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2일...
해금강과 외도를 유람하고 나와 남해로 향하였다.
사천에서 삼천포~창선대교를 거쳐 남해 금산과 보리암, 그리고 독일마을을 보고 집으로 향하였다.
제주를 제외하고는 이제는 모두 육지와 연결된 다리를 통해 섬이라기보다 육지와 더 가까워진 섬들...
제주도, 거제도와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 남해도....
지금은 마늘이 특산물로 알려졌지만 본래 유자, 치자, 비자가 많은 삼다(三多) 또는 삼자(三子)의 섬이요,
거지, 도둑, 문맹인이 없는 삼무(三無)의 고장이며, 삼치(멸치, 갈치, 삼치)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남해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금산(錦山)...
금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기암괴석들로 뒤덮여 절경을 이루고 있다.
신라 원효대사가 보광사라는 절을 지어 보광산이라 불려오던 것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서 100일 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어 온 산을 비단으로 덮어 준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조선개국 후 이를 실행하기 위해 중신들과 회의를 가졌으나 중신
한사람이「우리나라에는 그 산전체를 덮을 만한 비단이 없으며, 비단으로 산을 감싼 이후에도 몇년이 지나지 않아 누더기가
되므로 산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금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방장산(지리산)과 자웅을 겨루고 중국의 남악(南嶽)
에 비견되기도 했으며,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소금강산」혹은 작은「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산이 작은 봉래산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명산으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앞에 두고 우뚝하게 솟은 돌산으로 속세를 떠난 신비감을 주기 때문이다.
남해 금산은 조망도 좋고 산 자체가 가진 멋도 뛰어난 대표적인 산이다.
제주도, 거제도, 완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네번째 큰 섬인 남해는 「가는 곳마다 관광지」라 할 만큼 한려수도 해상공원과
금산을 비롯,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전적지 및 유적지 등 둘러볼 곳이 많다.
금산에는 비둘기를 닮은 봉우리, 개바위, 날일(日)과 달월(月)자를 닮았다는 일월암, 자라처럼 생긴 흔들바위, 닭바위 등 갖가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가득하다.
대장봉, 사자암, 향로봉, 흔들바위, 쌍홍문, 음성굴 등이 울창한 숲이 눈앞에 보이는 남해바다와 조화를 이루어「금산 38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정상 아래에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소재하고 있다.
등 뒤 아래쪽의 정수리가 네모 난 기둥 형상의 바위 중 왼쪽 아래 것은 촛대바위, 오른쪽의 키가 좀 더 큰 것은 향로바위이다.
역시「금산 38경」중 하나지만 이 두바위는 이곳보다는 나중에 상사바위나 보리암 앞뜰에서 바라보아야 그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좌선대를 내려와 서쪽 길로 더 나아가면 상사바위가 있다.
앵강만과 미조항이 한 눈에 보이는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은 호남지방과 생활권을 같이했던 남해의 옛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돌산에 사는 한 총각이 남해에 고기를 잡으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과수댁을 사모한 끝에 상사병에 걸려 죽을 처지에 있었다.
이를 안 과수댁은 상사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이 바위에서 총각과 운우의 정을 나눈 뒤 둘이 백년해로했다는 전설이다.
금산에서 가장 큰 암부인 이 상사암에서의 금산 조망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금산 정상부터 흘러내린 암봉이 대장봉이며, 그 아래 절묘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암자 보리암, 그리고 쌍홍문,
오른쪽 옆의 거대한 절벽 만장대, 그 앞쪽으로 삼신산의 네 선녀 전설이 얽힌 네 개의 기암이 차례로 늘어선 사선대,
네모난 긴 석주 향로봉 등 우열을 따지기 어려운 기암들이 승경을 이루었다.
그 오른쪽 아래는 크고 작은 한 무리의 섬들이 그야말로 그림 같은 바다 풍경을 펼쳐 보인다.
상사암 서쪽 너머로 고개를 내밀면, 저 아래 서포 김만중이 유배 중에 사씨남정기 등을 쓴 자리인 노도 근해를 배경으로 온갖
기이한 형상의 바위가 연이어진 만물상 암릉이 또한 절경이다.
상사암을 지나 능선을 따라 곧장 북상하여 정상을 향해 오르면 널찍한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 남쪽으로 돌을 던지지 말라는 팻말이 있는데, 이 암부는 아래 좌선대나 상사암에서 보면 어미돼지가 새끼돼지를 안은 것
같은 형상의 저두암이다.
저두암 바로 아래의 산중 민가는 금선산장으로 금산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종종 묵어가고 밥도 파는 곳이다.
산장 동쪽 옆의 높게 솟은 바위가 제석봉이요, 그 아래 고개를 치켜든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천구암으로 밀면 흔들린다고 하여
흔들바위라고도 부른다. 거북이 턱을 45도 방향으로 짧은 템포로 강하게 반복해서 밀어야 흔들린다.
왼쪽 샛길로 100m만 가면 금산대종교에서 세운 단군성전이 있다.
정상 직전의 길 왼쪽에도 또한 금산 38경의 하나인 기암이 있는데 버선형상이라 하여 버선바위이다.
명필의 글씨가 쓰여 있다고 하여 문장암, 혹은 명필암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중종 때의 대학자 주세붕이 이 정상에 올라보고 바위벽에「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란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 뜻은「홍문을 경유하여 금산에 올랐다」고도 하고, 「홍문이 있으므로 금산은 최고의 명산이 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문장암 옆 옛 봉수대가 돌탑으로 복원돼 있는 금산 정상에 서면 온갖 기암 무리와 저기 미조리 앞의 섬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망대도 「금산 38경」에 넣은 것은 물론 이곳에서의 조망이 특히 뛰어난 데에 점수를 주어서다.
정상에서 남쪽 길로 내려가면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음기도도량으로 이름 높은 보리암(菩提庵)이다.
법당 아래쪽의 해수관음상 앞 삼층석탑 옆으로 나선 뒤 법당 쪽을 바라보면 기암들의 조화로움에 장탄식의 찬사를 보낸다.
법당 뒤에 층암절벽을 이룬 거대한 암봉이 대장봉, 그 왼쪽 아래, 흡사 좌대에 올려둔 것 같은 구슬 모양의 둥근 바위는 농주암,
그 왼쪽에 농주암을 옹위하듯 솟은 암봉은 그 형상이 화려한 꽃과 같다는 화엄봉이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절경 아닌 데가 없는 바로 이곳, 삼층석탑이 선 자리가 탑대라 하여 또한「금산 38경」중 하나다.
사람이 키를 견줄 만큼 자그마한 3층석탑은 그러나 신비한 기운이 서려있다.
하단부 남쪽 면에 나침반을 대보면 자침이 남과 북을 정반대로 바꾸어 버린다.
석탑 하단부의 석질이며 석탑 부장품을 조사해 보아도 자성이 없었다고 하니 신기할 뿐이다.
보리암은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보광사의 부속암자였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보리암에는 두 가지 연기설화가 전해진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아들인 인도 중부 아유타국 허황옥공주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장유선사가 세웠다고 하는 설화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 사이에서 열 왕자를 낳았는데 그중 일곱 왕자를 장유선사가 데리고 출가를 했다는 것이다.
일곱왕자를 데리고 출가한 장유선사가 거쳐 간 곳은 영남일대에 많이 있는데 김해 장유암은 그 확실한 사적지이고, 가야산과
지리산의 칠부처가 모두 장유선사의 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장유선사가 처음 찾아든 곳이 가락국이 자리잡고 있는 김해에서 멀지 않은 이 금산 보리암이라는 것이다.
장유선사는 금산의 천태만상의 변화에 매혹되어 보리암에 터를 잡아 아유타국에서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지금의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때의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원효대사 창건설이다. 원효대사가 이산의 승경에 끌려들어 왔는데, 온 산이 마치 방광(防光)하는 듯 빛났다고 한다.
초옥을 짓고 수행을 하던 원효는 이곳에 보광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후 보광사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사찰을 둘러싼 산의 이름을 금산이라 부르게 했으며,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으면서 보리암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보리암 해수관음상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 하나는 꼭 들어주는데 자신을 위한 소원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소원을
더 들어준다고 한다..
독일마을..
60년대에 산업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되어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독일거주 교포들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제공해주고,
독일의 이국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2001년부터 조성한 곳이다.
경남 남해군은 사업비 약 30억 원을 들여 40여 동의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택지를 독일교포들에게 분양하고, 도로·상하수도 등의
기반시설을 마련해주었다.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와 동천리, 봉화리 일대 약 100,000㎡의 부지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주택들이 모여 있는 독일교포 정착마을은 산과 바다를 함께 조망할 수 있는 동천리 문화예술촌 안에 있다.
독일 교포들이 직접 독일에서 건축부재를 수입하여 전통적인 독일양식 주택을 건립하였는데 2008년 현재 29동의 주택이 완공되었다. 이 주택들은 독일교포들의 주거지로 또는 휴양지로 이용되며, 관광객을 위한 민박으로도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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