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기행] 전남문화재자료 제83호, 영취산 흥국사(興國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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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기행] 전남문화재자료 제83호, 영취산 흥국사(興國寺)...

by 정산 돌구름 2012. 4. 9.
[여수기행] 영취산 흥국사(興國寺)...

 

탐방일 : 2012년 4월 7일(토)

소재지 : 전남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 소개

  흥국사(興國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로 1984년2월29일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이 사찰은 고려 명종 25년(1195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라 하였다고 한다.

  즉, 변방의 국찰(國刹)로, 나라의 안정과 융성을 기원했던 기도처로, 불법 그 자체보다는 호국을 우선으로 한 사찰로 창건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고려시대의 젊은 학승이 백일기도를 마친 뒤, 기도의 회향축원문(廻向祝願文)에 흥국기원(興國祈願)은 빠뜨리고

  성불축원(成佛祝願)만을 넣었다고 하여 이 지방의 향리에게 벌을 받고 다른 절로 쫓겨났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그 뒤 1560년(명종 15) 조선 초기부터의 불교 탄압과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화된 것을 법수화상(法守和尙)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기암대사(奇巖大師)가 이 절의 승려 300여 명을 이끌고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으나, 절은 전화로 전소되었다.

  그 후 1624년(인조 2) 계특대사(戒特大師)가 중건하였고, 1690년(숙종 16)에 통일(通日)이 대웅전·팔상전 등을 중건하였다.

  1760년경에는 17방(房) 14암(庵), 총건평 624평에 승려 643명이 상주하던 큰 사찰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 면모를 갖추고 있다.

  1780년(정조 4)에는 승군 300명이 힘을 모아 선당(禪堂)을 중수했으며, 1803년(순조 3)에는 효암(孝庵)·충감(充鑑)·전순(典淳) 등이

  적묵당을 중건하였다. 1812년에는 승군이 심검당을 중수했는데, 조선 말기에 와서 흥국사에 주둔하는 승군이 해산되었다.

  1895년(고종 32) 경허가 무사전을 중창하였고, 1912∼1925년에 칠성각·안양암 등을 중수하였다.

  1985년 대웅전과 심검당을 해체 복원하고, 적묵당·봉황루·종각 등을 중건하였다. 최근에는 천불전·공복루·영성문 등을 지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396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1645년에 건립한 팔상전(八相殿)과 불조전(佛祖殿), 순조 때 건립한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원통전(圓通殿), 그 밖에 응진전·무사전(無私殿)·첨성각(瞻星閣)·적묵당(寂默堂)·심검당(尋劒堂)·노전(爐殿)·

  백련사(白蓮舍)·법왕문(法王門)·봉황루(鳳凰樓)·천왕문(天王門)·영성문(迎聖門) 등 15동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후불탱화는 1693년(숙종 19)에 천신(天信)과 의천(義天)이 제작한 것으로

  보물 제5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팔상전에는 석가의 일대기를 묘사한 팔상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불조전에는 고승의 영정 9점이 봉안되어 있으며, 봉황루에는

  범종과 흰 코끼리 위에 놓인 특이한 법고(法鼓)와 이 사찰의 연혁 및 신도활동 등을 알 수 있는 현판들이 있다..

 

 

1972년3월2일 보물 제563호로 지정된 흥국사 홍교(虹橋)... 

1639년(인조 17)에 축조되었으며, 화강석제로 높이 5.5m, 홍예구(虹霓口)의 너비 11.3m, 내면 너비 3.45m, 다리의 전체길이 40m이다...

 

물이 흐르는 암반 위에 편단석(扁單石)을 놓고 그 위에 동일형의 장방각재(長方角材)를 포개어 홍예를 구성하였는데,

앞뒤 양측 벽은 자연잡석을 불규칙하게 쌓아 올려 완만하고 긴 노면(路面)을 형성하고 있다.

홍예의 종석(宗石)은 돌출한 용두각석(龍頭刻石)이며, 정상부(頂上部)에는 장방각재를 복개하였다.

홍예를 구성하는 석재는 총 86 덩어리이며 홍예 및 석축 위에는 흙을 깔아 자연노면을 이루었고, 양변에 풀이 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홍예 석교 가운데 가장 높고 길다...

 

홍교를 건너 흥국사 입구에 들어서면 마애불이 자리잡고...

 

1인당 2천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나타나는 흥국사 부도밭...

흥국사와 여수·고흥·광양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승려들의 부도 12기가 일렬로 놓여 있다.

모두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다.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부도 형태였던 종형(鐘形)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많은 수가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원래 3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1986년 부도밭을 조성하여 한데 모았다고 한다.

탑명(塔銘)은 보조국사(普照國師)·중흥당 법수대사(中興堂法修大師)·취해당(鷲海堂)·능하당대사(凌霞堂大師)·응암탑(應庵塔)·

응운당(應雲堂)·경서당탑(敬西堂塔)·한월당(閑月堂)·금계당(錦溪堂)·호봉당(虎峰堂)·우룡당(雨龍堂) 등이며, 1기는 탑명이 없다.

 

흥국사 중수사적비(興國寺重修事蹟碑)...

2번에 걸친 중창불사 경위와 과정을 기록한 비석으로, 1703년(숙종 29) 최창대(崔昌大)가 비문을 짓고, 명필 이진휴가 글씨를 썼다.

높이 270㎝이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다.

귀부가 유난히 크고 균형이 맞지 않아 기이한 느낌이 들며, 거북 등껍질의 6각형 무늬가 뚜렷하지 않고 약간 불규칙한 형태이다.

이수의 하단에는 간단한 연화 문양 띠를 둘렀으며, 중앙에 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학적 느낌의 쌍룡이 조각되어 있다..

 

영취교를 건너면...

 

천왕문(天王門)...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앙하였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들은 수미산(須彌山) 중턱 지점의 동서남북에서 그들의 무리와 함께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한다고 한다...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그러나 가장 큰 의미는 수행자의 마음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 한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온몸에 동방을 나타내는 오행색(五行色)인 청색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대고 있거나 손바닥 위에 보석을 올려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붉은빛을 띤 몸에 화난 듯한 눈을 가지고 있다.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몸이 흰빛이며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입을 벌리고 있다.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검은빛을 띠며 비파를 잡고 줄을 튕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

 

봉황루는 1646년 처음으로 대루가 만들어졌고, 이후 1729년 팔도도총섭인 덕린, 자헌스님, 승통대장 찬미 등 300여명 스님들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정면 7간, 측면 5간의 대루였으나 일제강점기 현재와 같이 정면 5간, 측면 3간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의승수군유물전시관(義僧水軍遺物展示館)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승군의 유물을 전시하였다.

162평으로 지하 1층과 지상 2층에 걸쳐 보물1331호 괘불탱을 모시고, 전시실에는 보물1332호 수월관음도, 보물1333호 16나한탱 등

불화와 의승수군명단이 담겨 있는 상량문, 의승수군관련 서책 및 목판이 전시되어 있다...

 

범종각..

흥국사 대웅전(大雄殿)...

1963년9월2일 보물 제396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대웅전이 반야용선을 상징하므로 그 기단은 바다를 상징해서 거북, 게, 해조, 석등, 기단의 거북 등을 조각하고

대웅전의 정면 계단 양측 기단에는 용을 조각하여 반야용선을 호위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건축으로 갑석(甲石)이 있는 단층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3칸은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분할하고

각각 4분합(四分閤)의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빗살문은 상부를 구분하여 교창(交窓) 모양으로 의장하였으므로 문짝의 키가 높으며 따라서 주고(柱高)도 높이 잡았다...

 

공포(栱包)의 구성은 내외삼출목(三出目)으로 우설(牛舌)은 앙설(仰舌) 셋과, 수설(垂舌) 하나이다.

공간포(空間包)는 전면 주간(柱間)에 똑같이 3개씩 배치하였다.

내부의 첨차(檐遮)는 원호곡선이 짧으며 대들보 위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내부 중앙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하여 좌우에 협시보살을 모셨고, 고주 후벽에는 토벽에다 한지를 바른 후

백의관음반가사유상을 그려 모셨다. 또한 안쪽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꾸몄고,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짜고 중앙 뒤쪽으로

불단(佛壇)을 놓아 석가삼존(釋迦三尊)을 봉안(奉安)하였다.

불상이 앉아 있는 자리를 더욱 엄숙하게 꾸민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놓았다.

불상 뒷면에는 1693년(숙종 19)에 그린 ‘영산회상도(보물 제578호)’가 있다...

 

대웅전 후불탱화(興國寺大雄殿後佛幀)/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1693년(숙종 19)에 제작되었으며, 마(麻) 바탕에 채색한 세로 406㎝, 가로 475㎝. 1974년7월9일 보물 제578호로 지정되었다.

「쌍계사 팔상전영산회상도」(1687년, 보물 제925호)보다 6년 뒤에 만들어진 이 불화는 쌍계사불화와 가장 많이 닮은 작품이다.

가로가 70㎝나 더 넓은, 세로 구도가 아닌 가로 구도라는 점이 다르다.

이와 더불어 본존불이 화면에 비하여 작아지고 보살 등 협시들이 상대적으로 커졌기 때문에 협시의 수는 별로 많아지지 않았다.

다만 팔부중과 분신불이 각각 2구씩 늘었을 따름이다. 곧 4보살·6제자 등은 동일하다.

정묘한 키형 광배를 배경으로 결가부좌하여 앉아 있는 이 본존불은 뾰족한 육계(肉髻)나 계주 그리고 구슬처럼 표현된 나발까지도

쌍계사 불화와 흡사하다. 둥글고 풍만한 얼굴, 작고 부드러운 눈·귀·코·입과 이마의 특이한 머리카락 그리고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벗은 풍만한 상체 등도 쌍계사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다소 경직되어 원만한 면에서는 약간 떨어진다. 이것은 보살이나 협시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불화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색채 면이다. 붉은색인 경우 약간 탁한 연홍색이고 머리 광배(頭光)의 녹색이 지나치게

광택나는 녹청색이어서 색이 튀는 경향이 있는 등 은은하고 밝은 맛이 줄어든 것 같다.

그러나 꽃무늬나 옷주름 선 등에는 고상한 금선이나 금채를 구사하였다. 그래서 한결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것이 이 불화의 우수성을 더해 주는 요체가 아닌가 한다.

이처럼 이 불화는 원만한 형태와 고상한 색채의 조화로 17세기 후반기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된다...

화기(畵記)는 첫머리에 주상삼전하(主上三殿下)의 수만세(壽萬歲)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말을 적었고,

그 왼쪽에 이 그림을 그린 화원(畵員)의 이름이 적혀 있다...

 

 

대웅전의 문고리... 한 번 잡기만 해도 불가에서 말하는 삼악도(축생, 아귀, 지옥)를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624년 대웅전을 지을 때 편수로 참여한 마흔 한 분의 승려들이 천일기도를 하면서 누구든지 이 문고리 잡는 중생들이 삼악도를

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원력을 세웠다 한다고...

 

대웅전에 머무는 동안 마주친 모델?..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자청하여 모델이 되어 주심에 감사...

 

불조전(佛祖殿)...

중앙에는 석가모니부처를 중앙에 그리고 작은 불상 55개를 그 양쪽에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좌측 벽면에는 침룡대선사, 불일보조국사, 국일도대선사, 응운당대선사 등 3분의 영정을,

그리고 우측 벽면에는 경파대사, 청파당대선사, 우룡대선사, 목엄대선사 등 4분의 영정을 각각 봉안하고 있다...

 

무사전(無私殿)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 삼존을 비롯하여 시왕, 권속일괄은 인조26년(1648년)에 수조 각승 인균을 비롯한 12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조성한 작품들이라고 한다...

 

1805년 흥국사 적묵당을 다시 짓고 기록한 현판.... 목판에 음각하여 목테를 두른 편액이다...

적묵당을 지을 때 소임들과 도편수 등의 목수들, 시주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사찰사뿐만 아니라 승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대웅전을 나서며...

 

정면 3간, 측면 2간의 법왕문... 1624년 계특대사가 흥국사를 복원한 후 옥청스님이 법왕문을 세웠다고 기록...

 

 

부도밭 앞에서...

 

靈鷲山興國寺 편액은 가원 이영식(嘉園 李榮植)의 글씨라고 한다..

 

 

사찰 아래에서는 여수 영취산 진달래축제가 열리고 있지만 손님들은 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