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기행]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장성 남문 창의비(南門倡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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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기행]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장성 남문 창의비(南門倡義碑)..

by 정산 돌구름 2014. 6. 24.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장성 남문 창의비(南門倡義碑)..

 

○ 탐방일 : 2014년 6월 24일

○ 소재지 : 전남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 714

○ 남문창의비 소개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1985년2월25일)로 지정된 높이 168cm, 너비 63cm의 비이다.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현 북일면 오산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국한 의사들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802년(순조 2년) 호남의 유림들이 건립하였다.

  비문은 판서 홍양호(洪良浩)가 지었고, 서자는 황승원, 전서자는 김부도이다.

  비는 사각의 좌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씌웠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익공식이다.

  비의 명제가 2개 기록되어 있는데, 전면 중앙에 종서 해서체로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라고,

  후면과 좌우측 양면의 비신 상단에 횡서 전서체로 “유명조선호남오산남문창의비(有明朝鮮湖南鰲山南門倡義碑)”라 하였다.

  오산 남문 창의는 1592년(선조 25년)7월20일에 김경수(金景壽)·기효간(奇孝諫)·윤진(尹軫) 등이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11월 초단(草壇)을 설치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김경수를 맹주로 추대하고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았다.

  그 후 의병군은 북으로 진군하여 직산·진성·용인 등지에서 많은 왜병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비에 새겨진 77선열 가운데 승려 9명, 노복 1명도 기록되어 있다.

  1차 남문창의는 1592년 8월 24일 김경수(金景壽)를 맹주로 하여 김홍우(金弘宇)·기효간(奇孝曾)·이수일(李守一) 등이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일어났다.

  순창현감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아 직산읍(稷山邑)에서 적을 무찔렀다.

  고창에서는 좌랑 김홍우를 중심으로 두 아우 김광우, 김덕우와 박안동, 서홍도, 조여일 등 138명의 의사와 군량미 59석,

  문수사의 승려 처한을 비롯하여 16명의 승군이 장성현 남문 의병청에 집결하였다.

  무장에서 김성진, 김기수, 김란, 김경우, 김국서 등 190여 명이 군량미 68석을 모아 거의에 참여하였고, 흥덕에서 서연을

  중심으로 40명이 군량미 20석을 모으고 연기사의 승려 자혜를 비롯한 17명의 승군이 참여하여 고창 지역에서는 458명의

  의사와 173석의 군량미, 마태(馬太) 21석, 말 11필, 소 5두를 모아 장성현 남문 의병청에 임하였다.

  의병소 맹진(盟陣)의 편제는 맹주 김경수, 의병장 김제민, 부사 기효간, 참모 김홍우, 도유사 서연이 임명되었다.

  장성 남문창의 주축 인사 77명 가운데 14명이 고창 출신이었고, 고향에 돌아온 의병들은 일본과 조정의 협상을 관망하였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김경수는 1593년 5월 29일 다시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였으며,

  장성현감 이귀는 관군 40명을 선발하고 읍병(邑兵) 300명을 조련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여 2차 남문창의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