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기행]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慶基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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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기행]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慶基殿)

by 정산 돌구름 2014. 6. 10.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慶基殿)..

 

○ 탐방일 : 2014년 6월 7일

○ 소재지 :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 경기전 소개

  1971년 전북 유형문화재2호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1월9일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12월1일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었다.

  전주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사(廟祠)로 전주 경기전 정전(全州 慶基殿 正殿)으로 불리는데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건물이다.

  1410년(태종 10년)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경기전(慶基殿)은 태조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전각으로 있는데 준원전(濬源殿), 영희전(永禧殿)에도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경기전 관원으로는 영(令, 從五品) 1명, 참봉(參奉, 從九品) 1명이 배속되었다.

  1442년(세종 24년) 전주의 어용전을 경기전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 창건되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보물 제931호인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의 유적이 있다.

  1410년(태종 10)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완산·계림·평양 등 세 곳에 창건하여 부왕인 조선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셨다.

  1442년(세종 24)에는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종전이라 불렀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하였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 본전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翼廊)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세 번째 기둥렬에 고주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단 헌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 양 옆에는 익랑(翼廊, 문의 좌우편에 잇대어 지은 행랑) 2칸, 무(廡,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 4칸이 있다.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

  현재 이곳에 있는 조선 태조 어진은 1442년에 그린 것을 1872년(고종 9)에 고쳐 그린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진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다.

  현재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경기전, 오목대, 향교 등 중요 문화재와 문화시설이 산재한 전주한옥마을은 전주만의 독특한 생활문화공간이다.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옛 선비들의 멋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전 안내도..

 

경기전 수문장..

 

경기전 하마비(慶基殿 下馬碑)

임진왜란 후 경기전이 중건되던 1614년(광해군 6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1856년(철종 7년)에 중각(重刻)되었다.

비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경기전 하마비는 여느 하마비와는 다르게 판석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혹은 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로,

단지 하마(下馬)의 의미로서만이 아닌 경기전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비석의 형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여서 조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경기전이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홍살문(紅─門)은 궁전·관아·능·묘(廟)·원(園)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문으로 홍전문(紅箭門)·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외삼문..

 

예종대왕태실 및 비..

전북민속자료 제26호(1986년9월8일)로 지정되었으며, 태실은 부도와 같은 형태로 태를 넣은 항아리를 석실에 묻었다..

 

전체 높이 2.35m이며 옥신(屋身)의 둘레 255cm, 난간 둘레 1,540cm, 난간주 높이 108cm이다.

1578년(선조 12년)에 전북 완주군 구이면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는데, 1734년(영조 10년)에 다시 세웠고,

1970년 태실비(胎室碑)와 함께 경기전으로 옮겼다..

 

비는 높이 1m, 폭 46㎝, 두께 21㎝로서 네 모퉁이에 각이 졌다.

비는 거북이가 도사리고 앉아 있는 형태의 돌위에 세워졌으며 윗부분은 용을 조각한 대리석이다...

 

비석 전면에는 ‘예종대왕태실(睿宗大王胎室)’이라는 6자가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후면에는 ‘만력6년10월초 2일건(萬曆六年 十月初二日建)’이라 쓴 아래 2줄로

‘후 156년 갑인8월26일 개석립(後 百五十六年 甲寅 八月二十六日 改石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6호(1973년6월23일)로 지정되어있는 조경묘(肇慶廟)..

경기전 경내 북쪽에 있으며, 1771년(영조 47년) 이득리(李得履) 등 7도(七道) 유생들의 상소로 창건된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주이씨는 전주에서 발생하였다고 하나 당시까지만 해도 시조 묘가 없었다.

시조 이한(李翰)은 태조의 21대조로서 신라시대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고, 전주 동교의 발산 아래 자만동(滋滿洞)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태조의 4대조 이안사(李安社)가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덕원 땅에 옮겨갈 때까지 19대가 전주에 세거(世居)한 셈이 된다.

시조비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1대손이라 전한다.

1854년(철종 5년) 10월에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중수되었고,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전주 부성이 점령되려 하자

위패들을 위봉사의 행궁에 안치하였다가 그해 7월17일 다시 전주로 옮겨 왔다...

 

영조의 친필인 ‘시조고신라사공신위(始祖固新羅司空神位)’와 ‘시조비경주김씨신위(始祖妃慶州金氏神位)’라고 쓴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조경묘의 창건 경위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히 실려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내에 있던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고 경기전 정전과 조경묘만 남아 있다가 최근 들어 부속건물을 복원하였다..

 

어진박물관(御眞博物館)..

 

조선 태조의 어진과 어진봉안 때 쓰였던 가마, 용선, 홍개 등의 의식구를 소장ㆍ전시하고 있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다.

조선왕조는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다.

조선 건국 후 한양, 평양, 경주, 개경, 영흥, 전주 등 여섯곳에 태조어진을 봉안하였으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유일하다.

이러한 태조어진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문화재청과 전주시가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경기전 뒤편에 어진박물관을 건립하였다.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주년이 되던 2010년11월6일에 개관하였으며, 지상 1층, 지하 1층 연면적 1193.71㎡의 한옥으로 건축되어있다.

경기전의 경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전시실이 주로 지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지상의 어진실에는 태조어진 진본(국보 제317호)을 비롯, 영조ㆍ철종ㆍ고종ㆍ순종 어진 모사본과 세종과 정조 표준영정을 모시고 있다.

지하는 상설전시실(역사실, 가마실)과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실에는 어진이안통, 용두, 『조선왕조실록』(복제본)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가마실에는 어진을 이안하는데 쓰인 신연, 향정자, 채여, 가교 등을 비롯한 가마류가 전시되어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태조를 비롯해 조선왕실과 관련한 특별전이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다른 명칭으로는 일월도 (日月圖), 곤륜도 (崑崙圖) 등이 있으며 놓이는 위치는 주로 용상 뒤였다.

장식성이 강한 일월오봉도는 왕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일월오봉도에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물이 일정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유교의 고전인 <시경(詩經)>에 있는 <천보 (天保)>라는 시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시는 왕의 덕을 칭송하고 왕에 대한 하늘과 조상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그림 속의 소재들은 한결같이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청색과 녹색이 주류를 이루는 농채를 사용하였고 준법이 구사되어 있지 않으며, 화면 양 끝에 소나무를 배치하고 그 가운데에 다섯봉우리의

산과 해와 달을 그려 넣은 구도상의 특징 등에서 강한 보수성과 전통성이 느껴진다...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어진 뿐이라고 한다..

 

 

 

 

 

 

 

 

 

 

 

 

 

 

 

 

전동성당이 바라보인다..

 

 

부속건물 경기전 용실..

 

제수용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으로 디딜방아와 절구를 두고 경기전 제례의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전사청(典祀廳)..

 

제사에 쓸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를 관장하는 곳이다..

 

 

조과청(造菓廳)..

떡이나 유밀과, 다식 등의 제사 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는 곳이다.. 

 

제기고(祭器庫)..

 

제사에 사용되는 그릇이나 기구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바닥을 마루로 하여 지면의 습기로부터 그릇을 보호한다..

 

조과청과 전사청..

 

동재(東齋)..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재각(齋閣)이라고도 하며, 제사를 맡은 관원들은 이곳에서 제계의식을 치룬다..

 

서재(西齋)...

 

동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어정(御井)..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이다. 종묘, 사직단 등에서 임금이 참여하는 제례에 사용하는 우물도 어정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셨던 경주의 집현전, 평양의 영숭전, 전주의 경기전 우물도 어정이라고 하였다..

 

어정은 깨끗하고 성스럽게 취급해야 하므로 주위에 담을 두르고 문을 달아두기도 한다..

경기전의 의식이나 관청, 관리의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마청을 두았다..

 

조정에서 참례하기 위해 내려온 관리의 말을 매어 두는 곳이다..

 

전동성당의 모습..

 

수복청..

 

경기전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낮은 직급의 벼슬아치들이 있던 곳이다..

 

 

주로 큰 일이 있을 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정기간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경덕헌..

 

 

경기전을 지키는 수문장의 일을 맡아보는 곳이다..

 

경기전 외삼문..

다포계맞배집으로 서원, 향교의 삼문보다 크고 화려하며, 궁궐의 삼문보다 작지만 궁궐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경기전 내삼문..

다포계맞배지붕으로 외삼문과 더불의 경기전의 위엄을 돋보이게 한다..

 

경기전 경전..

잘 다듬은 화강암 기단위에 정자각 형태로 꾸몄다..

 

본전 앞에는 본전의 기단보다 약간 낮은 두벌대 장대석 기단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벽체없이 박공지붕을 얹은 헌(軒)이 있다.. 

 

화재에 대비하여 방화수를 마련한 큰 독이나 가마를 드므(豆毛)라 한다..

 

용마루와 내림마루가 적새가 아닌 생석회로 만든 양성마루로서 오직 궁궝레서만 볼 수 있는 구조이다..

 

경기전 조선 태조 어진(御眞)..

보물 제931호(987년12월26일)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제317호(2012년6월29일)로 승격되었다.

1872년(고종 9년) 조중묵(趙重默)이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견본 세필채색화(絹本細筆彩色畵)로 크기는 150×218㎝이다..

 

태조 이성계는 함남 영흥(永興)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본관은 전주이다.

고려말 수문하시중, 도총중외제군사, 삼군도총제사 등을 지낸 뒤 1392년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조선 태조가 되었다.

태조 어진은 조선 후기 화가 조중묵이 모사(模寫)한 익선관본(翼善冠本)으로 비록 옮겨 그린 것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 어진이다.

어깨와 앞가슴에 황룡을 수놓은 청포(靑袍)를 입고, 용상(龍床)에 정면을 바라보며 앉은 태조의 모습을 공식적인 어진도상 형식으로 그렸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경기전에 어진을 봉안한 것은 1410년(태종 10년) 무렵이다.

임진왜란 때 정읍 내장산을 거쳐 아산 등지로 피난시켰다가 1597년(선조 30년)에는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안치하기도 했다.

1614년(광해군 6년)에 경기전이 중건되자 묘향산에서 전주로 이관해 봉안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성으로 옮겼으며, 1767년(영조 43년) 정해대화재 때는 전주향교 명륜당에 피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872년 어진이 너무 낡아 새로이 모사하여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