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기간 : 2015년 4월 18일 (토) ~ 4월 23일 (목) - 4박6일
□ 여행지역 : 중국 장가계(양가계, 원가계, 황석채, 대협곡, 천문산)
□ 여행인원 : 15명(남6, 여9)
□ 여행경비 : 1인 1,099,000원(모두 포함)
□ 여행회사 : 롯데관광(인솔자 없음, 현지가이드 김화)
□ 여행일정
○ 1일차(4월 18일, 토) : 무안공항~장가계(张家界) 하화공항~장가계 화천대주점(张家界华天大酒店)
17:40 무안국제공항 도착 / 18:00 가이드 미팅 / 18:30 수하물 송부 및 출국수속
20:00 무안국제공항 출발 티웨이항공 TW9639(19:40 탑승시작)
21:50(-1h) 장가계 하화(荷花)공항 도착 입국심사 / 22:20 가이드 미팅 / 22:30 전용버스 22:40 호텔 도착
○ 2일차(4월 19일, 일) : 보봉호~황룡동~전신마사지
○ 3일차(4월 20일, 월) : 장가계 대협곡~백장협(차창)~황석채 풍경구~천문호선쇼
○ 4일차(4월 21일, 화) : 양가계~케이블카~원가계~천하제일교~미혼대~백룡 엘리베이터~십리화랑(모노레일)~금편계곡
○ 5일차(4월 22일, 수) : 장가계 토가풍정원~천문산 케이블카(천문동+귀곡잔도(유리잔도)+천문산사)
○ 6일차(4월 23일, 목) : 장가계 공항~인천공항~버스~무안공항
1일차(4월 18일, 토) - 무안공항에서 장가계로
○ 무안국제공항
광주에서 17시 출발, 무안공항에 도착하니 17시40분이다.
18:00 무안국제공항 2층 출국장 아시아나항공 앞에서 여행사 안내원을 미팅한다.
18:30 수하물을 송부하고 출국수속 후 공항 안으로 들어간다.
○ 티웨이항공 TW9639 탑승
탑승대기실에 들어서면 예전에 있었던 면세점도 문을 닫아 썰렁한 느낌이 들고 2번 Gate에서 19:40 탑승을 시작한다.
20:00 비행기가 출발하고 기내식은 없고 음료수 한잔씩을 마시고 휴식을 취한다.
티웨이항공(T'way Air)은 한국의 저비용 항공사로 현재 국내선 김포~제주, 국제선 김포~타이베이, 인천~방콕, 인천~후쿠오카,
인천~사가, 인천~삿포로, 인천~제남 노선을 운항 중이다.
티웨이항공의 전신은 2004년 세워진 (주)한성항공으로 국내 최초의 저가 항공사로 충청지역(청주국제공항)을 기반으로 출범했다.
2003년에 (주)충청항공이라는 이름으로 법인을 세웠고 2004년 청주시와 업무 협의를 통해 충청지역 항공추진사업단을 발족했다.
회사명을 한성항공으로 바꾸고, 2005년에 운항 허가를 받아 청주~제주 노선에 정식으로 취항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고환율, 고유가 등의 영향으로 경영난에 빠져 10월 운항을 중단했고 12월에 휴업신고를 냈다.
국토해양부로부터 항공사 등록을 취소당할 상황에 놓이자 2009년 법정관리를 신청해 법정관리 절차에 들어갔다.
2010년 신보종합투자가 150억원에 한성항공을 인수하면서 법정관리에서 벗어났으며, 회사명을 (주)티웨이항공으로 바꾸었다.
티웨이항공의 T는 Together(함께), Today(오늘)와 Tomorrow(내일) 등을 뜻한다고 한다.
2010년8월 항공기 2대로 시작하였으며, 9월 운항증명을 다시 발급받아 김포~제주 구간에 하루 8회 운항을 시작했다.
2011년7월 국제선 운항증명서(AOC)를 취득하고, 10월 인천~방콕 노선에 신규 취항, 12월에는 인천~후쿠오카 노선에 취항했다.
2011년 한국소비자원이 주관한 '저비용 항공사 소비자 만족도 평가' 6개 평가지표 중 5개 항목에서 가장 우수한 점수를 받았으며,
2012년 한국교통연구원이 시행한 '항공교통서비스 시범평가'에서 저비용 항공사 중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2012년4월 김포~타이베이 노선에 취항하였고, 11월 화물사업 면허를 취득했다.
2013년10월 6번기(BOEING 737-800)를 도입했으며, 12월에는 인천~삿포로, 인천~사가 노선에 신규 취항했다.
2013년 설립 3년 만에 항공기 5대 만으로 흑자를 달성했다.
국내 저비용항공사 최초로 대구 및 광주에 취항하였으며, 대구~제주 노선은 2014년3월30일부터 매일 4회 운항, 광주~제주 노선은
2014년9월4일부터 매일 4회 운항하고 있다.
2014년7월 기준으로 티웨이항공이 운항하는 항공기는 189석의 BOEING 737-800 단일기종이며, 8대를 보유하고 있다.
○ 장가계(張家界) 하화(荷花)공항 도착
21:50(-1h) 장가계 하화(荷花)공항 도착, 입국심사를 하고 22:20 가이드를 만난다.
장자제 공항(张家界荷花机场, Zhangjiajie Airport)은 1991년10월 건설을 시작하여 1994년8월18일에 개항하였다.
이후 중국 국적 항공사들만이 운항을 하였었으나, 2010년10월28일 국내 이스타항공이 외국국적기로는 최초로 인천~장가계 노선
직항로에 정기편 운항을 시작하였다.
이후 대한항공에서 청주발 전세기를 운항하고 있으며, 티웨이항공이 무안공항에서 운항하고 있다.
중국 최초의 국가삼림공원, UNESCO 세계자연유산 "무릉도원(武陵桃源) 장가계(張家界)"
장자제(Zhangjiajie, 張家界)는 중국의 대표적인 여행 도시 가운데 하나로 우링산맥의 중앙에 있다.
츠리(慈利)현, 용딩(永定)현, 쌍츠(桑植)현 등을 포함하며, 인구는 161만 4,500명(2006년)이다.
BC 221년부터 도시가 시작되었으며, 대룡(大庸)이라는 지명으로 불려왔다.
1988년 5월 지급시(地級市)로 승격하였고, 1994년4월4일 장자제시로 명칭을 바꾸었다.
자연경관이 뛰어나 1982년9월 장자제가 중국 최초로 국가삼림공원이 된 뒤, 1988년8월 무릉원이 국가중요자연풍경구로 지정되었다.
1992년에는 장자제국가삼림공원, 삭계욕풍경구, 텐쯔산(天子山)풍경구가 우링위안 자연풍경구와 함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주된 산업은 관광업이며, 중국 전역과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에서 관광과 투자를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사람이 태어나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백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人生不到張家界,白歲豈能稱老翁)'라는
중국 속담에서 나타나듯이 장가계의 뛰어난 경치는 꼭 한번 가 볼만한 곳이다..
○ 화천국제대주점(张家界华天大酒店简介 HUATIAN INTERNATIONAL HOTEL)
22:30 전용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22:40, 룸 넘버 80932호를 배정 받고 짐을 정리한 후 잠자리에 든다.
화천대주점은 2014년9월 Open한 총객실 760실 규모의 대형 호텔로 공항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다.
□ 만만디(慢慢地)의 나라 중국에 대한 이해
유구한 역사와 방대한 국토를 지닌 중국은 풍부한 문화유적과 빼어난 산수를 자랑으로 한다.
중국은 하나의 국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다양성을 지닌 나라이다.
중국인이라는 이름으로 56개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을 품고 5천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속에 수많은 나라들이 거쳐 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병마용 등은 이러한 유서 깊은 역사가 남긴 빛나는 인류의 유산이다.
러시아와 캐나다, 미국에 이어 세계 4위의 영토를 보유해 풍부한 자원을 자랑하며, 다양한 기후와 자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중국은 공산국가로 대표되는 구시대적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도약기를 맞고 있다.
이제 그들은 세계 최대의 인적자원과 광대한 국토, 그 땅에서 나오는 자원들을 바탕으로 세계 최강국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동악(태산), 서악(화산), 중악(숭산), 북악(항산), 남악(형산) 등 5개 악을 중국 으뜸 山이라 한다.
또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표의문자(뜻글자)를 쓰고 있는 나라이며, 세계 최대의 인구를 지닌 나라이다.
○ 국명 :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 수도 : 북경(北京, 베이징)
○ 면적 : 9,596,961㎢ (세계 4위, 한반도의 44배, 남한면적의 약100배)
○ 인구 : 약 13억 5,569만명 (2014년 기준)
○ 1인당 GDP : 7,572$ 세계80위 (2014 IMF 기준) - GDP 10조 3,554억$ 세계2위 (2014 IMF 기준)
○ 언어 : 표준어 - 普通話, 지역별로 8종류의 방언
○ 종교 : 불교, 도교, 천주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 기후 >
넓은 국토에 열대, 온대, 냉대 등 다양한 기후가 분포되어 있다.
양쯔강과 황허 주변의 대부분 지역은 온대기후에 속해 사계절이 뚜렷하며 사람이 살기 적당하다.
남부의 하이난과 윈난 등은 일년 내내 봄 날씨가 이어지며 비가 자주 내린다.
북부의 둥베이 삼성(헤이룽장, 지린, 랴오닝)은 겨울이 길고 상당히 추우며 눈도 많이 내린다. 사막이 있는 서북지역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늘 건조하며,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일교차가 큰 전형적인 사막기후를 보인다.
서남부의 고산지대에서는 전형적인 고산기후가 나타난다.
여름기온이 35℃를 넘는 장강연변이 있는가하면, 겨울기온이 -30℃까지 내려가는 동북지방도 있다.
실크로드 지방에서는 밤낮의 기온 차가 20~30℃까지 나기도 한다.
< 지리 >
육지 면적만 9,596,961㎢에 달하는 세계 4위의 영토 대국으로 남한 땅의 100배가 넘는다.
남북으로는 북위 53도에서 북위 4도까지, 동서로는 동경 135도에서 동경 73도까지 걸쳐 있다.
한국, 러시아, 몽골,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네팔, 부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산맥, 분지, 고원, 평원, 사막 등 다양한 지형이 공존하며, 전반적으로 서쪽의 지대가 높고 동쪽이 낮은 편이다.
황허와 양쯔강 사이의 남북 분계선을 기준으로 북부와 남부 지역이 기후, 기질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 인구와 민족 >
중국 인구는 현재 13억을 넘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중국정부는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막기 위해 한족(漢族)에 한해 1가구1자녀 정책을 펴왔다.
이 정책의 역효과로 농촌에서는 호적에 오르지 못한 아이들이 증가하였는데 이런 아이들은 헤이하이즈(黑孩子) 라고 불린다.
그리고 중국 정부의 강력한 인구 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2025년에는 중국인구가 15억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56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94% 이상을 한족(漢族)이 차지하고 있다.
장족, 회족, 묘족, 만주족 등 55개의 소수민족이 나머지 6% 정도를 차지한다.
그 중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조선족은 약 200만명이며, 이들 대부분은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살고 있다.
< 중국인 >
장대한 대륙을 닮은 중국인의 성격을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한 말은 “만만디(慢慢地)”이다.
이 말 그대로 중국인의 성격은 느긋하고 나아가 대범하다.
또 중국인은 관계(關係, 꽌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중에서도 신용을 첫째로 꼽는다.
이 때문에 중국인은 쉽게 자기 속을 드러내지 않고 깊이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따라서 중국인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이 '꽌시'라는 말부터 이해해야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 언어 >
일반적으로 한어(漢語)로 불리는 중국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이며, 표준어를 보통화(普通話)라고 한다.
중국에는 지역에 따라 방언이 심해 중국인 사이에서도 의사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최근에는 정부차원의 국어사용
운동으로 표준어 사용이 활발해지고 있다.
< 시차 >
한국표준시차(GMT+9)보다 1시간 늦은 GMT+8을 사용하고 있다.
< 통화 >
인민폐(RMB) 단위는 원(元, 위엔=塊), 각(角, 지아오=毛), 분(分, 펀)이다. 1元=10角=100分
1元 이하 단위는 동전과 지폐가 함께 사용되는데 특히 남방지역으로 갈수록 동전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그리고 갈수록 分 단위의 사용이 사라지고 있다.
그 외의 지폐는 5원, 10원, 50원, 100원짜리로 구분되며, 규모가 있는 상점에는 위조지폐 구별을 위한 기계가 있어서
100원짜리 지폐를 제시할 경우 기계에 대고 판별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1위안(CNY) = 174.9원 / 1달러(USD) = 6.19위안(CNY) 2015년4월17일 기준
< 전압 >
일반적으로 220V이지만, 플러그의 모양이 다fms 경우가 많지만 꽂아서 사용이 가능하다.
< 전화 >
중국의 국제전화는 한국에 비해 70%이상이 비싸다.
따라서 현지 직통전화보다는 한국 통신사를 통한 수신자부담 서비스(Collect Call)를 이용하는 것이 더 저렴하다.
* 중국에서 한국으로 직통전화(IDD) : 00 + 82 + 0을 뺀 지역번호 + 개인번호
* 한국 수신자 부담 전화 - 한국통신 : 10800-820-1611
< 중국의 음식문화 >
地大物博(지대물박) - 땅이 크고 자원이 많다. 이 말은 곧 중국을 가리킨다.
없는 것만 빼고는 다 있는 곳, 중국. 그래서 중국음식의 재료와 내용, 모양과 맛도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요리에 대해서 '동쪽은 시고, 서쪽은 맵고, 남쪽은 달고, 북쪽은 짜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중국을 대표하는 요리는 크게 산동요리, 사천요리, 절강요리, 광동요리의 4가지로 나누며 ‘4대중국요리’로 불린다.
이 요리는 각 지방의 오랜 역사와 독특한 조리특색이 자연지리, 기후조건, 특산물, 음식습관과 밀접한 관계로 형성되어 왔다.
이에 따라 각각의 요리는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절강요리는 수려한 강남의 미녀와 같고, 산동요리는 요리는 소박하고
건강한 북방의 남자와 같으며, 광동요리는 풍류스럽고 우아한 도련님 같고, 또한 사천요리는 내실이 풍부하고 재주가 많은
명인과도 같다.
□ 중국의 역사
< 고대 >
중국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3황(三皇)·5제(五帝)의 평화시대를 거쳐 하(夏)·상(商)·주(周)의 3대(三代)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귀갑수골(龜甲獸骨)에 새겨진 한자의 최고형(最古形)인 복사(卜辭)에 의하여 상대의 사회를 알 수 있다.
상나라는 웨이수이[渭水]에서 일어난 주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는데 주나라는 왕권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에 따라 제자백가
(諸子百家)와 같은 문화가 발달하였다.
주나라는 BC 770년 수도를 낙읍(洛邑, 지금의 洛陽縣)으로 옮겼다. 주나라의 동천 후 춘추(春秋, BC 770∼BC 403)시대를
거쳐 전국(戰國, BC 403∼BC 221)을 거쳤고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나라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를 단행하고 행정·군사·감찰의 3권분립 체제를 세웠다.
또,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국위를 사방에 떨쳐 진(Chin)의 이름이 서쪽에 전해져‘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BC 207년 진은 멸망하고, 서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한왕조(漢王朝)를 창업하였다(BC 202).
한대에는 서방과의 교통이 활발하여 그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중국 문화의 내용이 충실해졌다.
지방 호족세력이 발전하게 되어 한때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국하였지만 15년 만에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 25∼220) 시대가 된다. 그러나 전한부터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184년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몰락 기로에 들었다.
< 중세 >
황건적의 난으로 군웅할거된 중국의 국토는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낙양에 세운 위(魏)와 유비(劉備)가 청두(成都)
에 세운 촉한(蜀漢), 그리고 양쯔강 중·하류에 손권(孫權)이 세운 오(吳) 등 삼국시대가 되었다.
280년 위의 신하이던 사마씨(司馬氏)가 3국을 통일하여 서진(西晉)이 되었고, 4세기 초 흉노(匈奴)의 침입으로 난징(南京)
으로 옮겨 동진(東晉)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조(四朝)와 오(吳)·진(晉)을 더한 6조(六朝)가 교대되었는데 이 시대의 문화는 귀족과
호족들의 풍족한 생활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우미한 것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은 5호16국이 싸우다가 선비족이 439년 북위로 통일하여 송나라와 대항하여 남북조 형세를 이루었다.
수 문제(文帝)는 군권을 강화하고 과거제도를 시작하였으며, 양제(煬帝)는 대운하를 만들었지만 고구려와 싸워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였다.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의 제위에 올라 이후 당나라는 넓은 대제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귀족의 취미와 외형
의 미를 강조하는 당대 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인접 국가에 파급되어 동아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귀족계급이 몰락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907년 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 멸망되었다.
이후 5대 10여개국이 흥망하였다.
979년 송(宋)은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으나, 문치주의 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화되어 북방 유목민족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거란족(契丹族)의 요(遼), 탕구트족(Tangut, 黨項族)의 서하(西夏), 여진족(女眞族)의 금(金) 등이 송(宋)을 압박하였다.
이들 나라들은 훗날 몽고족이 세운 원(元)이나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처럼 독자적인 문화를 지니고 중국문화에 큰 영향을
끼쳐 ‘정복왕조(征服王朝)’라고 불린다.
1127년에 송(宋)은 금(金)나라의 압박으로 강남(江南)으로 옮겨갔지만, 1279년 칭기즈칸이 이끈 몽고군에 멸망했다.
몽고족이 세운 원은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명(明)에 도성인 대도(大都, 현 베이징)가 함락되며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명(明)은 1644년 민란 지도자인 이자성에 의해 멸망했고, 그 해에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온 만주족의 후금(後金)이 베이징
(北京)을 점령하면서 다시 정복왕조인 청(淸)이 중국을 지배하였다.
< 근대 >
중국사에서 서양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전통왕조 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는 시기로서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부터 1919년 5·4운동까지를 근대사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청(淸)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에 해당한다.
청나라는 무역개방을 요구하는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1840년 아편전쟁)
이로써 동양의 전통적인 대제국은 서양 근대국가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중국의 근대사는 피침사로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청은 반식민지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서양 자본주의의 침투로 전통적 전제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불만을 갖고 홍수전(洪秀全)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설한다는 이상으로 농민전쟁을 일으켜 세력을 형성하였다.
(태평천국의 난, 1850~1864년) 그러나 결국 정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청나라는 1856년 애로호사건으로 제2차 아편전쟁을 맞았고, 이로 인해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청 황족이 거주하던 집단거주지였던 원명원(圓明園)은 영·불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베이징이 점령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북경조약으로 화해하였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의 북경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열강의 중국 침략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양무운동(洋務運動, 1862년)이 일어나 서양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서양 물질문명을 수용하되 중국 전통의 정신과 철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 정신을 유지하였다.
열강들의 중국내 세력 강화와 청일전쟁의 패배 등에 자극받아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 일부 선각자들은
국내 제도의 혁신을 통해 중국을 근대화시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변법자강(變法自强)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광서제(光緖帝)는 이들을 중용하고 과거제 개혁, 근대학교 설립, 관보발행, 입헌정치 계획 등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어린 광서제와 서태후(西太后)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서태후와 조정 보수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개혁파를 축출하고 실권을 잡았다.(무술정변, 1898) 그리고는 개혁정치를 중단하고 과거체제로 회귀하였다.
이는 중국이 보수화의 길을 택하여 근대화가 지연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열강의 침투로 중국은 일본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이 전국을 분할 관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청불전쟁(1884~1985)에서 프랑스에게 패하고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게 패함으로서 베트남, 조선 등에서
종주권을 상실하였고, 타이완마저 일본에게 내주어야 했다.
그 결과 청조는 그 동안 동양 강자로 군림하던 패권을 일본에게 내주게 되었고, 동양의 국제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열강들에 대항하여 1900년 의화단(義和團)이 봉기하여 외국 공관에 방화하는 등 저항하였으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청 정부의 위약과 열강세력의 침탈 속에서 漢族 중심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쑨원
(孫文)이 주동이 되어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다.
이로써 1912년 전통왕조인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였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중국경영에 소홀한 틈을 타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독일이 경영하던 지역인 산동반도 일대에 일본군이 상륙하고 항구도시인 청도(淸島)를 점령하였다.
일본은 중국 정부에 이권을 요구하는 내용의 21개조 요구를 하였고,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일 감정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세계는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추세에 1919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적극적 공세로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현대 >
산업혁명을 치른 서구의 문화가 명나라 말기, 청(淸)나라 초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왕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서구 세력들의 물밀듯한 침점으로, 홍콩(香港)을 영국에게, 만주 북방을 러시아에게 할양하고, 안남(安南) 등 조공국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잃었으며, 국내 요소에 외국 조계(租界)가 많이 설치되어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치중흥(同治中興)을 통해 근대공업이 일기 시작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하였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의하여 실패하였다.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이 탄생되었으나 그 후 약 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공산당도 탄압하였는데,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고 그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
(臺灣,)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1949년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마오져뚱(毛澤東)이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건국 후 1949~1955년까지는 초기 변혁기에 해당, 자본주의를 적대시 하였으나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정부의 능률적 경영이
중시되면서 중앙집권적 관료조직이 팽창하였다.
1955~1959년의 시기는 새로운 변혁기에 해당한다. 마오쩌둥은 실용주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대중노선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시중심의 공업화 계속에 반대하고 중국의 공업화 이전에 농업집단화 추진을 주장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관료주의화된 당을 비판하고 당은 인민에 의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농촌의 99% 이상이 집단적인 인민공사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농업 생산력은 하락하였고 자연 재해로 중국
경제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였던 마오쩌둥의 농업집단화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공산당내 노선갈등이 다시 나타났다.
1959년부터 문화혁명 이전인 1966년 초반까지는 이념보다 효율성과 전문성이 강조되었으며 마오쩌둥은 2선으로 물러났다.
1959년 중공 당정치국 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덩샤오핑(鄧小平), 류샤오치와 연합하여
인민공사를 축소하고 자작경영을 늘였으며 급진적인 정책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잠시동안의 실용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시기이며, 이후는 다시 또 사회주의 이념 및 사상의로의 무장을 강조하는
이른바 문화혁명기가 도래하면서 중국은 혹독한 이데올로기적 실험을 경험한다.
새로운 변혁기인 문화혁명기는 1969년까지 지속된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와의 정책논쟁을 통해서 류샤오치의 실용주의
노선이 불평등과 관료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군부의 린뱌오(林彪)와 연대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즉, 마오쩌둥은 이들의 노선에는 사회주의체제를 부정하고 자본주의적 사상이 잔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 경제구조는 물론이고 사상의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11전중회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대한 결정>이라는 문안을 통과시키고 청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추진하였다. 홍위병들은 공산당내 부르조아적 요소를 몰아내기 위한 하방운동과 구시대적 문화
유산 제거운동을 주도하였다. 문화혁명에는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 등 4인방도 합세하였다.
문화혁명 기간중 마오쩌둥의 노선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숙청되었으며 당과 국가기구 등 마오쩌둥과 군중
사이에 놓인 공식기구들은 모두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자본주의 추종자로 몰려 사망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는 마오쩌둥과 린뱌오간의 연대가 무너지고 군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문화혁명초기 급진파들이 득세하는
양상이 약화되고 저우언라이와 같은 중도파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문화혁명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정책의 전환보다는 문화혁명의 폐해를 수습하는 데 주력한 시기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이 복권되었고 중국의 실권은 덩샤오핑에게로 넘어갔다.
장칭 등 4인방은 문화혁명기간 중의 죄목으로 처형당하였으며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이 대거 복귀하였다.
1978년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노선을 채택하면서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국은 안정적인 실사구시형의 정책을 중심으로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농업·공업·국방 및 과학기술에서의 ‘4개 현대화’ 추진을 정책목표로 세우고 미·일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중국은 계획경제에 시장경제의 요소를 가미하여 점차 상품가격이 시장원리에 의해 결성되게 하고 있으며 기업의 독립채산제
확대, 농촌 잉여생산물 판매허용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경제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최고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1980년대에도 지속적인 실용주의적 경제발전 노선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으로 상징되는 덩샤오핑의 사상에 의해 진행되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치이념보다는 경제에 더 중점을 둠으로써 정치 실세가 된 상하이방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런데 개혁,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개혁과 개방의 속도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고, 부정부패에 반대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학생, 지식인의 반대운동은 1989년 6월의 천안문사태로 나타났다.
이 사태는 결국 보수파에 의해 무력진압으로 끝났지만, 당시의 총서기인 자오쯔양은 실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상하이방을 대표하는 장쩌민이 총서기에 임명되면서 개혁개방파는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국 외교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장쩌민이 1990년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
위원회의 주석을 맡음으로써 경제관료에 의해 당과 정부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장쩌민은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5월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을 후진타오
에게 물려주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등장한 후진타오 총서기와 윈자바오 총리 체제는 ‘성장우선론자’ 특히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동부연안 지역 중심의
성장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선호하는 ‘선부론자(先富論者)' 세력들을 몰락시키고, 중국 전역에 걸친 성장을 중시하는 분배를
강조하는 개혁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한국과 중국의 교류관계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과 중국간의 교역은 20억$ 미만이었다.
1991년 중국의 경기회복으로 교역액은 44억$까지 이르렀고, 양국 무역대표사무소 설치와 무역협정 체결 등으로 경제교류가
본격화 되면서 급격한 증가 현상을 보였으며, 1993년에는 90억 8000만$로 늘었다.
무역수지를 보면 한국은 계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1993년도에 들어서 대중국 수출이 51억 5000만$로 전년도에 비해 94%
증가율을 기록하고, 수입이 39억3,000만$로 증가율 5%에 그쳐 12억2000만$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도 들어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고 중국의 수입억제로 상반기 무역수지는 3억3000만$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총 무역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1989년의 1.7%에서 1993년도에는 5.5%를 차지하여 중국이 미국·일본에 이은
한국의 제3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하였다. 교역 품목의 구조는 전형적인 산업간 분업형태를 보인다.
즉 대중국수출은 중화학 공업제품이 중심이 되어있어 철강·금속제품, 기계류 및 운반용 기계, 섬유, 화공제품 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입은 농수산물, 섬유류, 광산물 등의 품목이 대종을 이룬다.
정식수교와 한국의 산업구조조정 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여 중국이 한국의 2대 투자대상국으로 부상하였다.
1985년 홍콩을 통한 우회적인 투자가 시작된 후 1989년 9건, 1990년 35건에서 1991년 107건으로 급속히 늘었고,
1993년에는 630건 5억 7,030만$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3년까지의 직접투자 누계는 1,043건 10억430만$에 달하였다.
1998년에는 191건 1억1100만$로 줄었으나 2000년에는 415건 2억300만$를 기록하였다.
수교 후 초기에는 투자 대상지역이 보하이만(渤海灣) 주변과 둥베이3성(東北三省)에 편중되었으나 최근에는 상하이·장쑤성
(江蘇省)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교역 확대를 위해 중국의 공업화에 소요되는 자본재의 확대와 소비변화에 부응하는 시장개척을 중시하고 있으며,
경쟁력이 약화된 업종의 투자를 조장하고 중국의 전략육성산업이면서 협력 가능성이 높은 항공기, 자동차, 전자교환기(TDX),
원자력발전 등을 우선 협력분야로 선정하여 산업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0년대까지 줄곧 밀접한 관계와 지원을
해왔다. 그러나 1978년 이후 개혁·개방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로 북한과도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하였다.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까지도 북한과의 돈독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1989년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고
장쩌민 총서기가 1990년 3월 평양을 방문해 한국과의 경제적 교류로 소원해진 관계를 재차 긴밀한 관계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하면서 급속도로 관계가 소원해져 1993년3월 예정되어 있던 김정일 중국방문이
취소되었다.
1992년12월 중국이 북한에 대해 경화결제(硬貨決濟) 요구에 따라 더욱 그 관계가 냉각되었지만 북한 핵문제와 경제난이
가중되어 북한이 중국에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관계개선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7월 북한의 ‘승전 40주년’ 행사에 중국 대표단이 방북하였고 중국의 경제인들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중국이 북한의 최대 교역국으로 올라서게 되는 등 여전히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크다.
1996년8월 북경에서 한중 어업협정 체결을 위한 실무회담을 개최하였다.
2000년 한국은 일본·미국·홍콩에 이어 중국의 4번째 교역국으로, 대한(對韓) 수입은 186억1천만$, 수출은 128억$였다.
2012년 현재 대한 수입은 1384억$, 수출은 687억7천만$이다. 주요 수입품은 화학공업제품, 섬유, 전자 및 기기, 철강,
금속제품 등의 공업용 원부자재 등이고 주요 수출품은 철강, 금속, 섬유, 전자 및 기기, 농림수산품 등이다.
2003년 이후 중국은 우리나라의 수출상대국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4년 이후 수입상대국 2위이다.
2005년 대중국 무역량은 1,006억$를 기록하였다.
중국은 2003년 이후로 무역흑자 상대국 1위로 2005년 대중국 무역의 흑자액은 235억$였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철강, 석유화학 등에 투자가 집중되면서 대 중국 수출흑자는 점점 줄고 있다.
2010년 중국의 허가를 받은 한국 대중국 투자 프로젝트는 1,695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1.6% 증가했고, 중국의 한국투자
이용액은 26억9천만$로 0.3% 감소했다. 2010년 말까지 한국의 대중국 투자 프로젝트는 모두 52,172건, 실제 투자액은
473억$이며, 현재 한국은 중국의 제3대 외국인 직접 투자 대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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