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기행] 천년의 향기, 남원 용담사(龍潭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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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기행] 천년의 향기, 남원 용담사(龍潭寺)

by 정산 돌구름 2014. 1. 8.
[남원기행] 천년의 향기, 남원 용담사(龍潭寺)..

 

○ 탐방일 : 2014년 1월 5일

○ 소재지 : 저북 남원시 주천면 원천로 165-26

○ 용담사 소개

  용담사는 현재 정확한 창건 년대는 알 수 없고, 다만 백제 성왕(聖王, 523~554)때 창건됐다는 설과 통일신라 말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도선국사의 창건설에 대해서는 예전에 이곳의 용담천에 못된 이무기가 살고 있으면서 부근의 사람들을 해치곤 했다.

  그러나 도선국사가 와서 이곳에 절을 지어 용담사라 한 다음부터는 이무기의 행패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하는 설화가 전한다.

  절의 대웅전이 북향해 있는 이유도 바로 절 뒤에 있는 용담천의 이무기 전설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확한 창건 년대는 전하지 않지만, 절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석불입상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적어도 이 무렵에는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창건 이래 근래에 이르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914년에 옛터에 중창했고, 1930년에도 중창 불사를 했다. 최근에는 1989년에 수해로 무너진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996년에 칠성각을 헐고, 북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새로 지었다.

  용담사는 보물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는 4m 이상의 거불입상이 서 있는 곳이다.

  거불입상이 한 눈에 들어오며, 경내의 전각은 중심축이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일정한 규칙이나 원칙이 없이 배열된 듯하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칠성각 및 석불입상 보호각이 있으며, 이들 전각보다 웅장하고 크고 멋진 요사채 3채가 사찰 왼쪽 축에 가득하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은 목조건물로 1914년에 옛터에 중창했고, 1930년에도 중창 불사를 했다.

수해로 인해 무너진 대웅전을 1989년에 그대로 복원했는데, 무너졌던 대웅전은 당시 발견된 상량문을 보니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지은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그 상량문은 없다.

자연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각형기둥을 세웠으며 주심포 형식에 겹처마형식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목조기와집이다.

편액은 ‘대웅전’을 걸었고 주련은 없으며 내외부에는 단청을 칠했으나 단순하고 간일하게 그려져 있다.

귀솟음에 우물마루이고 문짝은 3분합으로 3개가 마련되어 있다...

 

 

전각 내부에는 석가불좌상을 모셨는데, 대웅전의 규모에 비해 크기가 매우 큰데 이 석가불좌상은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크고 두툼하며 양감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었다...

 

내부의 불화로는 후불탱이 있고, 신중탱,용선탱, 지장시왕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그 밖에 전각 외곽에는 커다란 법고가 매달려 있다..

 

 

 

 

보호막으로 둘러쌓여 있는 용담사지 석불입상(石佛立像).. 현재 보물 제 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호막을 설치하기 이전의 모습>

머리를 제외한 전체 높이가 468cm이고, 신체의 높이가 404cm이며, 대좌의 높이는 64cm이고 대좌의 폭은 273cm이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해서 옆면을 제외하고는 세부 표현을 거의 알 수 없으나, 거구(巨軀)에 소략한 옷 주름을 갖춘 시원스런

고려시대 양식을 보인다. 석불상 좌우와 위로 보호각이 설치되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서향을 하고 있으며, 광배와 불신이 하나의 돌로 새겨져 있으며, 고려 전기의 거불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석주형의 여래입상이다.

타원형의 자연석을 이용한 대좌 위에 서있는 거대한 이 불상은 마멸이 심하여 세부적인 판독은 어려우나 고려시대 불상으로는

매우 양감있게 표현하였다. 긴 얼굴에 육계는 높고 상호는 긴 편이지만 눈코입 등은 거의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으나,

두 귀는 길고 목에는 형식적으로 표현한 삼도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어깨는 장대하고 강건한 신체를 나타내어 장대하고 당당한 기풍을 보이는데, 몸체의 세부 표현은 역시 마모되어 잘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괴체화는 결코 아닌 매우 당당하고 양감이 풍부한 불상이다.

두 손은 복부 근처에 대고 있으나 마멸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몸의 굴곡도 역시 마멸이 심하여 잘 알아보기 힘드나 측면에 남아 있는 의습을 보면 굵고 간략한 음각선으로 새겼고 발목 부분은

종선의문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옷 주름은 옆면에만 거의 남아 있는데, 굵은 선으로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세부 특징을 파악하기는 불분명하다.

광배는 거신광인데, 불상과 한 돌이며 결실된 부분이 많으며, 광배의 세부 장식무늬는 잘 알기 어렵다. 광배의 상단 좌우에 원공이

뚫려 있으며 이 원공은 대좌 좌우측면에 뚫린 방형공과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어 원래는 별도의 보호장치를 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타원형의 자연거석으로 발 밑의 촉을 끼워서 신체와 연결하게 되어 있다.

최근 사찰측에 의해 매몰되어 있던 연화대좌의 하반부가 노출되어 알 수 있다.

대좌는 단판 8엽에 간엽이 있고, 판폭이 93㎝에 이를 정도로 대형이며, 여기에 불상 발밑에 있는 촉을 끼웠다..

 

전체 높이 600㎝인 이 불상은 거구장신의 체구로 간략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수법은 의습에서나 광배 및 대좌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고려 초기의 제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거구의 불상은 안동 이천동 석불입상(보물 제115호), 함양 마천 마애여래입상(보물 제375호),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보물 제93호) 등이 있는데, 이 시기의 거구 불상들의 제작과정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용담사 칠층석탑...

 

높이 9.95m이고 길고 가는 형태의 고려시대 석탑이고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에서 7m 가량 떨어진 석등과 함께 용담사지 석불입상 앞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방형 기대석 위에 1단의 괴임석을 두어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데. 기단은 단층으로서 한 돌로만 이루어져 있다...

 

 

 

제1층 옥신은 우주(隅柱)를 모각(模刻)한 판석을 좌우에 세우고 그 두께를 우주로 삼아 앞뒤에 면석을 끼우는 수법으로 되었다.

옥개석은 층급 받침은 6단이며, 추녀 아랫면은 거의 수평이고 낙수면 경사도 완만하며 추녀 끝의 반곡(反曲)도 거의 없다.

제2탑신부터 너비와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한 돌에다 우주를 새겼다.

제2옥개석과 제3옥개석은 아랫면에 6단의 층급을 새겼으나 받침의 높이는 높고 옥신은 소형이어서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제4옥개석은 5단 받침이며, 제5옥개석은 4단, 제6・7옥개석은 3단 받침으로 점점 줄어드는데, 이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

 

옥신 역시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줄어드는데, 제5옥신부터는 2매의 면석을 좌우로 놓아 옥신을 받치고 있다.

크기는 현재 높이 995㎝인데, 상륜부가 결실되었으므로 본래의 높이는 더욱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담사 칠층석탑과 일렬로 배치된 석등 역시 고려시대 작품이다.

팔각형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 역시 팔각형 하대석과 간석(竿石)이 있으며, 앙련(仰蓮)의 상대석 위에 화사석을 얹고 옥개석을 씌었다.

대체적으로 별다른 장식이 없는 편이며,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요사채는 정면 5칸과 측면 3칸의 주심포 형식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ㄱ’자 형태를 하고 있는 목조기와집이다.

편액과 주련도 없으며 단청을 칠하지 않아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종무소 겸 요사채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이고, 덤벙주초에 각형 기둥을 하고 주심포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목조기와집이다.

용담사라 쓴 편액이 걸려 있고, 주련은 걸려 있지 않으며 단청을 하지 않아 퇴락한 느낌이 쓸쓸하면서 고찰의 분위기가 특히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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