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3. 8. 17(토)
○ 기상상황 : 구름 조금 맑고 무더운 날씨(32~34℃)
○ 산행인원 : 광주희망토요산악회(36명) - 회비 34,000원(목욕비 포함)
○ 산행코스 : 주차장~해운사~도선굴~명금폭포~할딱고개~마애불~약사암~금오산~제1폭포~제4폭포~주차장
○ 거리 및 소요시간 : 약11.5Km/6시간15분
주차장(10:30)~채미정(10:35~45)~케이블카매표소(10:53)~대혜문(11:10)~해운사(11:20~30)~명금폭포(11:37~42)~
도선굴(11:48)~할딱고개(12:05~15)~너덜겅(12:55)~오형석탑(13:05~35)~마애석불(13:40~45)~약사암(14:00~25)~
현월봉(14:33~40)~성안갈림길(15:00)~성안습지(15:05)~고인돌(15:14)~금오동천1.7km지점(15:42~47)~제1폭포
(16:12)~제4폭포(16:30)~주차장(16:45)
○ 주요봉우리 : 금오산 현월봉(976.6m)
○ 교통상황
비엔날레(07:00)~88고속~지리산휴게소~서대구TG~금호JC~경부고속~구미IC~906번~주차장(10:25)
금오동천주차장(17:00)~한증막(17:10~18:30)~4번~남김천IC~45번고속~고령JC~88고속~비엔날레(21:30)
○ 산행지 소개
금오산(金烏山 976.6m)은 경북 칠곡군과 구미시, 김천시의 경계에 놓인 산으로 주봉인 현월봉(懸月峯)과 약사봉(藥師峰),
영남8경 중의 하나인 보봉(普峰)이 소백산맥 지맥에 솟아 있다. 산세는 동북쪽 구미방향이 험준하고 서남쪽은 부드러운 육산이다.
오래 전부터 대본산으로 불렸고 고려 때는 중국 허난성의 숭산을 닮아 남숭산으로 불렸다.
동남쪽으로 팔공산(1,192.9m)과 마주보고 있고, 남쪽으로 수도산(1,327.4m)과 가야산(1,430m), 북쪽으로 황학산(1,111.4m),
서북쪽으로 삼도봉(1,172m), 민주지산(1,241.7m)과 맥을 같이 한다.
정상은 하늘로 비상하려는 새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고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 모습 같다하여 와불산(臥佛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금오산은 예로부터 태양 안에 산다는 황금 까마귀 금오, 이른바 삼족오가 노닐었다는 전설과 함께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상은 비교적 평탄한 분지를 이루나 산세가 높고 기이하며, 고려시대에 자연 암벽을 이용해 축성된 길이 2km의 금오산성이 있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방어하는 요새지로 이용되었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금오산은 옛부터 군사요충지로 한양과 부산을 잇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산이어서 고려 때부터 조선말까지 군창과
군영이 있었던 굳건한 산성과 산성마을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군관민이 함께 피난을 했던 금오산성은 외성과 정상 아래 너른 분지를 에워싼 내성으로 꾸며 있다.
깊은 골짜기와 뾰족한 봉우리,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산등성이, 바위로 이루어져 기암절벽에 급경사가 많고,
산 아래에서 대혜(명금)폭포까지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고 계곡이 잘 발달되어 경관이 뛰어난 산으로, 해운사·약사암·금강사·법성사·대원사 등의 고찰과 고려말의
충신 야은 길재(吉再)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채미정(採薇亭), 신라 도선국사가 수도하던 도선굴(道詵窟)을 비롯해 높이 38m의
명금폭포·세류폭포 등이 있다.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 오봉동 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245호) 등의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많이 있다.
금오산은 1970년 6월 한국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78년10월5일 자연보호헌장을 처음으로 공포한 곳이기도 하다.
기암절벽과 울창한 산림이 조화되어 경관이 수려하며, 해운사, 약사암 등 고찰과 마애보살입상, 선봉사대각국사비, 석조석가여래좌상
등 문화유산이 많고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점 등을 고려하여 산림청 100대명산에 선정되었다.
또한, 수려한 경관으로 인기있어 한국의 산하 인기명산(2010~11년 2년간 접속통계) 100산 중 64위에 랭크되어 있다..
○ PROLOGUE
산림청 선정 100대명산인 금오산을 찾아 지난 갈기산 이후 모처럼 희망토요산악회와 함께 하였다.
희망토요와는 지난해 포항 내연산, 갈기산에 이어 세번째.. 조용한 분위기가 다시 찾게 만든다.
7시에 비엔날레를 출발하여 3시간30분여를 달려 구미 금오산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산행준비를 하고 바로 옆 채미정을 둘러보고 나오니 일행들은 흔적도 없고, 한참을 올라 해운사에서 10여분을 소비하였다.
명금폭포에서 가파르게 올라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 한참을 오르니 우리팀들의 모습이 보이고 앞질러 할딱고개에서 오형돌탑에
오르는데는 무더위속에 바람도 없이 고난의 연속이었다.
보물 제490호인 마애여래입상을 보고 약사암을 정상에 오르니 4시간이 소요되었다.
정상에서 성안을 둘러보고 계곡을 따라 내려서 제1폭에서 4폭을 둘러보지만 오랜 가뭄탓인지 폭포소는 없고 오염된 물에서 뛰노는
이들이 처량하기까지 하였다.
계곡욕을 포기하고 한증막에서의 사우나는 참으로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하였고 뒤풀이도 꿀맛이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무더운 날씨였지만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한 즐거운 하루였다.
공원주차장에서 간단히 산행 준비를 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우측으로는 칼다봉 능선과 좌측 가야할 현월봉이 바라보인다..
멀리 당겨본 현월봉..
금오산 도립공원 안내도에서 가야할 길을 가늠해 보고..
바로 옆 채미정...
채미정(採薇亭)...
야은 길재 선생이 백이숙제의 덕을 사모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금오산 기슭에 그 높은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44년(1768)에 세운 정자이다...
채미정이란 명칭은 중국의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으로,
야은이 고려가 망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한데서 유래하였다.
야은이 세종 1년(1419)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일컫게 되었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이 기둥만 16개이다.
앞면과 옆면 모두 3칸씩으로, 중앙에 방을 만들고 사방을 마루로 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각...
안에는 길재선생 유허비가 서있다..
경모각..이곳에는 숙종이 직접 써서 선생의 충절을 읊은 오언시(五言詩)를 경모각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유적이 있으나 오랜 세월에 황폐화 되어 1977년 정부에서 보수하였고, 현재는 잘 정돈해 놓았다..
오언시와 초상화..
채미정..
채미정 앞 징검다리..
채미정 입구..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는 회고가(懷古歌)..
야은 길재는 고려왕조의 몰락으로 인하여 봉모(奉母)를 핑계로 현실을 도피하여 선산(善山)에서 은거하였는데,
조선 정종 2년(1400)에 조정에서 태상박사(太常博士)의 직을 주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른다..
금오산도립공원 안내도..
금오산은 1970년6월 한국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78년10월5일 자연보호헌장을 처음으로 공포한 곳이기도 하다..
금오산케이블카.. 해운사까지 운행한다..
조각품도 있고..
돌탑21C..
지난 1999년 말, 새천년을 맞아 금오산 오르는 길목에 21기의 돌탑을 세웠다고 한다..
금오동학(金烏洞壑)..
커다란 바위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금오산의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각 글자의 길이는 세로 90~100cm, 가로 50~70cm 정도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이 글씨는 조선 중기의 명필로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 불렸다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필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금오산성 외성의 대혜문 아치에 이른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성터로 여말 왜구의 침입 때 지역 백성들이 성을 지켰다고 한다.
정상부와 계곡에 이중으로 축조한 산성으로 외성 3,700m, 내성 2,700m규모이며, 태종 10년(1401년)새로 정비했다..
잠시 오르면 해운사 앞에 이르고 우물인 영흥정에서 목을 축인다..
지하 168m 암반층에서 솟아나는 맑고 신선한 양질의 지하수로 1일 120톤이 나오는 알카리성 석간수이다..
해운사 입구에 고승 나옹선사의 7언시였던 청산은 나를 보고..가 쓰여있다..
해운사(海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1925년 중창하여 해운암(海雲庵)이라 하였으며, 1956년 3월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
아담한 사찰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고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좌상을 비롯하여 1992년에 봉안한 후불탱화·칠성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만든 석조나한상이 있는데, 이를 석조수행대사입상(石造修行大師立像)이라고도 부른다..
포대화상...
삼성각(三聖閣).. 3분의 성인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보통 삼성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을 말한다.
해운사에는 아직 칠성탱화(七聖幀畵)를 모시지 않았다...
좌측에는 산신탱화로 산의 신령으로 숭배되어온 호랑이를 백발의 산신(山神)으로 변화시켜 큼직하게 배치하고
옆에는 다정한 포즈에 애교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진짜 호랑이를 그렸다.
우측은 독성탱화(獨聖幀畵)로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은 아라한으로 열반하지 않고 중생을 구제하는 나한이다.
보통 독성을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조각불들..
약사유리광여래불..
가운데 합장하고 있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운사 일주문..
안에는 4대천왕이 모셔져있다..
잠시 오르면 대혜폭포(大惠瀑布)..
해발 400m지점에 낙차 27m의 폭포로 사계절 끊임없이 떨어지는 장관은 산의 위용을 한층 더한다.
금오산성 안에는 1595년경 임진왜란 당시 만들어진 아홉 개의 우물(九井)과 일곱 개의 못(七澤)이 있어 거기서 비롯된 큰 계곡을
대혜계곡이라 하였고, 그 곳에서 형성된 폭포를 대혜폭포라고 하였다.
또, 그 물이 여울을 이루어 구미지방의 용수공급에 큰 혜택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대혜폭포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대혜폭포는 명금폭포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1935년쯤 경북 도지사인 일본 사람이 이곳을 찾아 주변경관과 물소리에 매료되어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차가운 기운에 정신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사물은 희미한데, 쾅쾅 울리는 소리만 있어 ‘금오산을 울리는 소리’라고 탄복하고 자기의 시상(詩想)이
사라지기 전에 석수(石手)를 불러 암벽에 ‘명금폭(鳴金瀑)’이라 새겼다고 한다.
그 후로 바위에 새겨진 이름이 많은 등산객들에 의해 전해지면서 오늘날 명금폭포라고도 불리고 있다.
.
폭포 아래에 형성된 넓은 소(沼)는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기는 곳이라 하여 욕담(浴潭) 또는 선녀탕이라고 한다.
인조 때의 학자 여헌 장현광의 문도들이 연중행사처럼 폭포를 찾아 목욕을 즐기고 시회(詩會)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폭포 옆 암벽에는 ‘욕담(浴潭)’이라는 예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장현광의 문도 중 한사람인 김공(金羾)이 폭포 근처 도선굴 아래에 움막을 짓고 학문을 닦다가 새긴 것이라 한다.
대혜폭포를 흐르는 물은 남통천이라 불리며 금오산저수지의 수원이 되어 금오천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한다.
1977년9월, 박정희전대통령이 대혜폭포에 도착해 깨진 병조각과 휴지가 널린 것을 보고 청소하며 바위틈에 끼인 병조각을 주웠다.
자연보호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고 이듬해 자연보호헌장이 선포됐다고 한다...
도선굴로 가는 길..
도선굴..
대혜폭포 우측 절벽의 천연동굴로 신라 말 도선이라는 고승이 이곳에서 참선하여 도를 깨우쳐 풍수지리설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야은 길재선생이 세속을 떠나 이곳에서 수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굴의 폭과 높이는 각기 5m 쯤, 길이는 10m 쯤 된다..
암벽에 뚫려 있는 천연 동굴로 큰 구멍이라는 뜻으로 대혈(大穴)이라 하기도 한다.
최인재의 <일선지(一善誌)>에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깊이가 24척으로, 그 안에 얽어 만든 집[構屋]이 두칸 있었다.”고 한다.
도선굴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다른 이름인 대혈이라고 불렸던 것은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굴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이곳에서 눈아래 펼쳐지는 경관 또한 일품이다..
임진왜란 때는 인동(仁同)·개령(開寧)의 수령과 향민 500~600명이 피난하였는데,
당시 바위틈에 쇠못을 박아 칡이나 등 넝쿨로 이동했던 상황이어서 왜군은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의 통로는 1937년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도선굴..
가파르게 올라 할딱고개..
오르는 길이 험해서 이 고개를 오를 때 숨이 할딱거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할딱고개 앞의 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공룡의 등줄기를 닮은 칼다봉 능선이 이어지고, 그 아래 대혜폭포와 도선굴이 매달려 있다..
금오저수지와 구미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금오저수지는 1947년 6월에 준공된 저수지로 총저수량은 2,124만톤이며, 현재 보트장이 마련되어 있다..
일소일소(一笑一少)의 장승..
암벽의 글씨들..
갈림길에서 힘들지만 마애석불 방향으로..
너덜지대를 지나고..
오형석탑과 마애불 갈림길.. 좌측은 오형석탑을 보고 다시 올라서야 한다..
오형돌탑..
할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이 담긴 돌탑이다..
한 할아버지가 학교도 들어가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손주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0년동안 인근 돌밭에서 손수 돌을 날라 쌓은 것이라고 한다...
금오의 ‘오’와 손주 이름 형석의 ‘형’를 넣어 '오형돌탑'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망이 좋아 구미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
잠시 오르면 마애석불입상..
1968년12월19일 보물 제490호로 지정된 금오산 마애보살입상(磨崖菩薩立像)..
.높이 5.55m인 이 불상은 거대한 암벽 모서리에 조각된 석불로, 불상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이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었으며, 보존 상태도 비교적 좋다...
머리에는 3면보관(三面寶冠)이 있으나, 마멸로 조각한 장식은 분명하지 않다.
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코·입 등도 원만하게 처리하였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명확하게 나타났으나,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인 것이다.
어깨의 선은 매우 원만하고 자세도 좋지만, 가슴·팔·하체 등은 둔탁하게 처리하였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였으며, 왼손은 팔굽을 약간 굽히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한 자세로 옷자락을 잡고 있다.
발은 곧게 서 있으며, 발가락은 매우 크고 듬직하다...
입상(立像) 앞면의 평평한 대지에는 현재 기둥의 초석이 있고 기와 조각들도 흩어져 있으며,
암벽 자체에도 목조 가구(架構)의 흔적이 보이므로 사찰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보봉사(普峰寺)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얼굴·신체·옷무늬·광배 등에서 9세기 보살상보다 더 발전한 형식화가 나타나 있으므로, 보다 후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스님들이 쉬고있는 곳의 전설의 용샘..
금오산 마애석불입상 옆 절벽 밑에 옹달샘이 있었는데, 이 샘에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무기는 길고도 모진 천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뒤 마침내 바라고 바라던 등천(登天)의 날이 왔다.
어느 따뜻한 봄날, 바위를 타고 천지가 진동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서서히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언덕 아래 양지편에서 나물을 캐던 아낙이 뜻하지 않게 굉음(轟音)과 함께 이무기의 등천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방정맞게도 그만 “저 이무기 봐라!”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천년동안 용이 되고자 살아온 이무기는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원통하게도 용이 못되고 철퍼덕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천애의 낭떠러지 절벽에는 떨어질 때의 흔적으로 홈이 패고 비늘 자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무기가 떨어질 때 생긴 홈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지금도 용샘이라 불려지며,
나병환자가 이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고 전한다.
나병환자가 이곳에 있던지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온다 해서 한발(旱魃)이 심할 때는 인근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와 문둥이를
내쫓고 또 묘를 파헤치면 그날 밤부터 틀림없이 비가 온다고 하는 영험 있는 곳이라 하여 가물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마애불상에서 오르면 법성사 갈림길.. 약사암으로 향한다..
잠시 오르면 약사암이 나타난다..
약사암 종각..
약사암(藥師庵)..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금오산 약사봉 아래 있는 암자이다.
지리산 석불삼구 중 일구가 법당에 봉안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유물은 발견된 바 없다..
1985년 기암절벽 아래에 남향으로 건립한 약사전은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약사암의 중심법당이다..
내부에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1935년 우상학이 지은 ‘약사암중수기’에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기 중 1기를 이곳 약사암으로,
나머지 2기를 수도산 수도암과 황악산 삼성암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쓰여 있다.
석조여래좌상 좌우로 일광·월광보살이 협시되어 있으며, 후불탱·신중탱·독성탱 등의 불화가 걸려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362호인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대웅전 본존불로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개금이 두텁게 되어 있으나 그 재질은 화강암으로 보인다.
<약사암중수기>에 따르면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石佛) 3구(軀)[삼형제불(三兄弟佛)] 가운데 1불(佛)이라고 한다.
그 중 1구는 김천 직지사 삼성암(三省庵)에 봉안하고, 다른 1구는 성주 수도암(修道庵)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약사암에서..
약사암 삼성각..
의상대사와 약사암의 전설..
의상대사가 처음에 금오산 동쪽 바위 밑에 움막을 치고 그 속에서 수도 성불할 때 선녀가 하루 한 끼의 밥을 내려다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 암자를 지었으니 곧 약사암(藥師庵)이다.
지금까지 수도승은 물론이요 일반의 신방(蜃訪)도 많으며 이 암자에 참선해야 극락에 갈 수 있다하며 음력 4월8일 부처님 오신날에는
백발노인들의 참선함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성불한 의상은 뒤에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동해 화엄의 대종사(大宗師)가 되었다.
약사암(藥師庵)이란 바로 약사여래에서 기인된 명칭이며 또한 민족의 거사인 3․1운동 때 33인의 대표로 만해 한용운과 같이
불교계의 대표로 백용성 스님이 이곳에서 참선득도(參禪得道)했다고 전한다..
약사암 일주문을 나서고..
이어 헬기장을 지나..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에 이른다..
현월봉은 초생달이 걸려있는듯한 모습을 보고 지은 이름이라고..
정상에는 흉물스럽게 시설물들이 빼곡하다..
구미와 칠곡의 경계를 이루며 이어가는 능선..
건너편에서 바라본 약사봉과 약사암..
참으로 아름다운 조망이다...
금오동천 방향으로 내려선다..
잠시 성안을 둘러보러 우측으로 향한다..
성안은 옛부터 일굴 땅과 물이 있어 화전민들이 생업을 했다고 한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1868년(고종 5년)에 금오산성을 수축하였음을 기록해 놓은 비석이다.
정상에서 약 600m 떨어져 있는 성안의 동쪽 경사면에 세워져 있다.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1868년 이후 세운 것이다.
비석은 장방형 비석 받침과 팔작지붕형 지붕돌을 갖추고 있으며 높이 150cm, 폭 62cm, 두께 26cm이다.
윗면에 가로로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라고 전서로 새겨져 있고, 비문은 세로의 행서로 적혀 있다.
비석 앞뒷면으로 새겨진 글씨는 모두 23행 643자로 통정대부전행공조참의 박문현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이능화가 썼다.
비문에는 1868년 흥선대원군이 허물어진 금오산성을 수축하였는데 관아와 군창을 새로 지어 1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요새지가
되었고, 누곽의 규모가 백여 칸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번성기에는 성안에 40여가구가 살았다고 전하며, 6.25전쟁 때는 미공군과 국군이 주둔했었다고 한다..
1970년대 화전민 정리사업으로 사라졌다. 이곳에서 수확한 감자로 만든 감자술이 유명했다 전한다..
다시 돌아와 고인돌을 지난다..
늪지대가 나타나고..
태고의 신비처럼 자연 그대로이다..
계곡은 메말라있다..
한참을 내려서니 부드러운 숲길로 이어지고..
우측 11폭포 이정표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선다..
제1폭포와 선녀탕..
천상의 제를 올리기 전에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던 곳으로 어느날 8선녀가 목욕을 하기 위해 용마를 타고 내려왔다.
선녀가 목욕을 하는 동안 타고 온 용마는 제2폭포인 구유소에서 물을 먹고, 제3폭포인 용시소에서 목욕을 하였다.
그런데 용마 한필이 멀리 사라져 한 선녀가 승천하지 못하게되자 선녀는 매일같이 선녀탕 좌측의 폭포에서 상제께 눈물로 기원하였다.
훗날 사람들은 선녀가 눈물을 흘리던 곳이라 하여 눈물폭포라 전해져오고 있으며, 선녀탕과 눈물폭포는 금오산의 자랑거리이다...
제2폭포인 구유소..
제3폭포인 용시소..
제4폭포인 벅시소..
계곡을 따라 내려서면 식당지구가 나타난다..
물도 없는 메마른 계곡이지만 사람들이 북적인다..
상가지대를 지나 내려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을 떠나 목욕탕으로..
여름철 한증막에는 우리들이 전부이다..
땀흘린 산행 후의 사우나, 그리고 술한잔이 곁들인 뒤풀이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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