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약사암(藥師庵)과 마애보살입상(磨崖菩薩立像)..
○ 탐방일 : 2013년 8월 17일(토)
○ 소재지 : 경북 구미시 남통동 산24-6번지
○ 약사암과 마애보살입상 소개
신라 눌지왕 때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유물은 발견된 바 없다.
1618년(광해군 10년) 간행된 <일선지(一善誌)>, 1799년(정조 23년) 간행된 <범우고(梵宇攷)>에 고찰(古刹)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嶺南鎭誌)>에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城內) 삼리(三里)에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중기에 사명 유정(四溟 惟政)스님이 금오산성을 축성하면서 중창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두칸의 법당은 모두 근대에 들어 세운 것이고, 법당 좌측에 요사를 지었으며 앞 봉우리에 조교를 가설하여 종각을 세웠다.
약사암은 약사전·삼성각·일주문·종각·요사로 구성되어 있다.
1985년 기암절벽 아래에 남향으로 건립한 약사전은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약사암의 중심법당이다.
내부에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석조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362호)이 모셔져 있다.
상호는 원만하며 편단우견의 대의를 착용하고 원만한 상호에 비하여 불신 표현이 미치지 못하다.
현재 불상의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으나 이것은 후대에 후보하면서 약사여래로 신앙되고 있을 뿐 원 상태는 선정인의 손갖춤으로
약사여래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좌우로는 일광과 월광보살을 협시로 봉안하였는데 모두 근세 것이다.
뒷면에는 최근 조성한 후불탱화와 신중탱, 독성탱 등이 있다.
지리산 석불삼구 중 일구가 법당에 봉안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1935년 우상학이 지은 <약사암중수기>에 따르면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石佛) 3구(軀)(三兄弟佛) 가운데 1불(佛)이라고 한다.
그 중 1구는 김천 직지사 삼성암(三省庵)에 봉안하고, 다른 1구는 성주 수도암(修道庵)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고,
그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로 맞배집으로, 안에는 약사여래후불탱과 산신탱, 독성탱이 있는데 모두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 금오산 마애보살입상(磨崖菩薩立像)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90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5.55m이다.
이 불상은 각을 이룬 암벽에 남향하여 조각되었는데, 동체의 중심이 모서리에 오게 하고 양쪽은 좌우 벽에 높은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두상과 어깨 부분은 원각에 가까우며 두신광과 대좌도 겸비하고 있다.
불상의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이 있으나 마멸로 조각이 화려하지 못하다.
얼굴은 풍려한 원만형(圓滿形)으로 두 눈과 코·입 등이 정제되었다.
목에 돌려진 삼도는 양어깨 위에까지 길게 드리워진 양쪽 귀와 잘 어울려 위엄이 있어 보이면서도 자비가 넘친다.
상체는 반라형으로 왼쪽 어깨에 걸쳐 가슴 앞으로 내려진 법의의 의문(衣文 : 옷자락 무늬)이 보인다.
양쪽 팔에 걸쳐 양옆으로 펼쳐진 의문과 배로부터 원호(圓弧)를 그리면서 양쪽 다리에까지 내려진 의문은 유려하며, 양쪽 발의 바로
위까지 늘어진 법의의 의습(衣褶 : 옷주름)도 또한 유려하다.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 부분으로 내리고 있으며, 왼손은 팔꿈치를 약간 구부려 손을 펼쳐 들면서 천의 자락을 잡은 듯하여,
전체 몸매가 왼쪽으로 약간 비튼 듯한 느낌을 주고, 양쪽 발은 발가락이 뚜렷하며 풍려하다.
광배는 이중의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서 원형 두광의 내부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고 안으로 굽어진 외광 머리부분은 보주형이다.
신광도 두광과 같이 이중으로 되었으나 내부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대좌는 입상을 중심으로 하여 반원으로 조성되었다.
측면에는 11엽(葉)의 단판복련(아래로 향하고 있는 홑잎의 연꽃잎)이 조각되었으며, 판 내에는 화판(花瓣)의 장식 문양이 뚜렷하다.
이 불상은 각 부의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조성 연대는 10세기 이후로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몸매는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이나 군위 삼존석굴(국보 제109호)의 협시보살상의 몸매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이와 같이 암벽의 모서리 합각면에 불상이 조각된 예는 아직 발견, 조사된 바가 없을 정도로 특이하다.
이 불상의 앞쪽 대지에는 자연석의 주초도 보이고 주변에 많은 기와 파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이 세워졌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일선지 一善誌>에 금오산 최상봉 아래에 보봉사(普峰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절터로 추정되기도 한다..
○ 금오산 용샘의 전설..
금오산 마애석불입상 옆 절벽 밑에 옹달샘이 있었는데, 이 샘에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무기는 길고도 모진 천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뒤 마침내 바라고 바라던 등천(登天)의 날이 왔다.
어느 따뜻한 봄날, 바위를 타고 천지가 진동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서서히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그 때 공교롭게도 언덕 아래 양지편에서 나물을 캐던 아낙이 뜻하지 않게 굉음과 함께 이무기의 등천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방정맞게도 그만 “저 이무기 봐라!”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천년동안 용이 되고자 살아온 이무기는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원통하게도 용이 못되고 철퍼덕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천애의 낭떠러지 절벽에는 떨어질 때의 흔적으로 홈이 패고 비늘 자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무기가 떨어질 때 생긴 홈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지금도 용샘이라 불려지며, 나병환자가 이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고 전한다. 나병환자가 이곳에 있던지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온다해서 한발이 심할 때는 인근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와 문둥이를 내쫓고 또 묘를 파헤치면 그날밤부터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하는 영험있는 곳이라 하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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