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기행] 전북 기념물 제9호, 교룡산성(蛟龍山城)..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남원기행] 전북 기념물 제9호, 교룡산성(蛟龍山城)..

by 정산 돌구름 2014. 7. 20.

전북 기념물 제9호, 교룡산성(蛟龍山城)..

 

 

○ 탐방일 : 2014년 7월 19일

○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

○ 교룡산성 소개

  삼국시대에 축조된 포곡식 석축 산성으로 전북도기념물 제9호(1973년6월23일)로 지정되었다.

  교룡산(蛟龍山 519m)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축조된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둘레가 3,120m이다.

  현재 동문의 홍예(虹霓)와 옹성(甕城) 그리고 산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남원은 백제 때 고룡군(古龍郡)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서에 보이는 교룡(蛟龍)·거물(居勿)·기문(基汶) 등의 명칭이 모두 고룡의 전사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산성이 백제시대에 쌓았다고 확증할 수는 없다.

  다만 조선 초기에 이미 군창이 있었다는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을 보면 그 연혁은 조선 초기 이전으로 소급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교룡산성이 남원부 서쪽 7리에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축성의 내력에 대하여는 명확하지 않으나, 택지(擇地)나 형식으로 보아 삼국시대 백제의 축성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기록상으로는 임진왜란 중인 선조 25년(1592년)에 금산사에서 의거한 승병장 처영(處英)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다 한다.

  그 후 선조 30년(1597년)에는 남원부사 최염이 주변 일곱고을의 군사를 징발하여 수축하였고, 숙종 때에도 수축공사가 있었다.

  성은 교룡산의 동쪽 수구(水口)에 동문을 설치하고, 산세에 따라 양쪽의 능선을 감싸고 있는 석축산성이다.

  동문은 옹성(饔城)에 쌓여 있어 남쪽에서 성벽을 따라 들어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ㄱ자형으로 꺾인 곳에 홍예문이 있다.

  홍예문의 측면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의 액부(額部)는 아홉 개의 돌을 아취형으로 맞춘 것이다.

  가구는 매우 단조로와 금산사 입구 홍예문보다 뒤떨어지는 것 같으나 처영이 당초 금산사에 머물렀던 것을 미루어 볼 때,

  양쪽의 성문은 그의 중수(重修)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고, 계곡도 있어서 유사시에 주변의 주민들을 징발하여 성을 지키기에 좋은 곳이었다.

  북쪽으로는 밀덕봉(密德峰)·복덕봉(福德峰)의 험준함이 있고 서쪽도 험준하여 남북이 서로 바라다보이지 않는다.

  성을 지키는 책임은 남원부사(南原府使)와 별장(別將)이었고, 성 안에 용천사(龍泉寺)가 있었다.

  동문안 북측에는 몇 개의 기적비(紀績碑)가 있다.

  "천총이진택중건기루 영세기속숭정5년병자5월일(千摠李震澤重建欺樓 永世紀續崇楨五年丙子五月日)"이란 글이 새겨져 있음을 보아,

  인조 14년(1636)에 이 동문초루(東門樵樓)가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원지역 20여 개의 산성 중 그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성으로, 성벽 구조가 한국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