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기행] 중요민속자료 제8호, 남한의 3대 길지 운조루(雲鳥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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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기행] 중요민속자료 제8호, 남한의 3대 길지 운조루(雲鳥樓)

by 정산 돌구름 2014. 12. 10.
중요민속자료 제8호, 남한의 3대 길지 운조루(雲鳥樓)..

 

 

○ 탐방일 : 2014년 12월 9일 (화)

○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번지

운조루(雲鳥樓) 소개

  중요민속자료 제8호(1968년11월23일)로 지정된 누정으로 영조 때 류이주(柳爾胄)가 낙안부사로 있을 때 99칸을 건축했다고 한다.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칠언율시에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라올 줄 아네.>

  큰사랑채 대청 위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52년(1776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자형 행랑채, ㅜ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그대로 보존되어있고 사당과 연당이 남아 있다.

  규모나 구조가 당시 귀족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현존하는 주요부분은 사랑채와 안채이며, 그 밖에 행랑채 ·사당 ·연당 등이 있다.

  사랑채는 3채가 있는데, 큰사랑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높이 약 1.2m의 축대 위에 있으며, 중문쪽이 온돌방, 가운데가 마루방,

  서쪽 끝이 누마루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높이 약 60cm의 활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있으며, 초석은 큰 괴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전면 마루 끝에 선 것이 지름 약 2.3m의 둥근 기둥이며, 다른 것은 모두 모난 기둥이다.

  안채 남동쪽에 사당이 있으며, 맞배지붕 홑처마집이다.

  대문과 행랑채 남쪽 마당 건너에 연당이 있는데,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연당은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운조루가 자리한 터는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오미리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형상이다.

  이런 곳을 찾아 집을 지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몇백년 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명성이 자자하여 이곳이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위쪽에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구몰니(金龜沒泥), 중간에 금환낙지(金環落地),

  아래쪽에 다섯가지 보석이 모여 있는 형상의 오보교취(五寶交聚)의 명당이 있다.

  중간지대의 명당 금환낙지는 운조루가 이미 차지했지만, 금환낙지와 오보교취의 명당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호구조사를 실시한 통계에 따르면 1918년 70호에 350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4년만에 148호에 744명으로 불어났다.

  운조루는 1,400평의 대지에 건평 273평인 99칸(현재는 70여 칸) 저택으로, 문중 문서에 따르면 한때 883마지기의 농토가 있었고

  대한제국 말에만 해도 농사를 짓기 위해 한 해에 2백~4백여 명의 노동력이 조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위세를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저택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 마을 일대에 집을 지었던 사람이 몇십 명에 이르렀으며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될 무렵에는 3백여 채가 들어섰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400여 평의 대지에 세워진 운조루(주인이 거처하였던 곳)와 손님을 맞았던 귀래정(歸來亭),

  그 아랫마을 환동에 금가락지 같은 형국으로 높은 담벼락을 두른 채 대숲에 싸여있는 기와집(박 부잣집) 한 채뿐이다.

 

 

 

연지(蓮池).. 운조루 대문 앞으로는 마당은 없고 바로 긴 연못이 가로 놓여 있다.

연지에는 섬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삼신산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상류층의 조경관이었던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을 표현한 것이다.

주변으로 각종 연화(蓮花)를 비롯한 화초를 심었다.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연당은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대문은 1776년에 세워졌지만 얼마 되지 않은 1804년에 한 번 중수되었다.

창건주 유이주 사후 홍살문이 내려져서 중수된 것이다.

현재 대문은 맞배의 솟을대문이지만 최초 모습은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보면 합각지붕이다.

중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솟을대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옛날에는 대문에 '호랑이 머리뼈'를 걸어 두었지만 도난을 맞은 이후 '말 머리뼈'로 대신하고 있다..

 

큰사랑채..

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바깥마당이 나오고 마당 뒤의 사랑채와 바로 마주하게 된다.

좌측에 놓인 것이 큰사랑채(外舍)이고 우측에 놓인 것이 중간사랑채(中外舍, 귀래정)이다.

평면구성을 살펴보면 큰사랑채는 남측채 6칸(중문간 포함)과 북측채 2칸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ㅗ'자형이고,

남측채의 동쪽으로 안채의 중문간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외주문(外廚門)이라 했으며 사랑방은 2칸으로 수분실장방(隨分室長房)이라 했다.

수분은 창건주 유이주의 아들 유덕호의 호이다.

 

사랑방 서쪽에는 대청 2칸이 있는데 이것이 운조루이다. 운조루는 이 집의 택호이기도 하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라는 칠언율시의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 새들은 날기에 지쳐 우리로 돌아오네

서쪽 누마루는 족한정이라 부른다. 한가롭게 머문다는 의미로 유이주의 대손인 유억(柳億)의 호이다.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북쪽으로 빠져 올라간 익랑을 이긍재라고 불렀다.

유덕양의 일기<시언>에서는 이를 서실책방(書室冊房)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공부하여 여러 사람이 관직으로 나갔다고 전한다..

 

 

타인능해(他人能解)..

 

목독에 구멍을 내고 마개에 '他人能解' 라는 글귀를 써두어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꺼내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우리네 조상들의 나눔의 삶, 베품의 정신을 알려주고 있다.

 

안채는 큰사랑채와 중간사랑채 사이에 있는 중문간을 통하여 진입할 수 있다. 여성들과 아이들이 기거했던 공간이다.

지금도 살림채로 사용중이다. 안마당보다 높게 기단을 쌓은 'ㄷ'자형 평면이 안채의 기본형이나 형태상 귀래정의 오른쪽으로 붙은

남행랑이 안채 전면에 있어 '튼ㅁ'자형을 이룬다고도 할 수 있다.

안채는 방향으로 보자면 북측채에 해당한다. 좌우측에 안마당과 같은 높이로 방과 부엌, 광이 있는 서측채와 동측채를 두었다.

남측으로 단을 두고 높이를 낮추어 곡간채(남측채)가 자리하고 있다.

서측채에 있는 부엌에 들어서면 남측으로 큰사랑뒷마당을 통하여 큰사랑에 계신 손님의 수발을 들고 음식을 나를 수 있는 문이 있으며,

북측에는 큰사랑뒷마당 담장 뒤로 부엌일을 할 수 있도록 우물이 있는 부엌마당을 두었다.

안채 뒤로는 단을 높여 안채 뒷마당이 있는데 지금은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이한 구성은 다락 구조인데, 안방 위에는 골방이 있고 그 위로는 다락을 두었다. 좌측채와 우측채 모두 상부에 다락이 있다.

다락을 두어 층을 구성하는 수법은 경북의 예천권씨 종가나 의성김씨 종가에서처럼 주로 경북 가옥에서 볼 수 있는 가옥구조이다.

서측채 다락은 사랑 뒷마당으로 오를 수 있는데 남단 벽에는 원래 가로로 누워진 띠살 들창문이 달려 있어 옛 시절에 남성들에 의해

통제된 젊은 여성들이 사랑마당을 오가는 남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중간사랑채..

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바깥마당이 나오고 마당 뒤의 사랑채와 바로 마주하게 된다.

좌측에 놓인 것이 큰사랑채(外舍)이고 우측에 놓인 것이 중간사랑채(中外舍, 귀래정)이다.

통상 귀래정(歸來亭)이라 불렀고 마당으로 가장 돌출되어 있다.

중간사랑은 이 집 주인의 아들이 기거했던 곳이며 그 아래로 손주 등이 사는 작은사랑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남아있는 초석에서 그 흔적만 느낄 수 있다.

중간사랑채는 'ㅣ'자형의 서측채 3칸과 'ㅡ'자형의 동측채 4칸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ㅏ'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와 큰사랑채의 중문간이 연결되어 있다.

서측채는 입구에서부터 1칸 귀래정(歸來亭), 1칸 담락와(湛樂窩) 그리고 마루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측채는 서측채에서 동쪽으로 연결된 1칸의 허칸(虛間)과 2칸 곡간(內米庫), 1칸의 광(廚)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측채는 귀래정과 연결되어 있으나 안채에서 이용했던 행랑이다.

 

 

 

 

 

 

 

 

 

 

 

 

 

 

 

행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의 외행랑은 동행랑과 서행랑으로 불렀다.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보면 양쪽 행랑에서 북쪽으로 솟아 올라간 익랑은 각각 동족침사(東足砧舍)와 서협랑(西挾廊)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없다. 행낭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등으로 쓰이고 있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 대문 동쪽으로 작은문이 있어 안주인이 출입했다고 한다.

건축 당시 이 행낭은 대문을 중심으로 각각 12칸이었으나 지금은 동쪽이 11칸, 서쪽이 7칸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