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기행] 동학군의 은신처, 교룡산 선국사(善國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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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기행] 동학군의 은신처, 교룡산 선국사(善國寺).

by 정산 돌구름 2014. 7. 20.

동학군의 은신처 교룡산 선국사(善國寺)..

 

○ 탐방일 : 2014년 7월 19일

○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산곡동 419번지

○ 선국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창건했다고 하며, 창건 당시 절근처에 용천(龍泉)이라는 샘이 있어서 절 이름을 용천사(龍泉寺)라 했다가

  절 둘레에 교룡산성을 쌓은 뒤 절의 성격이 호국도량으로 바뀌면서 이름도 선국사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절 건물이 성을 지키는 본부로 쓰인 바 있고, 산성 안에 있는 절이라고 해서 산성절이라고도 부른다.

  1803년(순조 3)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891년(고종 28)에는 칠성각을 세웠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다.

  1984년 칠성각을 중수하고 1991년 미륵불상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보제루·관음전·요사가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 아미타삼존불과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여러 점의 탱화와 큰북, 중종, 현판 2매가 보관되어 있다.

  탱화 중 삼세후불탱화는 1775년(영조 51)에서 1784년(정조 8)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쾌윤(快玧) 등이 그린 것이고,

  큰북은 선국사대북으로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현판은 1803년에 제작된 법당신건기와 1891년에 제작된 칠성각창건기가 전한다.

  보제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0년에 마루 밑에서 교룡산성승장동인이 발굴된 바 있다.

  이 인장은 전북 민속자료 제27호(1986년9월8일)로 지정되었는데 산성별장이 동학군에게 절을 빼앗길 때 빠트린 것으로 추정된다.

  보제루에는 관음전 보수 불사 방명록 등 10매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선국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돌로 낮은 기단을 쌓고, 넙적한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전북유형문화재 제114호(1985년8월16일)인 대웅전은 685년(신문왕 5년)에 건립되었으며, 1803년(순조3년)에 중건되었다.

창방 위의 주두에만 공포를 갖춘 주심포집 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외이출목 형식을 갖추었고, 기단과 주초는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민흘림기둥이며, 귀솟음 수법으로 추녀 끝을 더욱 가볍게 보이도록 하였고, 추녀마루는 굽은 기둥으로 지탱하였다.

정면 어칸에는 삼분합의 빗살문을, 안쪽 문에는 삼분합문을, 측면에는 외짝문을 각각 달았고, 공포사이의 공간에는 탱화가 그려져있다.

내부에는 교룡산성승장동인(蛟龍山城僧將銅印 전북민속자료 제27호)과 선국사 대북(전북민속자료 제5호)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 현판 옆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내부불단에는 아미타삼존불상, 삼세후불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 대북과 중종, 현판 4매가 걸려있다..

 

대웅전 삼세후불탱화는 가로 177cm, 세로 196cm로 1778년(정조2년) 송광사에서 조성된 뒤 이곳으로 옮겨 봉안된 것이다.

금어는 쾌윤(快玧), 복찬(福粲), 강운(講云) 등 3인이다.

그러나 이 탱화는 2000년11월12일 도난사고로 사라지고, 현재 봉안된 탱화는 2001년9월12일 다시 그린 것이다..

 

남원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乾漆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불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유행한 건칠(乾漆; 마른 옻칠) 기법으로 조성한 높이 132cm, 폭 93cm의 아미타불좌상이다.

현존하는 건칠상은 그 수가 많지 않고 대부분 보살상인데 이 불상은 흔치 않은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이고 14C 중반 조각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체구가 장대하고 신체 각 부위의 비례가 균형감 있게 느껴진다.

상호는 원만하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정상계주(髻珠)와 중앙계주가 있다.

어깨는 둥글고 가슴 부분은 솟아 있으며, 측면 역시 두터워 양감이 풍부하다.

법의 착용형식, 가사의 금구장식, 내의를 묶은 매듭 표현 등 1346년 제작된 보물 제337호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과 유사한 양식을 보인다.

또 둥근 얼굴과 어깨에 늘어진 옷자락 표현은 1362년 이전에 조성된 보물 제980호 화성 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과 비교된다.

건칠아미타불좌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은 인본다라니 1,158장으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말에 만든 것이다.

범자(梵字)를 원상(圓相)으로 배치한 관념화된 도상이라는 점에서 인쇄사 및 서지학 분야의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가구(架構)는 내진고주(內陣高柱) 없이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대들보 위에 충량이 걸쳐지고 그 위에 우물천장을 짰는데 중앙부는 한 단 높게 하고 주위는 경사지게 구성하고 있다..

 

신중탱화는 1929년에 봉인(奉仁), 완성(完惺), 법상(法尙) 등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선국사 대북은 전북 민속자료 제5호(1974년9월27일)로 지정되었으며, 둘레 260㎝, 길이 102㎝이다.

소나무에 소 가죽으로 제작되었고, 작자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북으로 추정된다.

선국사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으며, 대북의 크기로 보아 선국사가 큰 사찰임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법고(法鼓), 홍고(弘鼓)라고도 한다..

 

 

 

대웅전 옆의 칠성각..

 

1891년(고종28년) 칠성각을 새로 지었고, 1984년에 늘려 지었으며, 2002년 칠성각을 중수하였다..

 

칠성탱(七星幀)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대개는 손에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주존으로 하여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협시로 둔다..

독성탱(獨聖幀)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독성탱(修獨聖幀)·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한 모습이다.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산신탱(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국사 7층석탑..

 

2층의 기단위에 7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갖춘 7층석탑으로 역사는 길지 않다..

 

옆에 있는 백일홍(배롱나무)이 거대하다..

 

 

보제루(普濟樓)..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뒷면은 평지에서 올라가게 되었으며, 정면은 밑부분의 돌기둥과 윗기둥의 나무기둥으로 세워졌다.

관음전보수불사방명록(1992년)을 비롯, 시를 적은 현판 9개, 보제루중수기(1918년), 선국사중수기(1917년) 등 현판이 걸려있다.

1960년 보제루의 마루밑에서 <蛟龍山城僧將印(교룡산성승장인)>이라는 동인이 발견되었다.

이 승장동인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에 승려 처영(處英)이 선국사가 소재한 교룡산성의 승병장(僧兵將)이 되어

성을 크게 중수하고 전란에 대비하였는데, 이 때 조정에서 산성별장의 병부로써 이 동인을 보낸 것이다.

<전북문화재대관>에는 1592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전북도 민속자료 제27호(1986년9월8일)로 지정되었다.

동인의 규격은 가로 6.3㎝, 세로 7.8㎝, 두께 1.5㎝의 장방형 동판에 높이 6.5㎝, 두께 0.7㎝의 상면이 말각된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인면(印面)에는 ‘蛟龍山城僧將印(교룡산성승장인)’이라는 7자가 종서의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관음전(觀音殿)은 팔작지붕에 ㄴ자 모양의 건물로서 규모가 매우 크며, 현재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안에는 관세음보살상과 42수관음탱화, 신중탱화, 그리고 부엌에 조왕탱화 1점이 있다.

42수관음탱화는 1940년에, 신중탱화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기의 비석..

 

 백용성대종사 첫 출가성지..

 

백용성(白龍城) 대종사는 본관은 수원(水原), 법명은 진종(辰鍾), 속명은 상규(相奎), 용성은 법호(法號)이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출생, 16세 때 해인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전국의 명찰을 돌면서 심신 연마에 힘썼다.

1911년 서울에서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일로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저술에 진력하였으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각교를 창설하였다.

1922년 중국 연길에 대각교당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0년2월24일 나이 77세, 법랍 61세에 입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1년 세웠다는 미륵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