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기행] 남방제일선찰(南方第一禪刹) 지리산 천은사(泉隱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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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기행] 남방제일선찰(南方第一禪刹) 지리산 천은사(泉隱寺)

by 정산 돌구름 2014. 12. 6.
남방제일선찰(南方第一禪刹) 구례 지리산 천은사(泉隱寺)..

 

○ 탐방일 : 2014년 12월 3일 (수)

○ 소재지 : 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 천은사(泉隱寺) 소개

  남방제일선찰 천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로 꼽히고 있다.

  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펼쳐지고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다.

  산문과 일주문을 지나 독특하고 운치있는 수홍문을 건너 절을 찾는 즐거움은 아주 특별하다.

  지리산의 빼어난 산수와 풍광 그리고 그 속에서 불법의 진리를 만나는 것은 가람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3년(828년)에 인도의 덕운

  (德雲)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

  <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

  그런데 일제시대에 간행된 구례읍지에는 이 기록에서 창건주 연기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별호인데 이것을 유래로

  잘못 해석하여 도선국사 이후의 스님인 덕운을 창건주로 왜곡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도선국사가 창건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유학시 일행선사로부터 3천8백 비보사찰을 중건 혹은

  창건토록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라 조정에 긴밀히 모의하여 신라 국토 곳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천은사도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볼때 인근 화엄사의 창건연대(544년)와 비교해 볼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기 보다는

  중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 없어 그 시기와 유래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은 더욱 번성하여 충렬왕 때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수도자가 진리의 광명을 터득하는 수행처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후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610년(광해군 2년)의 일이다.

  당시 절의 주지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끌어 나갔다.

  뒤이어 1679년(숙종5년)에도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이로부터 절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

  1715(숙종41년)에는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고, 1749년(영조25년)에는 칠성탱화를 조성하였다.

  1774년(영조50년) 5월에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혜암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혜암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주문이 바라보인다..

 

천은사 일주문(一柱門)..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건물로 산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써 절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통과해야 하는 문이 일주문이다.

이 문은 기둥이 일직선상에 나란히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 하는데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져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적인 번민과 욕망을 벗어버리게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로서 일직선 기둥 위에 지붕만을 올린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 일심(一心)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즉 일주문을 기준으로 해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루어지며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로 나누어진다.

 

일주문의 지붕은 대개가 다포계의 맞배 지붕을 하고, 보통 소속산문과 사찰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을 걸어 사찰의 소속과 격을 알린다.

천은사 매표소가 있는 산문을 지나 300m를 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천은사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끝에 천은사 일주문이 있다.

천은사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아다. 천은사 일주문은 그 주변의 풍광과 어울려 절경으로 이름이 나 있다.

일주문 현판(90x114cm)은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가 마치 물 흐르듯 수체(水體) 글씨로 썼다.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서부터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았다는 신기한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일주문 아래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현판글씨에서 신운(神韻)의 물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일주문 옆으로는 낮은 담장을 둘러 공간감을 절묘하게 살리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로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보통 피안교라 부르고 있다.

피안이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하는 고해의 이쪽 언덕 건너편에 있는 저 언덕을 뜻하는 말이다.

그곳은 아무런 고통과 근심이 없는 불·보살의 세계로서 피안교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를 뜻하고 있다.

피안교는 세속의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버리고 이제금 진리와 지혜의 광명이 충만한 불·보살님들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리 위에 세워진 2층 누각인 수홍루(垂虹樓)...

수홍루는 정면 1칸, 측면 한칸인 2층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졌다.

계곡과 어우러진 누각은 천은사를 대표하는 경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릅답다.

정면 현판의 글씨는 염제(念齊) 선생의 글씨이다.

 

수홍루에서 바라본 천은저수지..

 

감로천..

 

수홍루를 지나면 위로 오르는 계단이 나오고 그 끝에 정면 3칸, 옆면 2칸의 천왕문(天王門)이 서 있다.. 

 

천왕문(天王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모셔놓은 전각으로 수행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며 속세의 잡귀가 불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또한 천왕문은 수행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는 불가의 세계인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천왕의 궁궐을 형상화하여 세워졌다.

천왕문 앞에는 사찰에 따라 금강문을 세우기도 한다.

천왕문은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이것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워졌다.

사천왕은 33천중 욕계 6천의 첫번째인 사천왕천의 지배자로서 수미의 4주를 수호하는 신으로 호세천이라 하며,

수미산 중턱 4층급을 주처로 하는 신이다.

불가(佛家)에서 사천왕천은 욕계6천의 첫번째 문이자 수미산 세계이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 이르면 좌우에 해와 달의 세계가 빛나고 그 위로는 수미산 정상부 도리 33천의 하늘이 펼쳐진다.

사천왕은 이러한 수미산의 4주에 위치하면서 각각이 세계를 수호하고 있다..

 

지국천왕은 건달바와 부단나 등의 신을 거느리고 동쪽 하늘을 수호하며, 비파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착한 자에게 복을 악한 자에게 벌을 준다.

증장천왕은 구반다와 폐려다라 불리는 신을 거느리고 남쪽하늘을 수호하며, 손에 칼을 들고 사랑의 감정을 관할하며 겨울을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광목천왕은 용과 비바사라는 신을 거느리고 서쪽 하늘을 수호하며, 

손에 용과 여의주 또는 견색을 들고서 인간의 노여움의 감정을 다스리고 여름을 주관하고 있다고 한다.

다문천왕은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북쪽하늘을 계절적으로는 봄을 관장하고 있다고 한다.

손에 보탑이나 깃대를 들고 있으며 즐거움의 감정을 관할하며 겨울을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석등과 보제루..

 

보제루 오른쪽으로 도량의 중정(中庭)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오른쪽 축대 위에 운고루(雲鼓樓)가 있다..

 

뒤면은 범종각(梵鐘閣)으로 되어있다..

보통 루(樓)형식으로 예불시에 치는 사물이 걸려 있으며 흔히 범종루(梵鐘樓) 또는 종고루라고도 한다...

 

이 종각에는 예불이나 행사시에 치는 사물(四物-법고·운판·목어·범종)이 있는데 조석 예불시에 연주하여 그 소리를 통해서 세상에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

 

범종(梵鐘)은 절에서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나 때를 알리기 위해서 치는 큰 종으로, 시대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즉 ‘범종’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사찰에서 쓰는 종이란 뜻으로, 청정한 불사에 사용하는 종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범종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구이다.

즉 범종의 소리는 우주의 모든 중생의 영혼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하여 울리는 대자대비의 음성인 것이다.

한국범종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신라양식과 고려양식, 조선양식으로 약간씩의 양식변천을 이루었다.

신라종과 고려종의 양식은 순수한 우리 선조의 창의력에서 이루어진 형식인데 반하여 불교 배척시대였던 조선조 범종 양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한·중 혼합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다시 신라종 형식이 한국종의 절대적인 양식으로 널리 유행하여 조성되고 있다..

 

법고(法鼓)는 군사적 용도가 사찰로 유입되어 군중을 모으는 불구로 이용되었다. 북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듯 불법을 중생들에게

널리 전하여 세간에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널리 전하여 세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이다.

법고의 소리에는 지상의 모든 축생을 제도하는 불법의 의미가 담겨있다.

또한 불법이 널리 세간에 전해지는 것을 북소리가 퍼지는 것에 비유한 것이며, 교법이 중생의 번뇌망상 또는 집착과 오욕의 마군을

없애는 것이 마치 진을 치고 있던 군대들이 북소리가 울리면 전진하여 적군을 무찌르는데 비유하였다.

또한 선종사찰에서는 구조 법당의 동북쪽에 달아 놓고 주지의 상당(上堂)과 소침, 보설, 입실 등의 법요의식에 사용한다.

근래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침, 저녁 예불 때와 법요식을 거행할 때에 법고를 친다..

 

운판(雲版)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구름 모양의 법구로써 소리를 내어 허공에 날아다니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모양에 따라 화판 또는 장판이라고 불렀다. 선종사찰에서는 재당이나 부엌에 매달고 대중에게 끼니를 알릴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죽이나 밥을 끓일 때에 세 번 침으로 화판, 끼니때에 길게 침으로 장판이라고도 한다..

목어(木魚)는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하여 배부분을 파내고 안쪽의 양벽을 나무채로 두들겨 소리를 내는 법구이다.

소리로써 물속에 사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물고기의 모습에서 점차 머리 부분만 용의 모습으로 하여 용두어신(龍頭魚身)의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편 목어는 물고기가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처럼 수행에 힘쓰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보제루(菩提樓)

천왕문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면 정면으로 2층으로 지어진 누각이 당당하게 서 있는 보제루의 모습이 보인다.

보제루란 대중의 법요식(法要式) 집회소로 사용하는 건물로 후면만 중2층으로 구성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강당형식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형식으로 꾸몄다.

현판 글씨는 단아한 보제루와 잘 어울리고 있는데, 이 현판은 1934년 호남명필 이삼만(李三晩)이 썼다.. 

 

보제루의 구조는 막돌초석위에 원통형(일부는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운 5량가이다.

공포는 행공첨차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한 2익공식이며, 공포 역시 연봉조각이 올려져 있는 등 화려하다..

 

회승당(會僧堂)

맞배지붕에 ‘ㄷ’자 모양의 건물로서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전면 마루 끝에는 범종이 있는데, 몸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1778년(정조2년)에 봉안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문은 부조(浮彫)로 된 부분과 점각(點刻)으로 된 부분이 있으며 1778년에 해당되는 건륭 연호는 부조로 되어 있고

점각 부분에도 1880년(고종17년)에 해당되는 연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1880년에 약간의 보수가 있었던 듯하다.

명문으로는 그 밖에도 ‘풍진명(豊鎭溟)’ 및 ‘남원천은부원중종(南原泉隱府院中鐘)’ 등의 글이 있다.

종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그만 총알구멍이 있는데, 6.25 때 이곳 지리산의 형편이 어떠했는가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설선당(說禪堂)

종고루 바로 다음 'ㄷ'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6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지금은 주지실과 종무소 그리고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고 있다..

 

주 출입구를 중정쪽에 두지 않고 그 반대편에 두어 본전공간의 성스러움을 배려했고 아울러 개개 건물의 기능성도 최대로 살렸다.

구조는 막돌초석형 두리기둥을 세운 2익공양식이며 부분적으로 편리하게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맞은편의 회승당과 함께 퇴색된 기둥나무색과 아름다운 기와의 곡선으로 중정을 아늑하게 해주어 찾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명부란 염마왕이 다스리는 유명계 또는 명토(冥土)를 통틀어 이르는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이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 살면서 미륵불이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용화삼회를 열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고,

시왕은 128개 지옥을 나누어 다스리는 명계의 왕이다.

본래는 지장전과 시왕전이 각각 독립된 전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豫修十王生七經)>이 편찬된 이후

종래의 현세 기복신앙이 내세 구원신앙으로 바뀌면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고려말 이후 지장전과 시왕전이 명부전으로 결합되었다..

 

천은사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총높이 134㎝(머리 높이 38㎝·무릎 높이 22㎝), 어깨 폭 67㎝, 무릎 폭 93㎝에 이른다.

지장보살의 특징인 민머리를 하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두 어깨를 덮고 있다.

가슴 쪽 옷자락은 'U'자형으로 늘어져 있고, 군의자락은 결가부좌를 한 무릎 밑을 감고 돌아 파상문(물결무늬)을 이룬다.

수인은 구품수인을 결하고 있다.. 

 

명부전은 대개 법당 오른쪽 뒤에 있는데, 사찰내의 다른 전각들에 비해 격이 떨어지므로 건물의 크기나 양식에서 차이가 난다..

 

 

전각내의 불단은 대개 ㄷ자형이며 가운데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협시로 지옥을 출입한 승려 도명존자(道明尊子)와

전생부터 지장보살과 인연을 맺었다는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두며, 그 좌우에 명부시왕을 둔다..

 

성적문(性寂門)..

 

극락보전(極樂寶殿)..

보제루 맞은편에 있으며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불과 그 협시보살들을 모신 법당이다.

사찰에 따라서 미타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수광전, 극락전이라고도 하는데 천은사는 대웅전 대신 극락보전이 사찰의 주된 전각이다.

극락보전은 1774년 혜암선사가 중수하면서 세운 전각으로서 조선 중기 이후의 전통적 다포계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현재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직한 방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민흘림의 둥근 기둥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현판 및 상량문으로는 1886년(고종23년)의 <개금불사동참대시주>와 근래의 <법당상량문>이 있고, 그밖에 동종과 괘불함도 있다.

 

극락보전 앞에는 최근에 조성한 석등이 있다.. 

 

 

극락보전은 앞면3칸, 옆면3칸의 팔작지붕이며, 민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는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를 구성하였는데

포작은 외3출목, 내4출목의 다포양식으로 상부에는 계두와 연봉이 있고 중앙칸 기둥 위로는 봉두장식이 있는 등 전반적으로 화려하다.

주간포(柱間包)는 각 간 모두에 2구씩 배치하였고, 가구는 5양구조로서 종량 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창호는 정면 3간 모두 3분합문으로 중앙칸은 소슬빗꽃살, 양 협간은 정자살과 빗살(중앙부)양식으로 되어 있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그분의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진다..

 

불단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 대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상이 있고 그 뒤에 보물 제924호인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밖의 불화로는 1776년(영조52년)에 봉안된 삼장탱화, 1833년(순조33년)에 봉안된 신중탱화, 후불벽화로서 수월관음도가 있다.

 

천은사 극락보전 아미타후불탱화(보물 제924호)..

세로360㎝, 가로277㎝ 크기의 삼베바탕에 짙은 녹색과 적색으로 채색되었는데, 그 구도와 기법등이 매우 훌륭하고 보존 상태가 좋다.

제작은 1776년(영조52년)에 극락보전을 지금의 모습으로 중수하면서 신암(信庵)스님을 비롯한 14명의 금어 스님이 조성하였다.

구도는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광경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놓은 듯 아미타불을 비롯하여 8대보살, 10대제자, 사천왕,

호법신중 등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더욱이 각각의 불보살과 신중 등에는 옆에 그 명칭이 적혀 있어 불화를 조성한 화사(畵師)의 세밀한 배려와 독창성을 엿보게 된다.

곧 중앙 아미타불의 광배에는 ‘광명보조수명난사사십팔대원무량수여래불(光明普照壽命難思四十八大願無量壽如來佛)’이라 적었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에도 각각 ‘문성구고(聞聲救苦)’, ‘섭화중생(攝化衆生)’이라는 설명을 붙여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고

모든 이들을 교화시킨다는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본존 무량수불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금강장(金剛藏)보살과 제장애(除障碍)보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짝을 이루고 있다.

관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이들 8대보살은 곧 「8대보살만다라경」등의 밀교 경전에서 나온다고 한다.

또한 화면 하단부의 좌우로는 다양한 지물을 지닌 사천왕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마귀를 물리치는 험악한 인상이 아니라

약간은 희극적인 모습을 지녀 친근감을 갖게 한다.

아미타불의 대좌 아래로는 ‘금리불존자(金利佛尊者)’라는 비구가 무릎을 꿇고 법문을 청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비구가 바로 10대제자 가운데 한분인 사리불존자이다.

이처럼 천은사 아미타후불탱화는 복잡한 극락세계를 모두 나타내면서도 . 각각의 불보살들에는 광배의 한쪽에 붉은색의 사각형 칸을 만들어 흰글씨로 각각의 존명을 적고 있어서 아미타불화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중앙의 본존은 화려한 금색 꽃무늬 단이 대진 붉은색 가사를 입고 있는데 가사에는 금색무늬가 일정하게 그려져 있다.

얼굴은 넓고 눈은 가늘며 입은 작고 입주변과 턱에 수염이 표현되고, 머리는 나발로 육계가 적고 중간에 초승달 같은 중간계주가 있다.

이러한 얼굴의 묘사는 다른 보살상들에도 거의 흡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여러색선의 원형 두광과 신광을 지니고 있는데 두광은 진한 녹색으로 처리하고 신광은 밝은 녹색을 사용하고 있다.

신광에는 향우측에 「광명보조수명난사사십육대원무양수여래불(光明普照壽命難思四十六大願無量壽如來佛)」이라고 씌여있어서

아미타불 중 무량수불임을 알 수 있다.

대좌 앞에 향우측 보살은 화려한 보관과 영락장식을 갖추고 정면을 향해 서있는데 보관에는 화불이 그려져있다.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어서 관음임을 알수 있는데 두광에 문성구고관세음보살(門聲救苦觀世音菩薩)이라고 되어 있다.

향좌측의 보살은 관음과 흡사한 얼굴에 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보관에 정병이 그려져 있고 손에는 경책이 들려져 있는 대세지보살이고

두광에 섭화중생대세지보살(攝化衆生大勢至菩薩)이라고 되어있다.

관음의 윗쪽으로 합장을 한 세보살은 문수보살, 금강장보살, 미륵보살이고 대세지보살의 윗쪽으로 합장을 한 보살은 보현보살,

연봉우리를 들고 있는 보살은 제장대보살이며, 승형머리에 석장을 든 보살은 지장보살이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외측에는 각각의 지물을 들고 둥근 눈과 거친 수염을 지닌 사천왕이 배열되어 있다.

향우측 하단에 칼을 비스듬하게 잡고 있는 동방천왕, 그 위로 비파를 들고 있는 북방천왕, 향좌측 하단에 여의주와 용을 잡고 있는

남방천왕, 그 위에 보탑과 창을 들고 있는 서방천왕이 자리잡고 있다.

8대제자는 보살들의 윗쪽에 좌우 네분씩 거의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각각의 명칭은 없다.

특이하게 대좌 아래쪽에 한 비구가 무량수불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데 그 두광에 사리불존자(舍利佛尊者)라고 적혀있다.

사리불존자는 부처님의 10대제자중의 한 분이어서 이 불화에는 9분의 제자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화면의 좌우 하단에는 불화기가 적혀있지만 현재 봉안되어 있는 상태로는 조사가 불가능한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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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진전(應眞殿)..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한다.

때로는 아난과 가섭 대신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羯羅菩薩)을 안치하여 삼세불이 이루어지게 배열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함께 안치되는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아라한(阿羅漢)들 중 말세(末世)의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성자들이다.

이들이 일찍이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크게 신봉되어 나한신앙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응진전에 봉안된 것이다.

후불탱화(後佛幀畫)로는 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16나한도가 많이 봉안된다.

 

 

 

팔상전(八相殿)..

관음전 바로 옆에 정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서 1774년 무렵에 처음 세워진 건물로 알려져 있다.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단독으로 모셔져 있으며, 그 밖에 근래에 봉안된 영산후불탱화 및 팔상도 4폭이 있다.

팔상전은 최근에 중건된 전각으로 막돌로 석축겸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우고 포작을 올렸다.

공포형식은 내, 외 2출목의 다포양식으로 쇠서 단부를 날카롭게 처리하였고, 주간포(柱間包)는 각 간 모두에 1구씩 배치하였다.

가구는 양측면으로부터 충량을 걸은 5양형식이다..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인 여덟 장면을 탱화나 존상으로 모신 곳인데, 팔상 탱화를 봉안하고

달리 존상을 모실 경우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좌협시에 미륵보살, 우협시에 제화갈라보살을 모신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에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부처님이 되실 분이고,

제화갈라보살은 본래 정광불로서 석가모니불이 수행자이던 시절 석가모니불이 장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신 부처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더불어 이 두 협시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상징하고 있는 이른바 시간삼세불인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열반까지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그림으로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도솔래의상(도솔에서 내려오는 장면) : 석가모니부처님이 호명보살로 도솔천에 머물다가 마침내 사바세계로 출현하게 되자,

카필라국의 정반왕과 마야왕비의 태자로 탄생하여 도솔에서 내려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는 흰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있는 마야부인의 모습, 상(相)을 잘 보는 바라문에게서

꿈의 해몽을 듣는 왕과 왕비의 모습 등이 주 내용으로 묘사된다.

이 때 바라문이 이르기를 “반드시 태자를 잉태할 것이며 훗날 출가를 하면 정각을 이루어 삼계중생을 제도할 것”이라 하였다 한다.

② 비람강생상(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장면) : 여기에서는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따뜻한 봄날에 마야부인이 궁중을 떠나 궁녀들과 룸비니 동산에 올라 무우수(無憂樹) 꽃가지를 붙들고 서서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낳는 장면, 하늘에서 제석천왕이 비단을 가지고 내려와 태자를 받으며 모든 천왕들이 온갖 보물을 공양하는 장면, 태자가 땅에서 솟아

오른 연꽃을 밟고 일곱 걸음을 움직이며 한손은 하늘을 또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치는 장면,

아홉마리의 용이 깨끗한 물을 토하여 태자를 목욕시키는 장면, 태자를 가마에 태워 궁궐로 돌아오는 장면, 아지타 선인을 불러 관상을

보이는 장면 등이 묘사된다.

③ 사문유관상(四門밖에 나가 관찰하는 장면) : 태자가 사방의 문으로 나가서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이

네 가지로 묘사된다. 동문으로 나가서는 노인을 보고 사색하는 장면, 남문 밖에서는 병자를 보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 서문으로

나가서는 장례행상을 보고 죽음을 절감하는 장면, 북문 밖에서는 사문을 보고 깨달아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 등이 표현되고 있다..

 

④ 유성출가상(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 태자가 정반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태자를 감시하던 야수부인과 시녀 그리고 오백 장사들이 잠에 취해 있는 장면, 태자가 마부 차익에게 궁성을 뛰어 넘을 것을 지시하는

장면, 말을 탄 태자가 성을 뛰어 넘으니 제석천이 호위를 하며 하늘에 오색광명이 환하게 비치는 장면, 머리카락을 자른 태자가

사냥꾼의 옷과 자신의 비단도포를 바꾸어 입는 장면, 마부 차익이 태자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태자의 금관과 용포를

가지고 궁궐로 돌아가는 장면, 정반왕과 마야부인 그리고 태자비가 태자의 의관을 받고 슬피우는 장면 등이 주로 묘사된다.

⑤ 설산수도상(설산에서 수도하는 장면) : 설산에 들어간 태자가 대신들을 보내어 환궁을 종용하는 정반왕의 권청을 물리치고

신선들과 함께 수도에 정진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정반왕이 교진여(橋陣如) 등 5인의 신하를 보내어 태자를 환궁하게 하는

장면, 이들이 태자에게 돌아가기를 간청하는 장면, 환궁을 거절한 태자에게 궁중에서 양식을 실어 보내는 장면, 6년 고행의 무상함을

깨우친 태자에게 목녀(牧女)가 유미죽을 바치는 장면, 제석천왕이 못을 만들어 목욕을 하게 하고 천인이 가사를 공양하는 장면,

태자가 수도하면서 모든 스승을 찾는 장면, 풀베는 천인에게서 길상초를 보시받는 장면 등의 많은 내용이 그려지고 있다..

 

⑥ 수하항마상(보리수 아래서 마구니를 항복시키는 장면) : 태자가 마군들의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고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진다. 마왕 파순이 마녀로 하여금 부처님을 유혹하게 하는 장면, 마왕의 무리들이 코끼리를 타고 부처님을

위협하는 장면, 마왕이 80억 마군을 몰고와 부처님을 몰아내려고 하나 창칼이 모두 연꽃으로 변하는 장면, 지신(地神)이 태자의

전생공덕과 계행을 마왕에게 증명하는 장면, 마군들이 작은 물병을 사력을 다해 끌어내려고 하나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히려

돌비(石 雨)와 바람이 쏟아져 80억 마군들을 물리치는 장면, 드디어 마왕의 무리들이 항복되고 부처님과 모든 천신·천녀·군중들의

수희 찬탄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⑦ 녹원전법상(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장면) : 무상전각을 이루신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최초로 불법을 설하시는 장면들이

상·하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상단에는 노사나불의 모습을 보이신 석가삼존이 처음으로 화엄경을 설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하단에는 세존께서 녹야원에 이르러 교진여 등 5인의 비구에게 고·집·멸·도의 사제법문을 설교하는 장면, 수달다 장자가 아사세태자의

동산을 사서 기원정사를 건립하고자 하는 장면, 흙장난을 하고 놀던 어린이들이 부처님께 흙을 쌀로 생각하고 보시하자 부처님이

이것을 탑으로 바꾸는 장면 등이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⑧ 쌍림열반상(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시는 장면) : 80세가 되신 부처님이 이월 보름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시고 열반에 드시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사라쌍수 아래서 길게 누워 열반에 드신 부처님과 그 주위로 비탄에 잠겨있는

사부대중과 천룡 팔부중의 모습들, 노가섭이 크게 슬퍼하자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 보이시는 장면, 아나율존자가 하늘에 올라가

부처님의 열반소식을 전하자 마야부인이 천녀들과 허공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꽃을 뿌려 공양하는 장면, 관이 성밖으로 저절로 들려

나가는 장면, 다비를 하니 사리가 비오듯 쏟아지는데 이 사리를 차지하려는 여덟 나라의 왕들에게 바라문이 골고루 나누어주는 장면

등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관음전(觀音殿)..

극락보전 뒤로 계단을 올라가면 여러 전각 중 가운데 있는 전각이 관음전이다. 대승불교의 수많은 불·보살 가운데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관음전은 원통전, 대비전, 보타전 등으로 부르기도하며,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그 협시로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신다.

그 뒤에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나 수월관음도 혹은 아미타후불탱화를 봉안한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 관세음자재라고도 번역되며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도 부른다.

관세음보살은 늘 세간의 소리를 관하면서 중생들의 발원이 있으면 어느 곳이든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베푸신다.

또한 선업을 많이 닦은 이의 임종시에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찾아와 극락으로 인도해가는 분이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에게는 그 성격에 따라 다른 많은 별칭들이 붙여졌다.

중생들의 온갖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뜻에서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도 하고, 대자대비를 근본으로 한다는 뜻에서 대비성자

(大悲聖者)라고도 하며, 세상을 구제하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구세대사(救世大士)라고도 한다.

6관음이란 성(聖)관음, 천수천안관음, 마두관음, 십일면관음, 준제관음 혹은 불공견색관음, 여의륜관음을 말하는데

이 가운데 성관음이 본신이고 나머지는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시현(示現)한 변화신들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체로 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데, 연꽃은 본래 중생이 갖추고 있는 불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십일면의 얼굴을 지닌 관세음보살은 자비상·진노상·대폭소상등 중생을 제도할 때마다 여러 형태의 얼굴을 말한다..

 

관음전의 후불탱화에는 주존이 관세음보살이 되고 그 협시로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등장한다.

관음탱화 역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모셔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성관음과 십일면관음, 천수천안관음 등을 들 수 있다.

십일면관음 보관에는 11면의 얼굴이 묘사되어 있는데, 전후좌우 10면의 얼굴은 보살의 수행단계인 10지를 상징하고 맨위의 얼굴은

부처님의 상호로서 부처님의 과위(果位)를 나타낸다.

한편 여러 가지 인간의 재앙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구제의 의지를 담고 있는 관음상이 바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라 할 수 있다.

천수천안관세음은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가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수천안은 정상적인 두 손 이외의 손들을 마치 광배처럼 등 뒤에 원형으로 안배하고 각각의 손바닥 위에 눈을 그려 천안을 표현한다..

 

 

 

 

  

 

 

 

 

 

부도전(浮屠田)

부도는 부두(浮頭), 불도(佛圖), 포도(蒲圖)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된다.

어원적으로는 부처님을 뜻하는 인도의 옛말 붓다(Buddha)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탑을 뜻하는 스투파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부도라고 하면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부터는 주검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장골(藏骨)이라는 불교식 장제가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선종이 크게 일어남에 따라 스님들의 지위가 높아져 불탑처럼 스님의 부도도 많이 건립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나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경과 불상 등 법신사리를 봉안한 불탑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에 건립하는 반면에

승탑인 부도는 사찰 주변의 호젓한 곳에 석비와 함께 조영되었다..

 

부도는 불탑과 구분하여 단층의 건물 모양을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부터는 석등이 함께 조성되기도 하였다.

부도는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과 종형 또는 복발형의 두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불탑처럼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는 불탑보다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탑비(塔碑)는 고승의 부도에 부속되어 석조로 조영되는 것으로써 대왕의 석비나 묘비와 그 형태는 동일하나 불교의 유물인 까닭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탑비에는 고승의 일평생 행적이 건립 년월일과 함께 새겨 지고 있어, 그 비문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또한 서체는 금석학의 입장에서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기도 한다.

탑비는 맨 밑에 구부(龜趺)가 조각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이 세워지며, 상부에는 용머리가 구름과 함께 화려하게 조각장식되어 진다.

천은사 부도전은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좌측(향우)으로 약간 언덕인 산비탈에 석비(石碑) 2기와 함께 10여기 부도가 집중되어 있다.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속한 것들이다.

부도가 조사를 숭배하고 이를 기리는 문손들의 공경심에서 우러나온 작업이라면 통일신라시대 이후 계속하여 이어졌을 법도 한데

고려중기 이후 조선초기까지의 기간이 공백으로 남아있으니 이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과제로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장성서씨(長城徐氏) 부도 - 총고 130cm, 대좌직경 50cm (우측)

천은사의 10여기 부도중 맨앞줄에 위치하고 있다.

지대석 없는 연화문을 조석한 앙연의 원형대좌에 반구형의 탑신을 앉히고 그 위로 방형의 옥개석이 연결되었다.

옥개석 상면은 각 모서리에 우동이 보이고 각4면으로는 팔작지붕형인 합각이 모각되었으며 정상에는 일석으로 하여 보주를 앉혔다.

부도의 전면(前面)에는 <장성서씨사리탑>(자경 9cm)이라 쓰고 뒷면으로는 <씨칠십사가경이년정사치출사리무년이월자김추동입

(氏七十四嘉慶二年丁巳齒出舍利戊年二月子金秋東立)>(자경 4cm)이라 음각하였다.

1797년(정조 21년) 74세로 입면한 장성서씨의 치아사리를 그 다음해인 1798년에 그 아들 김추동이 세운 보도임을 알 수 있다.

현공처사 부도 - 총고 112cm, 대좌직경 68cm (좌측)

자연암반을 지대석으로 삼아 그 위로 원형의 대좌 탑신과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대좌는 원형으로 조식이 없으며 탑신은 고복형인데 전면에 <현공처사박>(자경 4.5cm)이라 음각하였으나 밑부분이 판독불능이다.

후면에도 역시 장방형의 액면을 모각하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으나 마모가 심해 판독을 할 수 없다.

옥개석은 8각으로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상면에는 우동마루가 표출되었으며 전각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반전을 보였다.

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으로 하였고 3단의 원형띠를 두르고 있으며,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보인다..

 

영해당(影海堂) 부도는 총고 170cm로 최근에 세운 것이다.(중앙)

기단부에 중석이 없는 앙·복련이 장식되고 그위에 유곽이 없는 9개의 유듀만이 표출된 고복형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상륜은 앙련이 조식된 보주가 안치되어있고, 전면에 <영해당정원지탑(影海堂正源之塔)>(자경 5cm)이라 명문하고

후면에는 <불기이오삼사년이월일(佛紀二五三四年二月日)>(자경 4cm)이라 썼다..

월봉당비(月峯堂碑) - 석비총고 154cm, 비신고 100cm, 비폭 39.5cm, 두께 14.6cm, 옥개석고 36cm, 비좌고 18cm)  (좌측)

이 석비는 천은사 입구부도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방형의 낮은 대좌위에 비신과 팔작지붕형의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비 전면중앙으로는 <월봉당유운선사유혜비(月峯堂裕雲禪師遺惠碑)>(자경 7cm)라 명문하였다.

그 양편으로는 <임인항세(壬寅降世) 을묘귀천(乙卯歸天) 일생행저(一生行詛) 호사위선(護寺爲先)>이라 새겼다.

또 <발낭여물(鉢囊餘物) 유혜백년(遺惠百年) 한산편석(寒山片石) 차마차전(且磨且鐫)>이상 비측면 우측(향좌)

<대정칠년삼월삼일(大正七年三月三日) 천은사중입(泉隱寺中立) 헌답삼십사두락(獻沓三十四斗落) 제자(弟資) 임설제(林雪霽)

최평담(崔平澹) 상하박월조(上佐朴月f) 정동열(鄭東烈) 주지(住持) 하용화(河龍華) 총무(總務) 김문전(金文典) 서기(書記)

강두학(姜斗學) 산중(山中) 총수(總數) 오십오원(五十五員)>(이상 비후면)

이 비의 주인공은 월봉당으로서 건립연대는 1918년이며 월봉스님(1842∼1915)이 입적한지 3년만에 세운 것이다..

해붕선사비(海鵬禪師碑) - 총고 194cm, 비신고 134cm, 비신폭 51.5cm (우측)

이 비는 천은사 부도군에 있는 월봉당비 우측(향좌)에 있다.

방형의 낮은 대좌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과 팔각지붕형의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전면 중앙 종서(해서체)로 <해붕선사유혜비(海鵬禪師遺惠碑)>(자경 11cm)라 쓰고 비문내용은 뒷면에 기록해 놓았다.

해붕대사성이적전주명경의부휘종택모김씨시사생간순천군황전면비촌리제십칠세축발간화엄 사수용장노병인육월이십이일신유시

적간천은사약사전동요거기생철종갑인속수칠십삼졸지육 일화간서봉하사입산오십년성근검화이익유매전삼백두임몰분여친족및

천은화엄연곡제사문도 수인위인참제석수지사전○정묘육월이십일야

명일 장이유수이졸용시 궐후덕지실시유사지혜영수물부 세존기원이천구백오십사년 정묘육월이십일일 천은사중입(이상 후면)

제자 상좌 하용천 이영재 정재성 박준상 한상용 편종수 주지 권동희 총무 박준상 재무 김 일성 서기 김학구

(海鵬大師姓李籍全州名京儀父諱宗澤母金氏始師生干順天郡黃田面」飛村里第十七歲祝髮干華 嚴寺水龍長老丙寅六月二十二日辛酉示

寂干泉隱寺藥師殿東寮距其生哲宗甲寅俗壽七十三卒之 六日火干西峰下師入山五十年性勤儉貨以익裕買田三百斗臨沒分與親族及

泉隱華嚴燕谷諸寺門 徒數人爲人t諸石樹之寺前○丁卯六月二十一也

銘日 ○而裕壽而卒用施 厥後德之實是惟師之惠永守勿夫世尊紀元二千九百五十四年 丁卯六月二十一日 泉隱寺中立)

위 비문내용을 보면 해붕대사는 성은 이씨고 본관은 전주로서 이름은 경외이다.

순천군 황전면 비촌리에서 태어나서 17세에 화엄사 수용장로에게서 삭발하였다.

이 비의 건립대는 1927년이나 해붕대사의 출생연대와 시적연대사이에 혼동을 초래하고 있다..

 

□인대(印大)부도 - 총고 170cm, 대좌직경 66cm (좌측)

비교적 잘다듬어진 8엽의 앙연을 조식한 원형의 대좌 위에 고복형의 탑신을 얹었으며 그 위로는 4각의 넓고 큰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옥개석 상면으로는 우동마루가 있고 그 사이에 기왓골이 조식되었고, 상륜부는 별석으로 하여 노반과 복발·보륜·보주를 장식하였다.

탑신에 당호의 명문이 마모되어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으나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성당대사(□性堂大師) 부도 - 총고 140cm (우측)

자연석을 약간 다음에 대좌로 삼고 그위에 별석으로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은 하후상박형의 석종형인데 하단에 두줄의 양각띠를 두르고 상단은 네군데에 유곽과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조식하였다.

탑신전면에 <□성당대사(□性堂大師)>(자경 8cm)라 명문하고 조성연대는 기록하지 않았다.

상륜부는 탑신과 일석으로 하여 노반과 보륜·보주를 안치하였으며,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용담당(龍潭堂) 부도는 천은사 부도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부도이다. (좌측)

대좌는 원형인데 앙연이 조식되었으며 그 사이에 기둥을 세워 8면을 구분하였다.

탑신은 타원형인 고복형으로 하단에 예리한 꽃잎을 장식한 16엽연화문이 조각되었다.

역시 탑신 상단부에도 16엽연화문이 엷게 장식되었고, 탑신 전면에 <용담당(龍潭堂)>(자경 15cm)이라는 당호를 새겨놓았다.

상륜은 별석으로 하여 노반과 보륜·보주를 올려놓았는데, 총고 170cm, 대좌직경 75cm이다.

부도 바로 앞에는 이 부도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석비가 있다.

비석은 총고 93cm, 폭 377.7cm, 두께 10.4cm로 전면에 <용담대화상사리탑(龍潭大和尙舍利塔)>(자경 6.3cm)이라 명문하였다.

뒷면에는 「숭정기원후□임우십월일입 합사 전영 도감진초 별좌포성 주지 책영 홍주 차준 환척(崇禎紀元後□壬午十月日立 合寺 全營

都監震楚 別座抱性 住持 策英 洪主 此俊 幻倜)」라 음각하였다.

위 연대는 석비가 중앙에 균열되어 확실치는 않으나 "삼(三)"자가 결락된 것으로 보이는데 위"삼(三)"자가 확실하다면

위 연대는 1762년(임우, 영조38)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같다. 왜냐하면 남원출신인 "용담당"의 입적연대가 1762년이기 때문이다.

용담은 조관스님(1700∼1762)의 법호(法號)로서 전라남도 남원출신이며 19세기 감노사(지금의 천은사)에서 삭발하고

영·호남의 명사들을 찾아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하였다..

 

범란당(梵鸞堂) 부도는 총고 128cm, 대좌직경 48cm로 연화문을 엷게 조식한 원형의 대좌에 상후하박인 고복형 탑신을 얹어놓았다.

옥개석은 방형으로 상면에는 전후좌우 사방에 세줄의 기왓골형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보주를 표출하였다.

탑신 전면에는 <범난당영재탑(梵鸞堂英宰塔)>(자경 7cm)이라 음각명문하였다.

뒷면에는 <불기이구오육년경향법려입(佛紀二九五六年京鄕法侶立)>(자경 3.7cm)이라 썼다.

위 명문에 의하면 이 부도는 1929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앙의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