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기행] 천년의 미소가 살아 숨쉬는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구례기행] 천년의 미소가 살아 숨쉬는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by 정산 돌구름 2014. 12. 6.
천년의 미소가 살아 숨쉬는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 탐방일 : 2014년 12월 4일

○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 화엄사(華嚴寺) 소개

  사적 제505호(2009년12월21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창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인도 승려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輿)>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한다.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는 의상대사()가 화엄10찰()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또, 장육전(殿)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연기조사께서 창건 후, 백제 법왕(599년)때 3천여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웠다.

  원효성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경덕왕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고, 헌강왕(875년)때 도선국사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조성과 더불어 화엄사 중흥조가 되시면서 화엄사가 대총림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태조 26년(943년)에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였다.

  문종때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중수, 인종때 정인왕사가 중수, 명종 2년(1172년)에 도선국사비 건립, 충렬왕때 원소암 중건,

  충숙왕때 조형왕사에 의한 전면적인 보수를 하였다.

  세종 6년(1426년)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도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에 의해 법석의

  요람을 이루었다. 임진왜란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은 화엄사를 전소시키기에 이르렀다.

  인조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몇몇 건물을 중건하였다.

  숙종때 계파선사와 문도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웅장한 각황전 건립과 더불어

  선교 양종대가람이 되었고, 근세에 이르러 도광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金井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화엄사 불이문..

화엄사의 산문으로 인조 10년(1632년) 벽암선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지리산화엄사’라고 쓴 정면의 현판은 선조의 네 번째 부인의 아들인 왕자 의창군이 쓴 것이다.

현판 한쪽 편에 ‘皇明崇禎九年嵗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라는 명문이 씌어 있어서 인조 14년(1636년)에 씌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은 최근에 고쳐진 모습이며, 문 좌우에는 돌각담이 이어진다.

 

기둥은 원주를 사용했으며, 전후 네 모퉁이에 보조기둥을 세웠고,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돌린 위에 다포식의 공포를 올렸다.

외3출목, 즉 외7포로 주간에는 2組의 주간포를 두었다.

살미는 모두 5단을 사용하였는데, 1단에서 3단 살미까지는 쇠서를 앙서형으로 초각하였고, 1단 살미에만 쇠서 위에 연꽃을 새겼다.

제4단과 제5단 살미는 짧은 수서형으로 초각했다.

첨차는 대첨과 소첨을 사용했는데, 출목선상의 첨차는 아래에 초각을 하였고 주심첨차는 단부를 둥글게 접은 교두형으로 만들었다.

주심에는 교두형, 출목에는 초각한 첨차를 사용한 점, 그리고 살미의 초각은 천왕문의 공포 구성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건물 전체에 모로단청을 하였으며, 포벽에는 화병과 화초를 그려 넣었다.

일주문은 규모가 작아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화엄사의 사격(寺格)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건축 양식, 특히 공포의 모습은 17세기의 양식과 18, 19세기의 양식이 혼용된 양상을 띠고 있다. 

 

기념물 판매장..

 

벽암국일도대선사비(碧巖國一都大禪師碑)..

인조 때 화엄사를 중건한 벽암(碧巖) 각성(覺性)대사(1575~1660년)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에 조금 미치지 못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는 현종 4년(1663년)에 건립되었다..

 

이곳 화엄사에 건립된 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전형적인 비석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귀부는 화강암으로 용 형상의 머리가 거북 모양의 신체에 비해 월등히 크게 강조되어 있다.

거북 모양의 신체는 너비에 비해 높이가 높은 편이며, 목은 앞으로 뻗은 모습으로 머리가 낮게 위치한 편에 속한다.

다리와 꼬리 등이 형식화되어 퇴화하였고, 귀갑과 그 위에 베풀어진 귀갑무늬도 투박한 편에 속한다.

귀갑 위에는 복련을 조각한 비신받침을 두었다. 귀부는 투박하고 소박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지방색이 강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비신은 정면 상부에 ‘國一都大禪師碑銘’이라고 전액(篆額)을 적었다.

비명 아래에는 ‘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碧巖碑銘竝書’라고 제목을 적은 다음 비문을 적었다.

글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 이경석(李景奭)이 지었고, 전액(篆額)은 가의대부(嘉義大夫) 행승정원

(行承政院) 도승지(都承旨) 조계원(趙啓遠)이 비문은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의정부(行議政府) 좌찬참(左參贊) 오준(吳竣)이 썼다.

뒷면에는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었다.

이수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단을 이룬 형태를 하고 있으며, 아래 층급 두 단을 두어 받침으로 삼았다.

아래 단에는 전체에 구름무늬를, 윗단에는 정면과 후면 중앙에 각각 용두를 정면에서 본 모습을 새겼고 주변을 구름무늬로 채웠다.

그 위에는 보주 형식을 올렸다..

 

벽암선사는 충북 보은 출신으로 법명이 각성이며, 호는 벽암, 속성은 김씨로서 선조 8년(1575년)에 태어났다.

10세 때 화산(華山)의 설묵(雪黙)을 스승으로 출가하여 14세에 승려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인 선조 26년(1593년)에 승병에 가담, 자운(慈雲)스님을 따라 이순신장군 휘하에 있으면서 해전(海戰)에서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봉은사에 주석하였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이 되었으며, 부휴(浮休) 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다.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팔도도총섭으로 승군을 거느리고 축성을 감독하여 3년 만에 완성함으로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

(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받았다.

인조 8년(1630년)에서 인조 14년(1636년)에 걸쳐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화엄사의 대웅전을 비롯해 보제루, 적묵당, 천왕문, 일주문 등을 중건하였다. 화엄사 외에도 송광사와 쌍계사, 법주사 등을 중건하는데도 몸을 바쳤다.

병자호란 때 이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자 의승 3천으로 항마군을 조직해 호남 관군과 호응하여 북진하던 중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도반인 고한(孤閑) 스님과 함께 화엄사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그 후 사신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가던 중에 병으로 사퇴하고 화엄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현종 1년(1660년) 세수 86세,

법납 72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법제자로는 백곡(白谷) 처능(處能)이 있으며, 이곳 화엄사를 비롯해 송광사, 해인사, 법주사 등에 비를 건립하였다..

 

유물관..

 

금강문(金剛門)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의 금강문은 금강역사와 문수․보현동자를 봉안한 건물로 인조 10년(1632년)에 벽암 각성선사가 중건하였다.

우측에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좌측에 밀적금강(密迹金剛)을 봉안하였는데, 모두 인조 10년(1632년)에 조성된 소조상이다.

지형의 경사를 이용해 전면에는 자연석의 축대를 쌓았고, 초석은 막돌을 이용하였다.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2간으로 천왕문과 금강문의 일반적인 평면 형식을 따랐다.

어간은 통로로 개방하였으며, 좌우 협간에는 앞쪽에 금강역사를 뒤쪽에 각각 사자와 코끼리에 올라탄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모셨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고, 초익공식으로 초익공은 단부를 직절한 간단한 형식의 것을 사용하였다.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고, 가구는 무고주5량으로 대들보는 심하게 휜 부재를 사용해 조선후기 건축 특성을 보여준다.

건물 내외는 모로단청을 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정면 어간에 ‘金剛門’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오른쪽에 나라연금강, 왼쪽에 밀적금강이 지키고 있는데 모두 인조10년(1632년)에 벽암선사가 흙으로 만든 불상(土像)이다..

 

나라연금강역사(那羅延金剛力士)는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 백만배나 된다고 하며, 이러한 힘으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밀적금강역사(密迹金剛力士)은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으로,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이 있으므로 밀적금강이라 한다..

 

화엄사 금봉당비(華嚴寺錦峰堂碑)..

1837년(헌종 3년) 화엄사 내원암을 창건한 우익(祐益)선사 금봉당(錦峰堂)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929년에 세운 비석이다.

총높이 265㎝(비신높이 168㎝·옥개석높이 97㎝), 폭 67㎝, 두께 23㎝이며, 화엄사 사천왕문 바로 앞의 자연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비신(碑身) 위에 방형의 하대와 돔형 지붕석 그리고 보주(寶珠; 구슬 모양 장식)가 얹혀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비석 앞면에 '대화엄사 중흥공덕주 사승풍규정 팔도도승통 금봉당우익대선사비'(大華嚴寺 中興功德主 賜僧風糾正 八道都僧統 錦峰堂

祐益大禪師碑)라는 글씨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고, 측면과 뒷면에 비문이 적혀 있다.. 

 

천왕문(天王門)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은 금강문을 지난 곳 보제루 가기 전에 위치하고 있다.

금강문과는 중심축이 약간 어긋난 곳에 위치시킴으로서 조선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배치 방법을 따르고 있다.

정면과 측면 각3간으로 양통을 2간으로 설정하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천왕문 형식과는 좀 다르게 구성하였다.

한편 양통의 중앙 간은 전후의 간에 비해 매우 좁은 주간으로 설정하였는데, 인조 때 벽암선사에 의해 중창된 건물로 추정된다.

어간을 통로로 개방하고 좌우에 사천왕상을 모셨음은 일반적인 천왕문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좌우의 협간은 정면과 후면, 측면의 삼면에 판벽을 쳤고, 자연석을 이용해 허튼층으로 쌓은 축대 위에 다시 장대석을 한 단 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초석은 자연석을 이용하고 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고, 정면과 후면의 기둥은 민흘림이 완연하며, 모서리 기둥은 평주에 비해 약간 굵은 것을 사용했다.

측면의 기둥은 약간 휜 목재를 사용하고 있다. 기둥의 높이는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주간이 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 간의 입면이

세로로 좀 더 긴 장방형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만큼 당당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기둥 상부에는 창방과 평방을 돌리고 내외5포의 다포식 공포를 올렸다.

맞배지붕이므로 측면에는 공포를 두지 않았으며 전후면의 각 주간에 1組 씩의 주간포를 두었다.

보머리는 외부로 돌출하지 않아 주심포와 주간포의 구조는 동일하다.

4단의 살미 중 1단과 2단 살미는 앙서형으로 쇠서 위에 연꽃을 조각했으며, 3단 살미는 수서형으로 아래 연봉을 초각했다.

4단 살미는 봉취형을 초각했고, 살미 내부의 형태는 주심포와 주간포가 다르다.

주심포는 4단의 살미를 한 몸으로 초각해 보아지형을 이루고, 주간포는 1단, 2단은 교두형, 3단과 4단을 당초와 연꽃을 초각했다.

가구는 무고주4량으로 보는 건물 규모에 비해 단면 크기가 작은 편에 속하며,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정면 어간에는 ‘天王門’이라 쓴 현판을 걸었는데 현판의 크기는 건물의 규모에 비해 작은 편이며, 건물 내외는 전체에 단청을 하였다.

전후면 외부 포벽에는 나한도를 그렸으며, 내부 포벽에는 당초무늬를 베풀었고, 고미반자의 천장에는 구름무늬를 그렸다.

 

천왕문은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이것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워졌다..

 

 

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는 천왕이고,

증장천왕은 칼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더욱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 해준다.

광목천왕은 용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서방(서구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넓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해주는 천왕이고, 다문천왕는 보탑을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북방(북구로주)을 수호하고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왕이다..

벽암선사가 인조10년(1632년)에 만든 4.4m 높이의 목조각이다..

 

만월당(滿月堂)..

1986년 6월10일에 원응종원(圓應宗源)스님이 중창하였다.. 

 

보름달의 만월(滿月)이 이곳을 모자람이 없이 원만히 밝고 환하게 비추니 만월 빛으로 인하여 만월당 대중 스님들이

만월지상(滿月之相 아름다운 부처님의 모습)인 모습으로 지내는 전당이다.

만월당 출입문에는 "사자문(獅子門)"이라 적혀 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운고각(雲鼓閣)

보제루의 동쪽에 위치하며, 1918년 금정암의 세월(世月)비구니가 중건하고 1976년 명선(明煽)스님이 중수를 했다.

1998년 종열(宗烈)스님이 기와번와와 단청불사를 했다.

운고각 위에는 법고와 범종, 운판, 목어의 사물(四物)이 걸려 있다.

정면과 측면 각2간 규모의 누각식 건물로 누하(樓下)는 사방에 판벽을 설치하여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누상은 사방을 개방하고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돌렸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중간 중간에 심하게 휜 기둥이 눈에 띈다.

이익공식으로 초익공은 앙서형, 이익공은 수서형으로 초각했는데 그 길이가 길고 위아래에 연꽃과 연봉을 새겨 화려하게 구성하였다.

보머리에는 봉취형을 초각해 끼웠고, 주간에는 역시 초각을 한 화반 하나씩을 두었다.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건물 내외에 모로단청을 베풀었는데, 단청은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니라 1998년에 새로 한 것이다.

 

대웅전을 바라보는 쪽에 ‘雲鼓閣’이라고 쓴 현판을 달았다.

누상에 건 사물 중 범종(梵鐘)은 최근에 새로운 범종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화엄사에서 가장 컸던 범종으로 숙종 37년(1711년)에

운흥사에서 조성된 것이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넓어지다가 중간 부분부터 직선적으로 내려오는 형태의 종신(鐘身)과 그 위의 용뉴와

음통을 갖춘 전형적인 한국 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종신 어깨 부분에는 당초무늬를 장식한 띠를 돌렸고, 네 면에 역시 당초무늬로 유곽을 만들었으며, 유곽 안에는 유두 9개를 새겼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4구(俱)의 보살입상을 배치하였다. 종신 아래 부분에는 당좌가 없고 아래 띠만 돌린 것이 특징이다.

또한 종신에는 18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육도중생(六道衆生)을 제도하기 위하여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천상 28천(욕계6천,색계18천,무색계4천)이며,

저녘에 33번 치는 것은 28천과 오도(지옥,아귀,축생,인간,아수라)합해서 33이 된다.

육도중생들이 진리의 범종 소리를 듣고 기쁨 마음을 내어 불도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범종각(梵鐘閣)

보제루를 중심으로 운고각의 맞은 편, 즉 보제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1976년5월1일에 착공하여 11월28일 준공과 더불어 타종식을 거행하였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건물로 정면 어간을 협간에 비해 넓은 주간으로 설정하였다.

사방은 개방되어 있으며, 내부에 범종 하나가 걸려있다.

기단은 판석을 사용해 만들었고 대웅전 쪽을 향해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기단 윗면 역시 판석을 깔아 마감했다.

초석은 잘 다듬은 원형초석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깔끔하게 치목한 원주로 완연한 배흘림을 주었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돌렸으며, 그 위에 다포식의 공포를 두었고, 주간포는 모든 주간에 하나 씩 설치했다.

다포식임에도 불구하고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익공식과 혼용된 공포 구성으로 조선 말기부터 시작된 형식이다.

살미는 3단을 사용했는데 쇠서를 길게 뻗도록 만들어 장식적인 면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1단 살미는 앙서형으로 위에 연화를 초각했고, 2단 살미는 수서형으로 아래에 연꽃을 조각했다.

3단 살미는 봉취형인데, 주심포에서는 보머리에 해당한다.

살미 내단은 각 살미를 독립적으로 구름 모양으로 초각했으며, 주심포에서는 보아지형으로 만들었다.

첨차는 단부를 직절하고 그 아래를 사절한 딱딱한 형태의 교두형이다.

가구는 무고조5량으로 어간에는 양 옆의 대들보에 의지해 굵은 부재를 건너질러 종을 걸 수 있도록 하였다..

 

정면에는 범종각이라는 현판을 달았고, 내부에는 1976년에 기록한 ‘華嚴寺般若梵鐘鑄成記’가 걸려 있다.

1976년에 범종각 건립과 함께 조성된 범종은 전형적인 한국종의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인 모습은 오늘날의 수법이 반영되었다.

기단과 초석의 구성과 형태, 기둥의 형태와 치목상태 및 가구 부재의 상태는 현대 목조건축의 추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공포의 구성은 19세기부터 나타나는 익공식과 다포식이 혼용된 수법을 따르고 있으나 초각의 내용은 역시 현대적이다..

 

보제루(普濟樓)

정면7칸, 측면4칸의 맞배지붕 누각형식의 건물로 1974년에 전남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인조때 벽암선사가 중창하고 순조27년(1827년)에 금봉우익선사가 크게 고치고 1974년12월에 리산 도광선사께서 중수하였다.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 앞 한 단 낮은 화엄사의 중심 마당 앞쪽을 가로막고 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법요식 때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강당 건물이다..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고, 천장은 별도로 가설하지 않았으며, 단청은 베풀지 않았다.

정면 어간에 ‘普濟樓’라고 쓴 현판을 달았으며, 내부에는 어간 정면 쪽에 ‘華藏’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익공의 짜임과 가구 방식 등 전체적인 건축수법은 조선 후기 사찰 누강당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한편 보제루는 인조 때 중건된 후 순조 27년(1827년)에 크게 중수되었는데, 건축수법은 조선 말기의 수법을 더 많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순조 때의 중수는 거의 중건에 가까운 수준의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133호(1963.1.21), 화엄사 서오층석탑(西五層石塔)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있는 쌍탑 중 서편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동탑이 아무런 조각이 없는 반면 서탑에는 조각과 장식이 가득하다.

형태는 기단(基壇)은 2층이고, 그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워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각 층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1층 몸돌 4면에는 4천왕상을 조각 배치하였고,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머리장식에는 2층의 단을 둔 받침 위로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8부중·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보물 제132호 화엄사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대웅전 앞의 동서 쌍탑 중에 동쪽에 서있는 것이 이 탑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반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없이 단정하다.

탑은 1층 기단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층인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고, 탑신은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 층 몸돌의 너비가 줄어드는 정도는 큰 것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 늘씬해 보인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몸돌을 따라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가 큰 편이며, 그 중 1층과 2층의 차이가 한층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가 올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층 기단인데 비해 1층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적묵당(寂默堂)

인조10년(1632년) 벽암선사께서 중수하고 ,정조 22년(1798)에 행원(幸元)스님이 중수했으며,

1978년 명선(明煽)스님이 보수하였다..

 

본당(本堂)은 화엄사승가대학 학인(學人)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교리을 배우고 실천하며 수행하는 장소요,

또 대중스님들이 모두 모여 공양(供養)을 하며 대중공사·회의도 하는 대중방(大衆房)이다.

적묵당은 번뇌를 쉬고 고요적적한 세계로 이끌어 주는 승당(僧堂)이다..

 

국보 12호(1962.12.20)인 화엄사각황전앞석등(華嚴寺覺皇殿앞石燈)..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높이가 6.4m로 우리나라에 현존하고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석등이다.

지대석과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 화사석과 옥개 및 상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전형적인 남북국시대 석등의 모습을 따르고 있고, 석등앞에는 장방형 평면의 배례석 하나가 있다.

지대석은 팔각형으로 입면을 상하 두 단으로 구성되어 아래는 각 면에 두 개씩의 안상을 새겼고 그 위는 약간 바깥으로 돌출하였다.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복련을 새긴 부분과 그 위의 중대석 받침에 해당하는 부분이 별석으로 만들어졌다.

복련은 팔각의 각 모서리에 하나 씩 큼직하게 새겼으며, 그 아래쪽 연잎이 감겨 올려지는 부분에서 귀꽃이 피어오른 모습을 조각했다.

연잎 사이에는 간엽(間葉)을 조각했고, 앙련을 새긴 위쪽에는 쇠시리 한 단을 두어 그 위의 돌을 받치는 부분으로 삼았다.

하대석 상부는 아래에 구름무늬를 상하 두 겹으로 새긴 위에 좁혀 올라간 부분과 다시 바깥으로 벌어져 나온 부분으로 쇠시리 하여

중대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간주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원형 평면으로 아래위만 팔각 평면으로 만들고 중앙부는 원형으로 만들었다.

 

중앙부와 아래위가 넓은 장고형으로 상하가 완전히 대칭을 이루도록 하였으며, 중앙부에는 연꽃을 수평선으로 이은 띠를 두었다.

상대석은 석등의 크기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이나 평면 크기를 충분히 하여 안정감을 저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높게 만들었을 때 둔탁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해소하였다.

평면은 전체가 팔각형으로 아래에는 나지막이 쇠시리 3단을 두어 층급받침을 이루도록 하였고 그 위에 앙련을 새겼다.

앙련을 각 모서리에 하나씩 큼직하게 새겼으며 그 사이로 간엽을 작게 새겼다.

다시 연꽃 위로 약간 넓게 튀어나온 부분을 만들었으며 그 위로 기단 형태의 화사석 받침을 높직이 만들었다.

상대석이 사람의 눈높이보다 높게 위치하고 화사석보다 넓기 때문에 화사석 아래 부분이 가려 보지지 않게 되는 것을 고려한 처리이다.

화사석은 팔각형으로 하나의 석재를 이용해 만들었다.

약간의 흘림을 두어 안정적인 구도를 이루도록 하였고 화창은 4면에만 두었고 그 사이사이의 면은 아무런 조각을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 역시 팔각형으로 평면 크기는 기단부의 하대석에 해당할 정도로 넓게 만든 반면 지붕부는 낮게 만들어 지붕면이 거의 안보인다.

옥개 아래면도 높이를 거의 지니지 않도록 만들어 펼쳐진 느낌이 강하게 든다.

지붕면이 보이지 않게 한 것은 지붕이 커져 상부가 무거워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로 보이는데, 대신 상대적으로 크기를 작게

만들 수 있는 상륜부를 높게 구성함으로서 지붕면이 보이지 않는데서 발생하는 비례의 어색함을 방지하였다.

옥개석 아래에는 층급받침을 나지막이 두었고 그 바깥으로 겹처마를 형상화한 듯한 쇠시리 한 단을 두었다.

처마 끝은 석재의 두께를 얇게 아래위를 모두 수평으로 만들고 상면만 모서리에서 살짝 반곡하도록 한 다음 귀꽃을 크게 조각했다.

옥개석 위에는 복발형 받침돌을 놓은 위에 팔각의 짧은 기둥형 석재를 놓고, 다시 仰花를 놓은 다음 옥개석과 같은 형상의 지붕돌

하나를 놓고 앙련을 새긴 보주를 두어 마무리하였다.

매우 큰 규모의 석등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의 눈높이와 함께 규모를 고려하여 전체와 세부의 비례를 적당히 조절함으로서

안정적이되 둔중하지 않은 뛰어난 조형을 달성하고 있다.

또한 세부적인 장식 조각도 전체 석등의 크기에 맞추어 지나치게 섬세한 조각을 피하고 조형을 이룬 뛰어난 석등이라 할 수 있다.

장고형으로 만든 간주석, 귀꽃이 크게 새겨지는 조형적 수법은 신라 하대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년)에서 경문왕 13년(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

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국보 67호(1962.12.20) 화엄사 각황전(華嚴寺 覺皇殿)..

화엄사 서쪽에 위치한 효대(孝臺)의 아래쪽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화엄사에서 가장 큰 불전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건축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동편에 위치한 대웅전과는 서로 직각을 이루며 위치하고 있다.

각황전 앞에는 석등과 함께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 있어 창건 당시 이곳이 화엄사의 중심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각황전 터에는 원래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장육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엄사가 8세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장육전 역시 8세기 또는 그 이후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육전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선조 26년(1593년)에 소실된다.

이때 내부에 봉안하고 있던 석경(石經)도 모두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각황전은 숙종 25년(1699년)에서 숙종 28년(1702년)에 걸쳐 벽암선사의 제자 계파 성능이 중창한 것이다.

3년에 걸친 큰 공역에 끝에 중창된 후 숙종 29년(1703년)에 목조 금칠한 삼존불과 사보살상을 봉안하고 일주일에 거친 경찬대법회를

열었으며, ‘각황전(覺皇殿)’으로 사액되었다.

숙종 때의 중창 이후 영조 45년(1749년)과 헌종 13년(1847년)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계파 성능의 각황전 중창불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계파 성능이 장육전 중건을 서원하고 화주를 잦아 곳곳을 유랑하다가 우연히 한 거지 노파를 만나게 되었다.

그 노파는 지금 자신은 아무 것도 시주할 것이 없으니 다음 生에 왕궁에서 태어나 큰 도움을 줄 것을 약속하였다 한다.

그 노파가 숙종의 딸로 환생하였으며 숙종의 지원으로 불사(佛事)를 이루게 되었고, ‘대왕을 깨우치게 한 보전(寶殿)’이라는 뜻을 빌려

각황전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숙종에게는 공주가 없어 전혀 믿을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

중층의 각황전은 상하층 모두 도리통 7간, 양통 5간의 평면을 지니고 있다.

하층은 도리통 7간 중 어간을 포함한 중앙 3간의 주간을 넓게 설정하고 그 바깥의 협간을 약간 좁은 주간으로 설정하였으며,

가장 바깥쪽 툇간은 주간을 많이 줄였다. 양통은 중앙 3간을 넓은 주간으로 설정한 반면 전후 툇간을 좁혀 잡았다.

상층은 평주를 하층의 툇보 위에 올려놓은 관계로 중앙부 5×3간은 하층과 동일하게 구성하고, 가장 바깥쪽 툇간만 주간을 좁혀서

설정하였다. 중층의 불전이기는 하지만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구성하였다.

하층 정면에는 중앙 3간에 사분합문, 그 좌우의 협간과 퇴간에 쌍여닫이문을 설치하였다.

주간 설정의 변화와 창호 크기의 분할을 조절하여 7간 규모의 도리통 입면에 변화와 통일감을 부여한 것이다.

창호는 모두 동일한 형태로 아래에 궁창부 한 단을 두었으며, 상부에 궁창부와 대칭을 이루도록 틀을 짜고 교살의 살대를 배치했고,

중앙부는 井자살과 교살을 혼합한 살대를 구성하였다. 양 측면에는 중앙과 전후 툇간에 띠살의 두 짝 여닫이문을 설치했다.

후면에는 중앙부 5간에 측면의 창호와 같은 형식의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상층에는 전체에 정자살의 교창을 달아 채광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정면 상층의 어간에는 ‘覺皇殿’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숙종 29년(1703년)에 형조참판 이진휴(李震休)가 쓴 것으로 ‘癸未孟夏刑曹參判李震休書’라는 명문을 적었다.

정면 기둥에는 “偉論雄經岡□通 / □生弘護有深功 / □□義學分燈後 / 圓敎宗風滿海東 / 西來□燭傳三□ / 南國千□闡五宗 /

遊償此增淸淨債 / 白雲回首與誰同”고 쓴 주련을 걸었다.

각황전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후기 건물 중에서 보기 드문 큰 규모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건축적 구성이 매우 웅장한 불전이다.

옛 건물터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당시의 목조건축 기법을 잘 적용하여 조영한 뛰어난 불전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인 구성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 목조건축의 구성이 법식화 되어가는 과정의 초두에 서있으나 일부 앞선 시대의 법식을 남기고

있고, 아직 불전이 화려함으로 치닫는 상황까지는 보이지 않는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불단은 후불벽에 의지하여 3간 너비로 마련하였다. 불단은 전체를 두 단으로 만들었다.

아래 단은 맨 아래 꽃을 화려하게 도안한 받침을 두었고 그 위를 3층으로 나눈 다음 죽절형(竹節形)의 기둥을 세워 장방형 격자로

나눈 속에 단순한 형태의 안상을 새겼다.

상단은 아래위 두 단으로 만들었으며, 아래 단은 죽절형 기둥을 세워 장방형 격자를 나눈 속에 안상을 새겼다.

상단은 아래에 당초무늬를 새긴 받침을 두었으며, 그 위에 안상을 새긴 격자무늬를 반복시켰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 불단의 모습을 갖춘 목조불단이다.

불단 위에는 3간에 걸쳐 각 간에 1구 씩 삼신불을 모셨으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측이 노사나불, 우측이 석가모니불이다.

각 불상은 수미단형 위에 복련과 앙련으로 이루어진 좌대를 마련한 위에 모셔졌다.

부처님을 깨달음의 왕이란 의미로 "각황" 이라 부르는 데서 전각 이름을 정하였다

 

 

 

 

보물 300호(1963.01.21)인 화엄사 통전 앞 사자탑(華嚴寺圓通殿前獅子塔)..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으며,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원통전(圓通殿)

숙종 29년(1703년)에 중건하였으며, 각황전 앞마당 북쪽에 대웅전, 영전과 나란히 남향해 위치하고 있다.

본존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정면과 측면 각3간으로 정면에는 아래 궁창부 한 단을 둔 교살의 삼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양 측면에는 전퇴에 띠살의 외여닫이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심벽구조의 벽을 쳐 감실형 평면을 구성하였다.

후면의 벽은 각 간에 十자와 X자를 합친 모양의 수장재를 두어 외관에 변화를 주었다.

내부에는 평주 열에 맞추어 내주 4개를 세웠으며, 중앙 1간의 후면 쪽으로 치우친 곳에 불단을 만들고 관세음보살상을 모셨다.

기둥의 배열과 함께 후불벽 없이 불단을 구성하고 그 위에 창호까지 달린 집을 지어 관세음보살상을 만든 구성은 조선 후기 사찰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기단은 정면과 다른 면이 다른데 정면에는 가구식 기단을 구성했던 면석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양측면과 후면은 자연석을 쌓았다.

정면의 기단은 화엄사에 있었던 구재(舊材)를 재활용한 것이며, 정면 계단의 디딤돌과 소매돌도 구재를 활용한 것이다.

초석은 기본적으로 막돌을 활용하고 있으나 일부 초석은 상면에 쇠시리를 두어 주좌를 새긴 것이 있다.

공포는 외1출목의 주심포식, 즉 주삼포식으로 길게 뻗은 살미에 앙서형과 수서형의 초각을 하였다. 내부는 양봉형을 이루고 있다.

첨차 역시 초각을 많이 하였다. 주간에는 꽃과 당초무늬를 도안한 복잡한 초각을 한 화반 하나씩을 두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인데 막새기와 중 일부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내부에는 전체에 우물천장을 들였다.

현재 외부에는 단청이 없으나 내부에 퇴락이 심한 단청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외부에도 단청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면 어간에 건 편액은 정조 23년(1799년)에 조종현이 쓴 것이다.

 

 

 

보물 제299호(1963년1월21일 지정) 화엄사 대웅전(大雄殿)..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국보 제67호)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8년(1630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천장은 우물 천장이며, 삼존불 위쪽으로 장식적인 성격을 띠는 지붕 모형의 닫집을 놓아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건물 내외에는 전체에 모로단청을 하였으며, 정면 어간에는 ‘大雄殿’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현판 옆에는 ‘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라는 銘記를 적었는데, 인조 14년(1636년)에 왕자 의창군(義昌君)이 쓴 것이다.

대웅전은 도리통이 5간으로 클 뿐 아니라 기둥을 높게 사용하여 당당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내부는 내진 고주를 세우고 안쪽에 3칸 규모의 불단을 놓아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하는 비로자나삼신불좌상을 봉안하였다.

후불벽에는 건물을 중수하고 불상을 개금해 올릴 때 제작된 삼신불탱화(1757년작)를 걸어 놓았다.

그 위에는 중아자형 천개(정면5칸, 측면 3칸)를 매 칸마다 걸어 놓았으며 천정은 종보 배바닥에 설치한 층급천정이다..

 

보물 제1363호 대웅전 삼신불탱

화엄사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는 그림으로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그린 탱화이다

이 삼신불탱은 3폭으로 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탱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노사나불탱,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탱을 각 한 폭씩 그렸다.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도는 화면 중앙 상단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인 문수·보현보살과 8대보살, 4위의 타방불과 6위의 제불,

사자와 코끼리 탈을 쓴 성중(호계대신(護戒大神), 복덕대신(福德大神))들이 에워싸듯 배치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키 모양의 광배를 가지고 있는 본존불은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으며,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고, 무릎 폭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고 귀는 기다랗고, 다자색 법의의 깃을 따라 연두빛과 분홍빛깔의 보상화무늬가 장식되었다.

보신(報身)인 노사나불도는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에 보관을 쓴 보살형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사천왕상 2위, 4위의 타방불, 3신장과 4금강이 주위에 빙둘러 배치되어 있다. 단정한 귀·눈·입·코 등에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는 있으나,

둥근 머리광배에 보관을 쓰고 귀걸이·목걸이·팔찌·구슬 장식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보살형 불상으로서의 꾸밈이 돋보인다.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도는 유난히 몸광배가 큼직한 키형 광배에 악귀를 물리치는 뜻을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단에는 문수·보현보살을 포함한 6대보살과 함께 2구의 사천왕상을 그리고, 그 위로는 흔히 등장하는 타방불 대신

가섭·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제자 및 4금강과 3신장, 용왕·용녀를 에워싸듯 배치하였다.

이 삼신불탱은 18세기 조계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스님외 13명의 화원이 동원되어 그린 뛰어난 작품으로 필선이 섬세하며,

녹색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4m를 넘는 거대한 3폭의 화면에 삼신불을 완전히 갖춘 매우 드문 예로,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보물 제1042호)와 더불어 18세기 삼신불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시왕을 모신 명부전은 대웅전 남쪽 마당 동쪽을 가로 막으며 서향하고 있다.

인조 8년(1630년)에 벽암선사가 중건하였으나 1970년에 리산 도광선사가 중수하였다.

장대석을 한 단 쌓아 만든 나지막한 기단은 윗면을 방전을 깔아 마감하였고, 초석은 자연석이며, 기둥은 모두 원주이다.

기둥은 건물의 규모에 맞추어 비교적 높이가 높은 편이어서 건물에 당당한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기둥은 1970년 중수하면서 교체된 것이 대부분으로 현대적 기법으로 깔끔하게 치목되어 있다.

평면은 정면 5간, 측면 3간으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정면은 5간 모두 거의 동일한 주간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측면은 중앙 간을 전후 툇간에 비해 절반 정도로 매우 좁게 설정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고, 막새기와를 사용하고 있으나 망와를 제외한 장식기와는 사용하지 않았다..

명부전으로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건물로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건축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편액은 정조 23년(1799)에 조종현의 글씨이다..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구성하였으며, 후면과 양 측면의 벽에 의지하여 ⊓자형의 불단을 만든 위에 인조10년(1632년)에 만들어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十王)들을 모시고 있다.

탱화로는 지장보살 뒤에 걸린 후불탱화와 좌우로 배열된 시왕상 뒤에 걸린 탱화에는 십대왕들이 재판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탱화는 철종13년(1862년)에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