(空海)이다.

그의 집안은 사누키국을 세운 유력한 가문이고 어머니는 헤이안시대 고승을 배출한 집안출신이었다.

18세 때 교토(京都)의 대학에 입학하여 오카다 등에게 <상서(尙書)><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유교 경전과 중국사서를 배웠다.

어느날 한 승려를 만나 ‘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을 백만 번 외면 모든 가르침의 참뜻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출가하였다.

20세 때 곤조(勤操)에게 출가하였고, 24세 때는 <삼교지귀(三敎指歸)>라는 책을 저술하여 불교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구카이가 수행한 불교는 율령국가 체제를 수립해간 불교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30세 무렵에는 당나라로 건너가 청룡사의 혜과(惠果)를 만난 구카이는 학문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최고의 전법자가 되었다.

혜과는 그에게 관정(灌頂)을 베풀고 요가 등을 전수한 뒤 밀교를 일본에 전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구카이는 귀국하기 전 여러 가지 서적과 불상, 만다라, 법구, 혜과의 유물 등 밀교와 관련된 자료를 많이 모았다.

이들 자료는 뒤에 사이초(最澄)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일본 천황의 신임을 얻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귀국 후 밀교 경전을 널리 전파하고 이른바 동밀(東密) 일파를 개창하였으며 고야산[高野山]에 공고부사[金剛峯寺]를 세우고 교토의

도사(東寺) 건립에 참여하는 등 진언종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62세의 나이로 공고부사에서 입적하였다.

그가 일으킨 진언종은 밀교를 받아들여 정신과 육체의 합일을 강조하고 현세에서의 이익을 인정하여 당시 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부동명왕(不動明王)은 불교 진언종에서 받드는 오대존명왕의 하나로 부동여래사자(不動如來使者)라고도 한다.

오대존명왕은 곧 중앙의 부동, 동방의 항남세, 남방의 군다리, 서방의 대위덕, 북방의 금강야차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부동명왕은 중앙에 있으며 대일여래가 일체의 악마를 항복시키려고 변화하여 분노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원명은 아시알라라 하는데, 힌두교 시바신의 이명을 불교가 그대로 채택한 것으로 불교에서는 이 명왕에게 사자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후에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사자로써 번뇌의 악마를 응징하고 밀교 수행자들을 보호하는 왕으로 간주되었다..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는 삭(索)을 쥐었으며, 부릅뜬 눈과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분노신(忿恕身)을 하고 있다.

맹염(猛炎)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악마를 박멸하는 위력을 나타낸 것이고, 동자형(童子形)의 몸 모양은 여래의 동복(童僕)이 되어

밀교 수행자들의 봉사자가 되려는 서원(誓願)에 따른 것이다.

조상(造像)은 히말라야 산록을 뛰어다니는 목동을 모델로 했는데, 불상 중에서 가장 인도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명왕부(明王部)의 대표격으로서 7세기 후반 <大日經>이 성립되자 밀교 오대명왕의 주존(主尊)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일제시대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 사이에는 유달산신사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는데, 지금은 '사'는 지워지고, '유달산신'만 남아있다..

 

일등바위로 오르는 돌계단...

 

일등바위 아래의 일제흔적들..

 

해발 228m의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

오랜 옛날 사람이 죽으면 이 일등바위(율동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이동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은 3마리의 학(삼학도)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을 타고가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영달산(유달산)에서

조금 떨어진 거북섬(목포와 압해도 사이에 있는 섬)에 있는 거북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영산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유달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영산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일등바위에서 바라본 풍경..

서쪽으로는 고하도 용머리와 목포대교 너머로 장자도, 그 뒤로는 달리도, 안좌도가 차례로 바라보인다..

 

서북쪽으로는 이등바위 너머로 율도와 압해도..

 

북동쪽으로는 목포 구도심 너머로 압해대교, 봉수산, 양을산, 그 너머로 멀리 영산지맥이 하늘금을 긋는다..

 

북동쪽으로는 목포시가지와 입암산이 바라보이고, 입암산 너머로 하당신도심과 남악신도심..

구도심 중심부인 구 중앙공설시장에 들어선 대한주택공사의 31층 주상복합 쌍둥이빌딩도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은 목포항과 삼학도, 영산강 하구둑이 바라보이고 멀리 영암 은적산이 희미하다..

 

남동쪽은 목포항, 그 뒤로 영암 대불부두와 갈마산..

 

남쪽은 고하도 너머로 목포 신항, 그리고 멀리 영암 삼호중공업..

 

일등바위에서 내려서면 안내도..

 

석양의 고하도 용머리와 목포대교, 그 뒤로 장자도, 좌측의 달리도, 우측의 율도가 바라보이고, 멀리 안좌도가 희미하다..

 

일등바위에서 내려서 이등바위를 향해 가다보면 흔들바위가 보인다.

급하게 경사진 암반 끝에 있어 실바람만 닿아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흔들바위는 장정 대여섯명이 올라갈 수 있는 평평한 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올라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재미도 뛰어나다..

 

또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커다란 바위면을 직접 깎아 계단을 만들었는데 주변 바위들과 어울림이 한 폭의 그림 같다..

 

흔들바위를 지나 내려서면 바위를 돌아서 지나는데 돌아가기 전이나 돌아간 후에 바위를 올려다보면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바위의 끄트머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포효하는 남자의 얼굴로 보인다..

 

등바위가 다가온다..

 

얼굴바위를 지나면 너른 공터의 보리를 털어 말리던 곳, 보리마당..

오래전 목포 인근의 섬사람들은 보리나 벼 등을 수확한 뒤 목선에 바리바리 실어 목포까지 날라야 했다.

섬엔 변변한 도정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보리는 정미소 가기 전, 그리고 도정을 마친 뒤 각각 볕에 말려야 한다..

섬 주민들이 정미소가 있던 도심 외곽에 며칠씩 머물다 보니 자연스레 이들을 상대로 국밥집과 여관, 시장 등도 생겨났다..

지금은 명맥만 남은 백반거리, 팥죽거리 등도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조성됐던 셈이다.

흔히 다순구미와 보리마당이 같은 지역인 것처럼 표현되곤 하지만, 사실 별개의 마을이다.

아리랑고개(옛 말태기재)를 경계로 윗자락은 다순구미, 아래쪽은 보리마당이다..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사이에 있는 소요정(逍遙亭)...

1966년에 세워진 소요정은 평지처럼 산책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등산객들에게는 다도해 전망대라고 불린다.

맑고 잔잔한 바닷물과 점점이 흩어진 푸른 섬들로 유명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이곳에서 목포해양대 쪽을 바라다보면 고하도와 압해도를 위시한 조그마한 섬들이 펼쳐져 있다.

다도해 멀리 저녁해가 유달산너머로 빠져들 때면 저녁 노을은 갖가지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그리고 난 공원이 있는 우측으로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이등바위가 있는 쪽으로는 목포의 북항이 바라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무안의 망운과 지도가 바라보인다고 한다..

 

이등바위에 오르면서 바라본 소요정과 일등바위..

 

전망바위에서 바라보면 목포해양대학교와 고하도의 끝자락 용머리, 그리고 목포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목포대교(木浦大橋)는 국도 제1호선의 자동차 전용도로 교량으로 죽교동과 유달동의 고하도, 허사도를 연결한다.

목포신외항과 서해안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목포의 관문으로 2012년6월29일에 개통된 다리이다.

대불산단~고하도,허사도(목포신외항)~목포대교~목포IC~죽림 분기점~남악IC~서영암IC~대불산단을 잇는 목포외곽순환도로이다.

목포대교는 사장교 형식이지만 세계에서 두 번째, 한국에선 최초로 시도된 3웨이 케이블공법이란 고난이도 공법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대교역사의 새로운 획을 긋고 있다..

 

이등바위로 오르는 돌계단..

 

이등바위는 유달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일등바위에서 심판받은 영혼이 이 바위로 이동하여 잠시 대기한다 하여 ‘이동바위’라고도 부른다.

이등바위는 동그란 탑처럼 보이는데 시내쪽에서 바라보면 마부가 말을 끄는 모습으로 ‘독승바위’라고도 부른다..

이등바위는 일등바위의 강렬한 인상이나 웅장함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멀리서 보면 둥그스름한 젖무덤처럼 솟아있는 봉우리를 중턱 곳곳에 자란 작은 나무들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하다..

 

전면으로 다도해의 잔잔한 물결 위를 흐늘거리듯 헤엄치는 거대한 고하도의 끝자락 용머리와 목포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등바위에서 다도해의 색다른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동그란 바위가 하나 얹혀 있는데 수도정진하는 수도자의 머리모습을 닮았다하여 ‘수도바위’라고 부르며, 애칭으로 ‘똥바위’라고도 한다.

수행정진하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은 마당바위에서 봐야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꼭 똥덩어리처럼 보인다..

 

이등바위의 정상부는 제법 널따랗고 평평하여 사람들은 신선들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말한다..

 

일등바위를 배경으로..

 

 

 

이등바위에서 내려서 어민동산 방향으로 내려선다..

 

가파른 돌계단 길을 내려서면..

 

전면으로 조망이 트여 석양의 목포대교가 바라보인다..

 

당겨본 목포해양대학교와 목포대교..

 

잠시 내려서면 유달산둘레길과 합류한다..

 

유달산 서쪽에 있는 코끼리 바위 암장..

높이 25m, 폭 60m의 화강암으로 바다와 인접해 있고, 암질은 약하지만 손가락 홀드와 포켓홀드가 발달해 등반하는데 무리가 없다.

코끼리암장은 목포의 나무나루산악회에서 루트개척을 했는데, 목포 클라이머들에게 인기가 있다.

 

봉후샘과 봉후쉼터에 이른다.. 물한모금 들이키고 출발한다..

 

호젓한 숲길을 따라가면 갈림길 쉼터를 지난다..

 

새롭게 개설된 유달산 둘레길..

 

바위틈에 피어난 철쭉도 아름답다..

 

봉후샘에서 아리랑고개로 가는 길은 다도해를 바라보며 걷는 숲길이다..

 

예전과는 또다른 유달산 둘레길..

 

새롭게 개설된 둘레길을 따라 낙조대에 이른다..

 

 

 

좋은 곳에 자리한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목포대교와 고하도, 비치호텔과 올망졸망한 섬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해질녘의 풍경이 아름답다..

 

 

 

신안비치호텔과 고하도..

 

아름다운 석양이 물들고 있다..

 

유달산 정상..

 

오가는 화물선..

 

새롭게 조성된 둘레길을 따라간다..

 

곳곳에 마련된 둘레길 쉼터..

 

아리랑고개..

 

능선쉼터를 넘어서면..

 

수풀 사이로 목포대교가 바라보인다..

 

아리랑고개..

 

고갯마루 도로에 내려선다..

 

아리랑고개에서 바라본 목포대교..

 

석양이 물들고 있다..

 

유달산 둘레길은 옛 수원지둑을 따라가는 나무 데크로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쌓은 목포시민의 제2수원지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다...

 

길은 다시 유달산 기슭의 온금동에 접어들어 이어간다..

 

길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목포의 원도심을 보며 편안하게 산보하듯이 걸을 수 있어서 더 좋다. 일제시대 건물들도 눈에 띤다..

 

문이 닫힌 학암사를 지난다..

 

학암사를 지나 돌담길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마을을 빠져나와 숲길로 오르면 유달산휴게소..

 

어둠이 내린 둘레길을 따라 목포시사로 향한다.. 

전라남도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된 목포시사(木浦詩社)..

이곳은 본래 1890년에 하정 여규형 등이 건립, 유산정(儒山亭)이라 하며, 문인들에게 시문을 가르치고 백일장 등을 주도하던 곳이다.

1920년에 무정 정만조(鄭萬朝)가 재확장하여 유산사로 개명하고, 1932년에 중수하였으며, 1937년 목포시사를 발족하였다.

목포시사는 시인묵객들의 단순한 모임을 넘어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유림의 문학결사단체였다.

특히 한말의 유학자 정만조는 이곳에 머물며 퇴폐한 유풍을 바로잡고 학풍을 진작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하면 목포시가지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라이온스 동산의 정자도 어둠에 묻히고..

 

어둠이 짙어가는 유달산..

 

주차장에 돌아와 마무리한다..

 

오는 길에 목포시가지 야경..

 

 

  구름같은 내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