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박6일 캠핑여행 첫째날 - 구례 문수사와 운조루, 그리고 하동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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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박6일 캠핑여행 첫째날 - 구례 문수사와 운조루, 그리고 하동포구..

by 정산 돌구름 2019. 1. 10.


5박6일 캠핑여행 첫째날 - 구례 문수사와 운조루, 그리고 하동포구..



2019년 1월 4일(금), 대망의 기해년 첫 캠핑여행이다.

눈 예보가 없어 이번 여행은 구례, 하동, 통영, 고성, 사천으로 떠나기로 한다.

그 첫날은 먼저 구례 문수사, 구례군 토지면에서 도로를 따라 오르면 산길로 들어 구불구불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다.

구례 문수사는 백제 성왕 25년(547년)에 연기(緣起)조사가 창건하였다.

그 뒤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 서산대사, 소요대사, 부유, 사명대사 등 여러 고승들이 수행정진한 문수도량이다.

고승 청허당 스님의 젊은 시절 수행처이기도 했는데 이때의 한 고사가 전해 내려온다.

불법을 깨우치기 위해 용맹정진을 거듭하던 중 어떤 거지노승이 찾아와 함께 수행하기를 청했다.

처음에는 식량이 모자란 터라 거절했지만 노승의 청이 너무 간절해 같이 수행하기로 했다.

밤잠을 자지않고 수행정진하던 어느날, 수행하던 노승이 새벽녘에 주장자를 앞산으로 날려 황룡을 만들더니 그 용을 타고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후 문수사는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는 수행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의 난입으로 일부가 파괴된 뒤 불당을 조성허지 못한 채 6.25전쟁을 맞아 전소되었다.

그 뒤 1984년 요사채를 세우고 1988년 옛 대웅전 터에 지금의 고금당선원을 건립하고 진입도로를 내어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어 문수전, 삼성각, 고봉선원, 방장굴, 설선당 등을 건립하고, 석축을 쌓아 3층 법당 대웅전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문수사를 둘러보고 내려와 운조루로 향한다.

운조루(雲鳥樓)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으며, 영조 때 류이주(柳爾胄)가 낙안부사로 있을 때 99칸을 건축했다고 한다.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칠언율시에서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라올 줄 아네.>

큰사랑채 대청 위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52년(1776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자형 행랑채, ㅜ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그대로 보존되어있고 사당과 연당이 남아 있다.

큰사랑 대청 위 상량문의 기록은 1776년(영조 52년)에 세운 것으로 규모나 구조가 당시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현존하는 주요 부분은 사랑채와 안채이며, 그 밖에 행랑채·사당·연당 등이 있다.

사랑채는 3채가 있는데, 큰사랑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높이 약 1.2m의 축대 위에 있다.

중문쪽이 온돌방, 가운데가 마루방, 서쪽 끝이 누마루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높이 약 60cm의 활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있으며, 초석은 큰 괴석을 사용하였다.

운조루가 자리한 터는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오미리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형상이다.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몇백년 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명성이 자자하여 이곳이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위쪽에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구몰니(金龜沒泥), 중간에 금환낙지,

아래쪽에 다섯가지 보석이 모여 있는 형상의 오보교취(五寶交聚)의 명당이 있다.

중간의 금환낙지는 운조루가 이미 차지했지만, 금구몰니와 오보교취의 명당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운조루는 1,400평의 대지에 건평 273평인 99칸(현재는 70여칸) 저택으로 문중 문서에 따르면 한때는 883마지기의 농토가 있었고

대한제국 말에만 해도 농사를 짓기 위해 한 해에 2백~4백여 명의 노동력이 조달되었다.



운조루에서 하동으로 이동하여 하동포구에 이르니 차가운 강바람에 잠시 둘러보고 떠난다.

하동포구(河東浦口)는 배가 드나들던 경남 하동의 섬진강 물길을 일컫는 말로 ‘하동포구 80리’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화개, 악양, 하동(하동읍), 하저구, 갈사 등지를 거쳐 바다에 이르는 하동의 섬진강 물길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포구()란 배가 드나드는 개(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어귀라는 의미이다.

흔히 ‘하동포구 80리’라고 표현하지만 80리가 정확한 거리는 아니다.

예로부터 하동장은 남원·구례 등 지리산 산간지역의 물산과 여수·삼천포·남해 등지의 해산물이 집산되고, 전국의 보부상들이

모여들던 큰 장이었다. 보부상을 비롯한 외지인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거쳐 하동포구를 통해 하동으로 들어와 교역 등을 하였다.

하동읍 광평리 섬진강변에는 영조 21년(1745년)에 조성된 소나무 숲인 천연기념물 제445호 ‘하동송림’이 있다.

이곳은 ‘하동포구 백사청송’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하동포구의 일부이자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하동포구에 정박을 할까 하다가 횡천면 횡강정이 있는 횡천강변 주차장에서 정박을 한다.

주차장에 화장실까지 갖추어져 있어 차박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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