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칠암자순례길, 남원 실상사와 약수암..
2022년 2월 5일, 지리산 칠암자순례길에 찾은 지리산 실상사..
천년고찰 실상사(實相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홍척대사가 창건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최초의 가람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년)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데서 비롯된다.
선종(禪宗)은 신라 혜공왕 때 처음 전래되었지만 발전을 못하다 도의(道義)와 함께 입당(入唐) 수학하고 귀국한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 중 으뜸 사찰로 발전하였다.
도의는 장흥 가지산(迦智山)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 전국에 포교하였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 편운(片雲) 두 대사가 나와 더욱 이 종산(宗山)을 크게 번창시켰다.
그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 200년 동안 승려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에서 기거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숙종 26년(1700년) 침허조사에 의해 중창 36동의 웅장한 규모의 건물을 세웠다.
당시에는 대적광전, 약사전, 무생전, 십불전, 오백전, 장육전, 원통전, 미타전, 적묵전, 미륵전, 명부전, 만화당, 현묘당, 청심당, 보응당, 자운당, 탐진당, 정성당, 금당, 향로각, 대동고, 환재각, 종각, 향적소, 만세루, 능허각, 불이문, 천왕문, 해탈문, 조계문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전각과 누각이 고종 20년(1883년) 스님들을 몰아내고 실상사의 너른 땅을 차지하려 했던 양재묵 일당의 방화로 인해 대부분 불타고 요사 1채와 전각 3동만이 남았다.
그때 불탄 대적광전은 단층 건물로는 조선에서 제일이라고 부르던 건물이었다 한다.
웅장했던 실상사 규모를 보여주는 한 예로서 목탑지를 들 수 있는데 실상사 목탑지는 천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 상태로 보아 규모는 경주 황룡사지의 9층탑지보다 조금 작았던 듯하다.
건물지의 위치와 심초석이 안치된 방법, 자연석인 초석 등을 종합해보면 원래의 가람과는 별도로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에 장육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실상사에는 보광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칠성각, 종각, 천왕문, 화엄학림 학사와 강당, 요사채, 해우소 등의 건물이 있다.
문화재로는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석등(보물 제35호), 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 3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 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 석등(보물 제40호),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실상사 약수암 목각탱(보물 제421호), 실상사 위토개량성책(전북유형문화재 제88호), 상원주장군 석장승(민속자료 제15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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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천왕문(天王門)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인데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동쪽은 지국천왕이라 하며 안민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에 살고 있으며 색깔은 청색을 띠고 있다.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왼손에는 주먹을 쥐고 허리에 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지국천왕 옆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있으며 노한 눈이 특징이다.
그리고 오른손은 용을 움켜지고 있으며 왼손은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몸에 흰색을 띠고 있으며 말로써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입을 벌린 형상을 취하고 있다.
또한 눈을 부릅뜨고 있으므로해서 그 위엄을 더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광목(廣目)천왕이라고 한다.
오른손은 삼지창을 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보탑을 들고 있는데 보탑 속에는 온갖 보물이 있어 이를 중생에게 나누어 주어 복과 덕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광목천왕 옆에는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이 있다.
언제나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고 하여 ’다문(多聞)’이라고 한다.
정면 측면 1칸에 겹처마 사모지붕을 올린 범종각(梵鐘閣)..
추녀끝이 경쾌하게 올라갔으며, 방형의 초반에 매끄럽게 가공한 운두를 올리고 원형 주좌를 앉힌 원형의 가공석 초석을 사용하였다.
출목이 없는 이익공 형식이며 초각과 단청이 화려하다.
보물 제37호(1963년1월21일) 실상사 동서삼층석탑(東西三層石塔)..
높이 각각 8.4m인 이 석탑은 실상사의 중심 법당인 보광전 앞에 동서로 있으며, 동탑과 서탑은 규모, 양식, 보존상태가 같고, 특히 상륜부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2층의 받침돌 주위에는 길고 큰 돌을 둘러서 탑구(塔區)를 설정하였으며, 아래층 받침돌은 하대석과 면석(面石)을 하나의 돌에 새긴 4장의 널돌로 구성하였다.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을 새겼고, 아래부분에 1단의 턱을 만들어 하대석처럼 보이게 하였다.
덮개돌은 윗면의 경사가 급한데 그 가운데 부분에는 각지고 둥근 3단의 굄이 있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각 면마다 1장의 널돌을 조립하여 짰는데 이 면석에도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덮개돌에는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있고, 경사가 급한 윗면의 가운데 부분에는 역시 각지고 둥근 2단의 굄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으며, 1층 몸돌만 약간 높은 감이 있을 뿐, 위아래 몸돌의 체감률은 착실한 편이다.
지붕돌은 밑면 받침이 4단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지만 윗면인 낙수면(落水面)은 추녀 윗부분이 반전(反轉)이 강하여 경쾌한 느낌을 준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가 놓여 있고, 상륜부는 2단의 부연이 있는 노반(露盤), 두 줄의 띠와 꽃무늬가 장식된 납작한 구슬 모양의 복발(覆鉢), 8장의 연꽃잎을 두른 단면이 네모난 앙화(仰花), 꽃무늬를 새긴 둥근 기둥 모양의 간석(竿石)을 사이에 끼우고 귀꽃이 장식된 보륜(寶輪) 4개 등이 아래서부터 위로 갈수록 체감되면서 차례로 얹혀 있고, 그 위에 귀꽃을 장식한 보개(寶蓋)가 올려져 있다.
다만, 동탑에는 서탑과 달리 보개 위에 불꽃무늬를 새긴 수연(水煙)이 남아 있다.
동탑과 서탑 두 탑의 꼭대기에는 석탑의 중심 기둥인 높은 찰주(擦柱)에 용차(龍車)와 보주(寶珠)를 꽂아 놓았다.
이 두 탑은 양식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받침돌 가운데 기둥의 수, 받침돌 덮개돌 윗면의 심한 경사, 지붕돌 받침 수의 감소, 전체적인 모습의 고준화(高峻化) 등에서 건립 시기가 불국사 삼층석탑보다는 다소 늦은 것으로 짐작된다.
곧 홍척(洪陟)이 실상사를 창건한 때(828년) 석탑도 이때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35호(1963년1월21일) 실상사 석등(石燈)..
높이 5m의 실상사 석등은 보광전과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사이에 있다.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인 단면 8각을 따르고 있지만 가운데 받침돌이 여느 석등과 같이 8각의 간주 모양이 아닌 북을 옆으로 엎어 놓은 고복형이어서 차이가 있다.
석등은 단면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져 있고, 아래받침돌은 8각의 윗단과 아랫단으로 조성되었는데 아랫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얕게 오목새김되었다.
윗단에는 2장의 넓은 꽃잎이 아래로 향해 있는 복련의 연꽃 무늬가 겹쳐진 채로 얕게 돋을새김되었다.
각 꽃잎의 끝부분에는 높게 솟아오른 귀꽃이 3개의 구름무늬를 이루며 장식되어 있으며, 윗단의 윗부분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단면이 둥글며 3단의 마디로 조성되었다.
곧 아래받침돌 윗단의 위와 윗받침돌의 아래에 바로 붙어서 각각 1단의 마디를 두었고, 위아래 마디 사이에는 제법 높은 또 하나의 마디를 놓았다.
툭 튀어나온 마디에는 가운데부분에 3줄의 띠와 함께 토끼풀처럼 생긴 꽃무늬가 장식되었고, 위아래부분에는 꽃잎이 1장인 단옆(單葉)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었다.
3단의 마디 사이는 잘록한 편으로, 겉면에는 3줄의 선이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의 맨 윗면에는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8각의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의 윗단과 달리 1장의 꽃잎이 위로 겹쳐진 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꽃잎마다 가운데부분에 꽃무늬가 장식되어 특이하다.
불을 켜 놓은 부분인 화사석(火舍石) 역시 단면 8각으로 이루어졌다.
각 면마다 길고 네모난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화창 주변에는 2줄의 선이 그어져 있으며, 문을 고정시켰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8각의 지붕돌은 윗면인 낙수면을 각 면마다 1장의 연꽃잎으로 장식하고서, 맨 윗부분에 다시 연꽃무늬를 겹쳐 새긴 특이한 모습이다.
기왓골이나 우동(隅棟)의 표현은 없이 연꽃잎만으로 각 면을 나누었다.
연꽃잎의 끝부분에는 아래받침돌의 윗단과 같은 모양의 귀꽃이 장식되었지만 일부는 잘려버렸거나 없어졌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상태가 완전한 편이다.
가운데받침돌처럼 마디에 3줄의 띠와 꽃무늬로 장식된 복발(覆鉢)과 3단의 마디가 놓여 있고, 그 위로 귀꽃이 조각된 보개(寶蓋)가 올려져 있다.
높게 돌출된 보개의 윗부분에는 덩굴 무늬가 새겨져 있고, 맨 위에는 끝부분이 뾰족한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놓였는데 가운데부분에 둥근 장식을 선으로 새겨 놓아 특이하다.
석등의 앞에는 돌로 만든 계단이 서 있는데 이 계단은 석등에 불을 켤 때 오르내리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유일한 사례로 석등이 공양구(供養具)라는 장식적인 의미와 함께 실용적인 등기(燈器)로 사용된 모습을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석등은 전체적인 모습이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이나 임실 진구사지 석등(보물 제267호)과 비슷하여 지금의 전라도 일대에서 유행하였던 양식으로 짐작된다.
크기가 장중하고 장식이 화려하며 비례미가 단정한 편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건립 시기는 실상사가 창건된 828년(흥덕왕 3년)경으로 추정된다.
실상사의 주법당 보광전(普光殿)..
고종 21년(1884년)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보광전 안에 모셔진 삼존상..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며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실상사 명부전(冥府殿)..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을 1821년(순조 21년)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고,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시왕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제1진광대왕, 제3송제대왕, 제5염라대왕, 제7태산대왕, 제9도시대왕이 있다.
왼쪽으로는 제2초강대왕, 제4와관대왕, 제6변성대왕, 제8평등대왕, 제10전륜대왕이 배치되었다.
실상사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1883년 양재묵과 그 일당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중앙의 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보물 제41호(1963년1월21일) 실상사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높이 266㎝로 꼿꼿한 자세로 앉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이 불상은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현재 광배(光背)는 없어졌고 사각대좌(四角臺座) 위에 앉아 있다.
나발(螺髮)로 처리된 머리 위에는 높이 14㎝, 밑변 48㎝나 되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었으나 머리와는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있다.
얼굴은 넓적하여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데 얼굴 길이보다는 너비가 더 넓고, 이마는 좁은 편이지만 박진감이 넘친다.
비교적 넓은 얼굴에 가늘고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 이마에서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아담한 코, 두터우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입 등이 조화 있게 잘 배치되어 있다.
목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삼도(三道)를 표현하였는데 음각선 처리가 아닌 굴곡진 모양으로 나타냈다.
두 손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1987년 복원불사 때 나온 원래의 철제 손들도 같은 모양의 것이어서 나무 손은 후보하면서 원래의 철제 손을 복제한 것으로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다른 손가락은 펴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왼손은 무릎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은 맞잡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수인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므로 이 불상이 통칭 약사불(藥師佛)이 아니라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크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걸치고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내려오는 U자형의 굵은 띠 모양 옷깃 안으로 넓게 터서 가슴이 많이 노출되었다.
그 아래로 엄액의(掩腋衣)가 보이고, 옷주름은 부드럽고 유연한 물결 주름인데, 특히 팔의 주름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처리하였다.
대좌는 흙으로 만든 사각형의 대좌이나, 현재는 허물어진 부분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복원이 가능한 편이다.
이 불상은 9세기 중엽에 조성된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서 당시 철불상의 실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칠성각(七星閣)..
보물 제34호(1963년1월21일) 실상사 수철화상탑비(秀澈和尙塔碑)..
전체 높이 2.9m, 비신 높이 1.68m, 너비 1.12m로 비신은 푸른 돌로 되어 있고, 이수(螭首)와 대석(臺石)은 화강암이며, 비문의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수철(秀澈)은 신라 말기의 선승(禪僧)으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실상사의 제2조가 되었다.
893년(진성여왕 7년) 5월, 77세로 실상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의 출생에서 입적 및 조탑(造塔)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실상사에서 수철이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의 승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深源寺○國師秀澈和尙(심원사□국사수철화상)’으로 쓰여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글씨는 자경 2㎝ 내외의 해서(楷書)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
비의 건립 연대 또한 명확하지 않으나 비문 가운데 ‘贈太師景文大王(증태사경문대왕)’ 및 ‘贈太傅獻康大王(증태부헌강대왕)’이라는 구절이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동문선』권33의 최치원이 지은 「사은표」 및 『동사강목』 효공왕 1년 7월조에 위와 같이 전대왕(前代王)들을 추증(追贈)한 기록이 있으므로 이 탑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대(897~912)로 추정된다.
비음(碑陰)에는 일찍이 비가 쓰러져 1714년(숙종 40년)에 중건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龜趺)가 없고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새긴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복련(覆蓮)을 둘렀으며, 이수에는 구름 속에 반룡(蟠龍)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전액(篆額)이 음각되어 있는데 조각 수법이 형식적이며 장엄 조식(莊嚴彫飾)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보물 제33호 실상사 수철화상탑(秀澈和尙塔).
높이 2.42m로 신라 말 선종 산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크게 일으킨 수철(秀澈 817∼893)의 유골을 모신 승탑이다.
실상사 서쪽 극락전의 오른쪽에 있으며,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로 보인다. 극락전 왼쪽에는 수철의 스승으로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洪陟)의 승탑이 서있다.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의 모습으로 단면 8각의 바닥돌은 제법 높은 편이며, 윗면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이 바로 받침돌이 놓여 있다.
8각의 아래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아래부분에는 제법 높직한 굄을 둘렀고, 그 위의 옆면은 구름 무늬로 장식되었는데, 각 면마다 구름 속의 용이나 사자의 모습이 돋을새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받침돌 위에는 하나의 돌로 조성된 8각의 가운데받침돌 굄돌이 놓여 있는데, 제법 높직하면서 위아래단으로 나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낮고 좁은 편으로 각 면마다 신라 석조물에서 주로 보이는 안상(眼象)이 오목새김되어 있다.
안상 안에는 사리함(舍利函)이나 주악상(奏樂像) 등의 여러 조각이 새겨져 있어 화사하게 보인다.
윗받침돌은 밑면에 8각의 각진 받침이 3단으로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이 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 16개가 세겹으로 돋을새김되었다.
꽃잎 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모두 48개의 연꽃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화려하게 보인다.
윗면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 2단의 각진 굄만 있다. 받침돌 위에는 하나의 돌로 만든 8각의 몸돌 굄돌이 얹혀 있다.
굄돌의 높이는 낮은 편인데 옆면에는 각 면마다 1구씩의 가늘고 긴 안상이 새겨져 있다.
옆면 윗부분의 덮개돌 모양 밑면에는 마치 석탑 받침돌의 덮개돌에 있는 부연(副椽)처럼 각진 받침이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윗면에는 낮고 각진 굄, 높고 둥근 굄, 낮고 각진 굄 등의 3단 굄이 몸돌을 받치고 있지만, 많이 파손되어 뚜렷하지는 않다.
몸돌은 8각의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을 새겼고, 앞면과 뒷면에는 문비(門扉)를 조각하였는데, 문비의 좌우면에는 사천왕상이 돋을새김되었다.
문비와 사천왕상 등의 조각은 8각원당형 승탑의 기점인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부터 나타난다.
이 승탑의 북쪽에는 수철화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탑비가 있고, 비명의 내용으로 보아 이 승탑은 893년(진성왕 7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38호(1963년1월21일) 실상사 증각대사탑(證覺大師塔)..
높이 2.42m의 이탑은 실상사를 창건한 증각(證覺)대사 홍척(洪陟)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이다.
홍척대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826년(흥덕왕 1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신라 하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최초의 산문(山門)인 지리산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이다.
홍척대사의 입적 연대는 알 수 없지만 9세기 중반경으로 추정되며, 승탑 또한 이때를 즈음하여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홍척대사의 시호는 증각(證覺)이며, 탑명(塔名)은 응료탑(凝寥塔)이다.
전형적인 8각 원당형탑으로 지상에는 8각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하대석이 놓였으며, 표면에는 구름 및 용 무늬, 사자가 조각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중대석은 얕고 좁은 8각 석재로서 조각은 없으며, 상대석은 소판 연꽃을 한 줄에 16엽씩 3중으로 양각하여 앙련을 삼았고 밑에는 3단 받침과 상면에는 2단의 굄이 각각 각형으로 표시되었다.
탑신은 8각 방주형(方柱形)으로 우주형(隅柱形)이 있고 각면에는 문비형(門扉形)과 신장상(神將像)이 조각되었다.
옥개(屋蓋)는 8각 1석으로 되었고 추녀는 사방으로 넓게 전개되었다.
옥개 정상에는 여러 층의 단(段)을 이루었고 그 위에 원형의 작은 석재가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두 없어졌다.
보물 제39호(1963년1월21일) 실상사 증각대사탑비(證覺大師塔碑)
이수(螭首) 높이 1.03m, 너비 0.72m, 귀부(龜趺)·지대(地臺) 너비 1.61m이며, 재료는 화강석이다.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洪陟)의 탑비이며, 시호가 증각이다.
증각은 일명 홍척국사(洪陟國師), 남한조사(南漢祖師)라고도 하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파(實相山派)의 기반을 닦은 고승이었다.
현재 비석의 몸체는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으며, 귀부는 당시에 이미 일반화된 용두화한 귀두가 아니고 본래적인 귀두의 형상을 그대로 조각하여 희귀하다.
이수의 조형도 부여의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와 같은 기법이며, 이것보다 약 200년 앞서는 것으로 보이는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의 계열에 드는 것이다.
이수에는 제액(題額)이 있으며, 액중의 전자(篆字)는 ‘응료탑비(凝廖塔碑)’의 4자이다.
비의 조형은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45호(1974년9월27일) 실상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 5량식 맞배지붕으로 정면은 가운데 칸의 너비가 3.15m로 세짝 분합문을 달았고, 양 옆칸의 너비가 1.70m로 외짝 분합문을 달았다.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았으며, 뒤쪽 고주(高柱)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그 앞에 불단(佛壇)을 배치하였다.
가구(架構)는 고주에 퇴보(退椺)를 걸고 대들보 위에 중종보(中宗椺를 걸쳐놓은 다음 여기에 우물천장을 씌웠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우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목각 보살상이 모셔져 있었으나 몇 년 전에 잃어버렸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건립연대는 1831년(순조 31년)으로 되어 있다.
실상사 약수암..
실상사 석장승(石長生)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실상사의 이 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며, 초입에는 해탈교를 전후하여 모두 3기의 장승이 서 있다.
해탈교를 건너기 직전에 석장승 하나가 있고, 원래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장승이 하나 더 있었다하나 1963년 홍수로 떠내려갔다고 한다.
장승의 몸통에는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수염을 땋아 왼쪽으로 구부리고 벙거지 같은 모자를 썼다.
찌푸린 이맛살과 콧등, 물안경을 쓴 듯 튀어나온 두 눈에 주먹만한 코는 벌름거리는 듯하며, 입술 밖으로 드러난 송곳니는 길게 八자형으로 튀어 나와 매우 해학적인 모습이다.
해탈교 건너에 있는 석장승은 2기인데, 하나는 해탈교 건너 논두렁에 있고 다른 하나는 큰 고목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몸통에 ‘대장군(大將軍)’이라는 글씨와 받침돌에 ‘옹정삼년을사삼월입동변(雍正三年乙巳三月立東邊)’이라는 각자가 있어 1725년(영조 1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주보고 있는 장승 역시 몸통에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는 이름과 ‘신해년오월(辛亥年五月)’이라는 각자가 있어 1731년(영조 7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해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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