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기행] 삼별초의 장수, 배중손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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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기행] 삼별초의 장수, 배중손 사당..

by 정산 돌구름 2014. 6. 4.

삼별초(三別草)의 장수, 배중손(裵仲孫) 사당(祠堂)..

 

○ 탐방일 : 2014년 6월 3일

○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 배중손 사당 소개

 고려 무신정권때 몽고침략에 대항한 삼별초의 장수 배중손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정충사(精忠祠)라고 부른다. 향사일은 6월15일이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임회면 굴포리 마을에는 당(堂)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는 농악을 연주하고 배중손장군과 삼별초군,

 고산 윤선도 제를 모시는 전통이 있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堂)이 허물어져 방치해오다가, 굴포리 출신 동양화가 백포 곽남배가 주민 성금과 사비를 들여 현 위치에

 5평 규모의 사당과 신당비를 세우고 굴포주민들이 제를 모셔왔다.

 이후 퇴락하자 1996년 사당 재건립 예산을 전남도에 건의, 1998년12월~1999년6월까지 사업을 추진하여 1999년10월16일 준공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5평 규모의 맞배지붕집으로 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뜰에는 배중손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동상은 1999년 8월에는 배씨 대종회에서 종친 성금을 모금하여 건립하고 진도군에 기증하였다.

 현 사당은 배중손이 남도석성전투에 패한 후 굴포해안쪽으로 이동하다 당시 바다뻘밭이던 이곳에서 최후를 마친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배중손은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석성(南桃石城 사적 제127호)을 근거지로 삼아 몽골군과 항쟁하였는데 여몽연합군에게

 패한 후 굴포해안 쪽으로 이동하다 최후를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배중손(裵仲孫)은 원종 11년(1270년) 5월15일 임유무의 무인정권이 정변에 의하여 붕괴되고, 5월23일 개경에의 환도가 결정되자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반몽집단은 크게 동요하였다.

 개경정부는 이들을 회유하는 한편 5월29일 삼별초를 혁파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6월1일 배중손은 삼별초를 움직여 왕족 승화후 온(溫)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고 아울러 대장군 유존혁과 상서좌승 이신손을

 좌, 우 승선(承宣)에 임명함으로써 몽고에 복속한 개경정부를 배격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배중손은 삼별초 반몽세력을 규합하여 6월3일 강화도를 출발하여 전라도 서남해안의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정하고,

 고려의 정통정부를 자임하면서 반몽고 항전을 지속하였다.

 제주도를 그 배후 기지로 확보하는 한편, 진도와 남해 연안이 갖는 전략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본과의 반몽고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271년(원종 12년) 4월 고려·몽고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에 의하여 진도가 함락됨으로써 삼별초 정권은 붕괴하였는데,

 이때 배중손은 많은 군사들과 함께 최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삼별초 반몽세력의 일부는 제주도로 탈출하여 1273년(원종 14년)까지 반몽 항전을 지속하였다.

 진도의 배중손이 몽고군 공격군 사령관 아해(阿海)에게 진도에 오도록 초청하면서 몽고에 복속하겠다는 제안을 한 점을 들어 그가

 몽고와 타협하려 하였다거나, 진도 공함시 배중손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배중손이 1271년4월 이전에

 이미 숙청된 상태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신빙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