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기행] 호서제일가람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청동미륵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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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기행] 호서제일가람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청동미륵대불..

by 정산 돌구름 2013. 10. 23.
[보은기행] 호서제일가람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청동미륵대불..

 

○ 탐방일 : 2013년 10월 12일

○ 소재지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 법주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진흥왕14년(553)에 의신(義信)조사가 창건, 혜공왕12년(776년)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이 절은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됨으로써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는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택하여 가람을 이룩하고 교법을

  펴라고 하였는데, 이에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길상초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그뒤 고려 숙종6년(1101년)에는 숙종이 그의 아우 대각국사 의천(義天)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이 절에서 베풀었는데

  당시 3만명의 승려들이 모였다.

  충렬왕7년(1281년)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珊瑚殿)에 배향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공민왕12년(1363년) 왕이 절에 들렀다가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조선 태조가 상환암(上歡庵)에서 기도하였고, 세조는 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복천암(福泉庵)에 와서 3일 동안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신라 영심의 중창 이래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선조38년(1605년)부터 인조4년(1626년)에 걸쳐 유정(惟政)이 팔상전을 중건하였다.

  인조2년(1624년)에도 벽암(碧巖)이 중창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쳤다.

  철종2년(1851년)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주선으로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고종9년(1872년)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렸다.

  1967년 태전(太田)이 중수하였으며,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 중수가 있었다.

  그뒤 1990년 청동미륵상을 중수하고 그 좌대 아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전을 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팔상전(捌相殿)·명부전(冥府殿)·원통보전(圓通寶殿)·약사전(藥師殿)·천왕문(天王門)·금강문(金剛門)·

  능인전(能仁殿)·진영각(眞影閣)·사리각(舍利閣)·염화실(拈華室)·삼성각(三聖閣)·응향각(凝香閣)·진해당(振海堂)·궁현당(窮玄堂)·

  명월료·정제당 등이 있다..

 

 

일주문..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섬으로써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주문 정면에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뒷쪽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금강문(金剛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다포식 건물로 중앙의 어칸은 절을 들어가는 통로이다.

금강문은 태장계에 이른 계단으로 곧 지성의 힘, 금강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떨쳐버린 이후에 비로써 나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양쪽 어칸에는 금강신과 더불어 사자를 탄 문수보살상...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천왕문(天王門)

충북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1977년12월6일)된 법주사의 금강문과 법주사 팔상전 사이에 있는 불사의 산문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중앙 1칸은 통로이고 양쪽 2칸에 높이 5.7m, 둘레 1.8m의 천왕상을 2구씩 4구가 있다.

여기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공포는 다포계로 짰는데 칸 너비가 좁은 협칸은 주간포 대신 화반을 1구 설치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에 한식기와를 올린 맞배지붕인데 원래는 팔작지붕이었다.

앞면 3칸에는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문이 아니라 작은 판창(板窓)을 달았다.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은 수미산(須彌山) 동쪽 승신주(勝神洲)를 지키며 손에 비파를 들고,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은 수미산 서쪽 우화주(牛貨洲)를 지키며 손에 용과 여의보주를 들고 있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은 수미산 남쪽 담부주(膽部洲)를 지키며 손에 칼, 보봉(寶棒)을 잡고,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은 수미산 북쪽 구노주를 지키며 손에 보탑을 들고 있다.

 

청동미륵불(靑銅彌勒佛)..

법주사의 이미지라 할만큼 법주사 하면 미륵대불을 떠올린다.

하지만 높이 8m의 기단 위에 25m 높이로 우뚝 선 미륵대불이 법주사에 자리 잡은 것은 불과 4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미륵대불이 위치한 곳에는 옛날 산호전(珊瑚殿)·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 또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라 불리던 법당이 있었다.

이 법당 안에는 신라시대 진표 스님이 조성한 금색의 미륵장륙상이 있어 오랫동안 법주사의 구심적 역할을 해왔었다.

그러나 1872년(고종 9)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當百錢) 주조를 위해 흥선대원군은 미륵장륙상을 압수하여 녹이고 말았다.

이후 1939년 주지 석상(石霜)스님의 원력과 김영곤(金永坤)거사의 시주에 의해 미륵불 조성불사를 착수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미륵불을 조성한 것은 1964년에 이르러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시주로 완성하였다.

그러나 시멘트로 조성한 불상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외관이 볼썽사납게 변하였다.

1990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지 월탄 스님과 사부대중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청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완성하였다.

점안식 날 하늘에서는 서광이 비추고 머리 위에서는 백호광명(白毫光明)이 치솟아 모든 대중이 환희와 감탄에 젖었다고 한다.

여기에 소요된 청동의 무게는 무려 160톤에 달하였으며, 최근 청동 위에 금칠하였다..

 

이 상은 미륵불입상으로 통통하고 원만한 얼굴에 머리는 나발로 중앙계주가 있는 육계를 갖췄다.

머리 뒤의 두광은 투각으로 화염문과 법륜, 화불을 장식하였다.

법의는 통견으로 법의자락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하반신에서는 무릎 밑으로 U자형 주름을 이룬다.

대좌는 복련과 앙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이다..

 

용화전 입구의 불단...

 

미륵대불 대좌 아래 지하에는 반가사유상을 모신 용화전이 마련되어 있다.

안에는 중앙의 반가사유상을 본존으로 주변에 전시공간을 만들어 절과 산내암자 등에 있던 성보를 전시하고 있다..

보물 제916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통보전(圓通寶殿)..

팔상전과 대웅전 사이 중심축의 왼쪽에 자리 잡은 전각으로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義信組師)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다.

776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碧巖大師)가 다시금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면이 측면에 비해 약간 길지만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이다.

기단은 지복석 위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과 갑석을 쌓은 가구식구조이며 정면 중앙에 소맷돌을 갖춘 계단을 두었다.

초석은 쇠시리를 둔 방형초석인데 상면만 다듬은 부정형 초석으로 2개뿐이다.

전면 기단 모서리에는 활주 초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팔각형 석재가 놓여 있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다듬은 원형기둥인데 일부는 약하게 배흘림으로 치목한 것도 섞여 있다.

기둥머리는 창방을 결구한 다음 평방을 놓고 공포를 조립하였다.

일반적으로 평방은 다포계 공포를 짤 때 쓰는 부재인데 원통전은 주심포계 공포 건물이면서도 평방을 두었다.

공포는 전체적으로 주심포계지만 부분적으로 다포와 익공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처마는 4면 보두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이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꾸미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관음보살상 위 천장에는 닫집 대신에 우물천장 4개를 합친 크기로 우물반자 2개를 나란히 설치하여 닫집에 버금가게 장식하였다.

정면은 전체적으로 창호로 꾸미고, 배면 가운데 칸과 좌측의 앞칸 및 가운데 칸에도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는 심벽구조로 벽체를 들였다.

문은 하부에 궁판을 둔 격자살이고, 외부 포벽에는 여래좌상을 그려 넣었고, 내부 내목도리 상부 벽에도 산수초목화를 그려 넣었다.

원통보전은 정방형(正方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으로서 조선 중기의 미묘하고도 화려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고,

주심포계(柱心包系)의 단층 건물로 사모지붕에 절병통으로 조성된 특유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1624년(인조 2)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래 고종 29년(1892)에 중수한 기록이 있고 천장을 비롯한 지붕가구의 일부는 후대에서 수리된 모습을 남기고 있다. 1974년에 전체적으로 해체 복원 작업을 하였다.

하지만 원통보전을 받친 기단과 계단, 초석은 고려 전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앉은키 2.8m, 허리둘레 1.9m의 거대한 목조의 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이 자비가 넘치는 상호로 봉안되어 있다. .

 

중앙 불단에 높이 2.80m의 목조관음보살상은 얼굴은 원만한 방형으로, 머리에는 아미타불의 화불(化佛)있는 화려한 보관을 썼다.

수인은 중품중생인을 결하고, 화려한 채색이 가미된 목조의 연화대좌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정좌하였다.

법의는 통견식으로 걸쳤는데 가슴으로부터 천의가 날리고 있다.

무릎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봉안하였는데, 연화좌 위에 합장의 자세로 본존상을 향하고 있다..

 

보살상 뒤로는 관음탱이 있고, 오른쪽 벽에는 제석천룡탱이 걸려 있다.

1897년(건양 2년)에 조성된 신중탱은 향우측벽에 봉안되어 있으며, 크기는 186.5×152.5cm이다.

중앙에 동진보살(童眞菩薩)과 좌측의 대범천왕(大梵天王)과 우측의 제석천왕(帝釋天王)으로 균형을 잡고,

앞줄은 좌로부터 남방(南方) ‧ 동방(東方) ‧ 북방(北方) ‧ 서방천왕(西方天王) 순으로 사천왕을 배치하고,

그 위에 좌로부터 일궁천자(日宮天子)와 산신(山神), 그 건너에 월궁천자(月宮天子)와 조왕(竈王)을 배치하였다.

거기에 더해 기악천동(奏樂天童) 둘과 일산(日傘)과 파초선(芭蕉扇)을 든 천녀(天女) 둘을 배치하였다.

이 불화는 마곡사의 금호(錦湖)가 관음탱을 조성할 때 동시에 조성한 것이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

얕은 기단 위에 서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집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른다.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불전 가운데 중층건물은 마곡사 대웅전과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 등 극소수뿐이어서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옛 기록에는 대웅대광명전이란 당호를 쓰고 있는데 조선 후기 이후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기단과 계단은 현 건물보다 앞선 시기에 조성된 것이며, 공포는 상하 출목을 달리하여 하층은 2출목이나 상층은 3출목으로 짰다.

처마는 겹처마에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으며 기와골 끝은 막새를 끼웠다.

안에는 닫집 없이 후불탱 상부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우측벽에는 1897년에 조성한 신중탱을, 좌측벽에는 1928년에 조성한 삼장탱을 걸었다.

2004년 전면 해체 후 보수공사를 시행하였다..

 

불상은 모두 소조불로 실내 안존불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3신불(三身佛)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이고,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타나신 석가모니불상이다.

삼신불 뒤로는 삼신불후불탱을 봉안하였는데, 각 상마다 후불탱을 하나씩 걸었다..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여래(釋迦如來)는 한 손은 위를 향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한창 보주중인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로 지정된 팔상전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이다... 

 

법주사에 팔상전을 처음 세운 것은 의신스님으로 절을 창건할 때 지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신라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었으나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1602년부터 사명대사(송운 유정)과 벽암대사에  의해 인조 2년(1624년)에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1968년, 팔상전 해체 중수공사시 중앙의 거대한 심주 밑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 건립 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전각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가 모셔져 있으며,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사진은 보수공사 이전의 모습>

 

1층과 2층은 정면과 측면 각5칸이며, 3층은 정면과 측면 각3칸으로 줄어들고 맨위인 5층은 사방 1칸인데 내부는 통층으로 트여있다.

각 층의 사면은 모두 창호를 설치하였으며, 1층은 각 면 어칸에만 출입문을 달고 나머지는 머름 위에 창호를 달았다.

기단과 계단은 현 건물보다 앞선 시기 작품으로 조선시대에 재건하면서 건물을 키워 기단면이 매우 좁다.

공포는 각층마다 다른데 1층의 공포는 기둥 위에만 얹은 1출목의 주심포 형식이지만 2· 3· 4층은 2출목의 주심포 형식이고,

다시 5층은 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기둥 사이에 공포를 올린 완전한 다포형식이다.

서까래만 쓴 홑처마로 구성하여 한식기와를 올렸고, 최상층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한 가운데에 절병통과 상륜부를 올려 마무리하였다..

 

일반적으로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8폭의 그림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 전각을 말한다.

법주사 팔상전은 목탑 구조의 전각으로 안에는 4면에 팔상도를 봉안하고 있다.

한폭에 각각 2상을 나타냈는데 세로 200㎝, 가로 90㎝로 1897년에 조성하였으며, 팔상도 앞에는 각면에 4위의 불상을 안치했다.

그런데 1구는 석가여래의 열반모습을 재현한 와불상(臥佛像)이고, 불상 주변에 소형 불상 500위를 모셨다..

불단에는 수기삼존상(受記三尊像)이 모셔져 있고 뒤로 팔상탱이 걸려 있다.

그 주위에는 영취산에 머물며 500명의 제자에게 수기를 전했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재현한 듯 나한상이 모셔졌다.

수기삼존불의 중앙 본존불은 석가여래이다.

왼쪽에는 머리카락을 깔아 공덕을 쌓아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는 정광불(定光佛)의 보살형 제화갈라가 협시를 봉안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장차 미래에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다.

팔상탱은 도솔천에서 하강, 룸비니에서 탄생, 4문 관찰, 출가, 설산에서 고행, 악마를 굴복시킴, 녹야원 설법, 열반 등의 8장면이다.

8폭의 그림은 순례객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며 부처님을 예배하도록 되어 있다..

 

 

 

 

 

약사전(藥師殿)..

중심축을 사이에 두고 원통보전과 거의 대칭 위치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낮은 장대석 기단위에 초석을 놓았는데 일부는 주좌를 새겨 절 안에 있던 옛 부재를 재활용한 듯하다.

기둥은 원형으로 민흘림으로 치목하였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을 끼운 후 익공을 짜 올렸다.

출목 없는 이익공을 짜고 익공 위에는 보머리 끝에 봉황머리를 새겨 붙였다.

처마는 서까래만 쓴 홑처마로 올렸고, 지붕은 한식기와로 맞배를 만들고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였으며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다..

 

법주사 약사전은 원래 20세기초까지는 원통보전 동쪽 정면에 있었으며, 지금의 약사전은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

 

약사전 중앙 불단에는 약사불 좌상을 독존으로 모시고 뒤에 약사후불탱을 걸었는데 모두 1997년에 조성되었다.

약사불은 좌우에 일광(日光), 월광보살(月光菩薩)은 없다.

손은 중품중생인을 결하고 왼손에 약함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연화대좌 위에 정좌하고 있다.

볼륨감 있는 얼굴과 신체에서는 현실감이 느껴지고, 통견식 법의는 신체를 따라 비교적 밀착되어 자연스럽게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로 큼직한 중앙계주를 갖추고, 육계는 평편하고 낮다.

후불탱은 약사회상을 묘사한 것으로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춘 약사불 주위로 보살을 비롯한 권속들이 에워싼 군도형식을 취한다.. 

 

범종각은 팔상전 동쪽에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목어(木魚) 등 4물(四物)을 봉안하였다.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모두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원한 해탈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린다.. 

 

삼성각(三聖閣)..

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양상을 보여주는 전각으로 명부전 오른편에 있으며 대웅보전을 향하고 있다. 

삼성각 외벽에는 호랑이와 숲 속에서 수행하는 독성의 모습을 벽화로 나타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청동미륵불을 조성하면서 명부전과 함께 지었다..

 

삼성각에는 1991년에 조성한 칠성(七星)·독성(獨聖)·산신(山神)을 탱화로 봉안하였다.

칠성은 북두칠성, 산신은 우리 고유의 재래신앙이 불교에 스며든 것이며, 독성은 부처님의 16제자 중의 하나였던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중앙의 칠성탱은 상,중,하단으로 나누어, 상단부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가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시립하여 있으며,

중단은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가 결가부좌의 자세로 중심을 잡고 그 좌우에 협시보살로 일광·월광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하단은 수많은 별들의 무리를 나타낸 28수(宿)의 무리가 보살상처럼 표현되었는데, 권속들은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달리 배열하였다.

왼쪽의 독성탱은 천태산(天台山)에 머물며 홀로 수행하는 독성을 중심으로 2명의 시자가 시봉하고 있다.

산신탱은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 할아버지와 시자의 모습이다.. 

 

명부전(冥府殿)..

진영각과 삼성각 사이에 있으며, 청동미륵불을 조성하면서 삼성각과 함께 지었다.

원래 법주사에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이 있었으나, 이후 18C와 20C초의 가람에는 지장전이 사라졌다.

현재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봉안하고, 그 좌우로는 동자상을 대동한 각각 5구씩의 시왕상이 있다.

또한, 각 2구씩의 판관·녹사·인왕상도 배치되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96년에 조성한 지장보살도와 1992년에 주조한 동종도 있다.

명부전 외벽에는 삼면에 걸쳐 지옥세계의 무서운 장면을 벽화로 그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측면 간살은 좁고,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다듬은 원형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다듬은 원형기둥을 세웠고 기둥머리는 창방을 끼운 뒤 다포계 공포를 올렸다.

구조는 간결한 5량가로 결구하였으며,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쓴 겹처마를 얹었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로 만들었으며 기와골 끝은 막새를 끼웠고, 지붕 좌우에는 풍판을 달지 않아 구조가 드러나 있다.

정면은 모두 4분합문을 달고 측면에 외짝 출입문을 설치하여 드나든다.

지장보살과 명부세계의 10대왕을 모시는 전각으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외벽3면에는 지옥세계를 벽화로 그렸는데 이를 통해 중생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불러 생전에 선업을 닦도록 가르침을 준다..

 

명부전 지장보살삼존은 3단 불단에 모셔져 있으며,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배치하였다.

중앙 지장보살은 오른손에 석장을 잡고 왼손에 보주를 들고, 앙련과 복련의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승문형의 머리에는 피건을 두르고, 목에는 영락장식을 하였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시립하고 있으며, 향우측 도명존자는 승문형의 머리에 법의를 입고 합장하고 있다.

향좌측 무독귀왕은 관을 쓰고 관복을 입었으며 함을 받쳐들고 있다...

 

중앙불단 좌우에는 2단의 불단이 정벽에서 측벽으로 이어져 설치되었는데, 그 위에는 중앙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5위(位)의

동자상을 대동한 시왕상이 있으며, 마지막 시왕상의 옆에는 2위(位)의 판관이 각각 배치되었다..

 

또한 각 측벽에 불단이 끝나는 곳에는 양쪽에 각각 등신대의 인왕상이 더해져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후불탱화로서 1996년에 조성한 지장보살도가 걸려 있다. 이외 명부전 내에는 1992년에 주조한 동종도 있다..

 

진영각(眞影閣)..

대웅보전 왼쪽 지역에는 진영각과 명부전, 삼성각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진영각은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안에는 법주사의 창건주 의신 조사를 중심으로 모두 24분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정면에 석상(石霜)·진하(震河)·탄응(坦應)·법영(法英)·영린(玲璘)·충은(衝恩)·보흔(普欣)·장신(莊信)·함월(函月)·의신(義信)·

태고(太古)·명일(冥一)·지영(智榮)·세홍(世弘)·정준(靜俊)·명찰(明察)·도홍(道弘)·홍민(弘玟)·성인(性印) 등의 19분을..

 

왼쪽 벽에 대원(大圓)·호암(湖岩)·용허(龍虛)대선사의 세 분..

 

그리고 오른쪽 벽에 선현(亘玄)·태전(太田)대선사 두 분을 모셨다.

이전에는 선희궁 영당에 진영을 모셨으나 현재 건물을 1990년에 짓고 이안하였다..

 

진영각, 명부전, 삼성각...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

신라 성덕왕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가는 마당에 있다.

높이 약3.3m의 8각석등으로 두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현태를 취하고 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일반적인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개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가운데 중대석을 기둥 모양으로 만들지 않고 두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든 형태로 새겨 상대석을 떠받친 독특한 양식이다.. 

 

지대석은 팔각형인데 아래위에 가는 테를 돌리고 우주를 나타냈다.

윗면에는 역시 팔각의 고임을 나타냈고 다시 그 안에 원형의 고임을 새겼다.

하대석은 한겹의 커다란 연꽃문양과 그 속에 또 다른 꽃문양을 조각하였고, 그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져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버티어서고 앞발로 상대석을 받치는 모습으로 새겼다.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댄 채 머리가 위로 향한 똑같은 모습이다.

사자가 받들고 있는 상대석의 아랫부분은 두 줄의 가는 받침 위에 원형에 가까운 앙련석이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면에만 장방형의 화창(火窓)을 냈다. 옥개석은 위에서 아래로 약간의 경사를 보이고 추녀 끝에서 반전되었다.

옥개석의 위에는 복련과 공모양의 보주로 장식하였다.. 

 

보물 제1417호로 지정된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720년(신라 성덕왕 19년)경에 조성된 높이 약 2m, 붉은 화강암의 조각상이다.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유례가 드문 형상의 입상으로 인해 봉발석상(奉鉢石像)으로 불린다.

흔히 그 형상으로 미루어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으로 보고 있다. 향로 용기의 면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보살상은 앞가슴 부분의 법의가 벌어져 있고, 힘이 들어간 듯한 근육이 조각 자체를 강하게 느껴지게 한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하고 있는 희견보살의 모습을 조성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견보살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나오는 보살로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가섭존자(迦葉尊者)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보살상은 한 돌로 대좌에서 머리 위의 판석까지 조각하고, 맨 위에 언친 향로만 다른 돌로 만들었다.

상호는 심하게 파손되어 전혀 알아 볼 수 없으나 떡 벌어진 가슴, 짧고 굵은 다리와 팔은 역동적 분위기를 풍긴다.

어깨에 겉옷을 두르고 속옷은 하의에만 표현하였는데 배꼽 아래로 띠 매듭이 보인다.

두팔과 머리로 떠받친 그릇받침은 별다른 조각 없는 판석으로 그위에 올린 향로는 네겹의 굵은 연꽃잎을 새겨 둘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의 작품이다.. 

 

미륵불상 조성기념비..

 

미륵대불 조성기념비..

 

법주사 능인전(能仁殿)..

충북 유형문화재 제232호(2004년1월9일)로 지정되었으며,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앞에 자리 잡고 있다.. 

 

능인전은 팔상전(국보 제55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사천왕문(충북 유형문화재 제46호)  등과 함께

법주사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서 보존가치가 높다..

 

안에는 주존인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를 알 수 없는 16나한(羅漢)상과 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우측에 1992년에 조성한 신중탱(神衆幀)이 있다...

 

능인전 옆의 사리전..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 불상으로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 높이 6.18m, 연화대좌석 높이 2.84m, 평면 연화석 폭 2.27m이다. 

의상(倚像)이란 원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의자가 된 연봉은 연꽃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발아래 지면에는 절반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다... 

 

둥근 얼굴과 감은 듯 뜬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 반듯한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 추상성을 띠고 있다.

머리에 불룩한 나발이 있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상호는 치켜 올라간 눈 꼬리, 정면을 향한 도식적 귀, 작은 입과 더불어 군살이 보이는 턱의 모습으로 인해 정교함이 부족하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였다. 다리는 연화대좌 위에 걸쳤는데 한껏 벌리고 않은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로부터 어깨·팔·무릎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면적이고 거칠게 조각하였다.

이렇듯 현실성이 부족한 조각이지만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추상적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한다..

 

금오태전선사(金烏太田禪師) 부도와 비..   

 

동래 정씨(東萊鄭氏), 속명은 태선(太先), 호는 금오(金烏)로 1896년 전남 강진 출신이다.

1935년 김천 직지사(直指寺) 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이어서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지리산 칠불선원(七佛禪院), 서울 선학원(禪學院)의 조실 및 회주(會主)로 있으면서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1954년 5월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자 전국비구승대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불교계의 정화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1955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副宗正), 1956년 봉은사(奉恩寺)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61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도대회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였다.

 

태수스님 부도와 탑비.. 1926년 세웠다고 한다.. 

 

방인혁공덕비..

방인력은 태수스님을 친모이상으로 봉양하며 수정암 중건을 도왔으며, 그 공덕을 기려 1927년 태수스님 옆에 공덕비를 세웠다. 

 

수정암..

 

법주사 석조(石槽)..

충북유형문화재 제70호(1980년11월13일)로 지정되었으며, 만든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능인전 북쪽에 위치한다.

720년(성덕왕 19)에 조성되어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30㎝, 길이 446㎝, 너비 240㎝, 두께 21㎝의 대형 화강암 석조로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석조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하며, 바닥에서 맨 위에 이르기까지 4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다.

안팎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장식이 없어 단조로운 모습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를 경사지게 깎아내어 모각이 없게 하였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 쪽은 23㎝, 짧은 쪽은 34㎝로 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남쪽 벽바닥에는 지름 11㎝의 구멍이 있어서 실제 용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서리 일부에 약간의 파손을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금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있는 당간지주는 당간과 지주가 합쳐진 말이다.

간은 없어지고 지주만 남아있는데 흔히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년)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 높이는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명에 따라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다.

이 와중에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철당간은 녹여졌던 것이다.

현재 당간지주는 1910년 무렵 22m 높이로 다시 만들었으며 1972년에 보수하였다..

 

석연지(石蓮池)..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이다.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다.. 

 

원래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높이1.95m, 둘레6.65m의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이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고, 조각기법으로 미루어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석조물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과 팔각 기단부, 그 위의 구름과 연꽃의 형상이 조각된 원통형의 중대석, 석연지의 몸체,

그리고 상단의 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외곽에 장방형의 부재로 사각의 테를 두르고 안에 지대석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안상과 우주를 새겼다.

위에는 3단의 층단으로 체감을 줄여 올라 가다가 복련으로 살짝 덮었다.

중대석은 전체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둥글게 피어나는 구름문양이 사방을 감쌌다.

위의 거대한 상대석을 받치기 위해 윗면을 아래보다 넓게 하여 안정감 있어 보이는데, 상대석인 연지는 반구형(半球形)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3단의 커다란 앙련을 새겼고 다시 그 연꽃 속에는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나타냈다.

연지의 가장 위는 난간을 돌렸고, 연지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돌란대를 올렸는데, 둥근 원형 면마다 천인상(天人像)을 새겼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상단에 놓인 이 난간의 형상으로 미루어 혹 대형향로를 조성할 목적으로 조형물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있다..

 

철확(鐵鑊 쇠솥)..

보물 제1413호로 지정된 쇠솥으로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금강문을 들어서 오른쪽에 있다... 

 

높이 1.2m, 직경 2.87m, 두께 10.8cm의 거대한 이 쇠솥은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원래는 조사각 뒤 석옹(石瓮 돌도가니)이 있는 곳에서 시냇가 쪽으로 3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현재 절 곳곳에 있는 거대한 석조물통 및 항아리는 번성했던 법주사의 옛 모습을 알려준다..

 

법주사 궁현당(窮玄堂)..

충북 유형문화재 제234호(2004년1월9일)로 팔상전(捌相殿)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법주사의 선당(禪堂)으로 중수되었다.

1632년(인조 10년)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852년(철종 3년)에 기존의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고쳐 지은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상량문에 적힌 ‘숭정기원사임자년(崇禎紀元四壬子年)’이라는 기록에 따른 것으로,

특히 상량문에는 그 당시 법주사에 기거하던 스님들과 선당을 지은 목수들의 명단도 기록되어 있다..

 

선희궁 원당(宣喜宮 願堂)..

2004년1월9일 충북유형문화재 제23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의 전면 동쪽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건물이다.

조선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조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765년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영빈이씨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모신 후에는 법주사 관련 역대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조사각(祖師閣)’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 진영각(眞影閣)을 따로 갖추면서 지금은 빈 상태이다. 따라서 법주사에서는 ‘구(舊) 조사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벽암대사비와 속리산 사실기비..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1980년11월13일 충북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으며, 법주사 금강문 앞 수정교(水晶橋) 바위 위에 있다.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인 벽암대사(碧岩大師, 1575~1660)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1664년(현종 5년)에 세워졌으며 높이 210㎝, 너비 110㎝, 두께 35㎝이다.

빗돌을 덮은 머릿돌은 우진각지붕으로 이루어졌으며, 비문은 정두경(鄭斗卿)이 짓고 이우가 쓰고 이정(李禎)이 새겼다.

벽암대사는 1575년 보은에서 출생하여 14세에 출가, 부휴(浮休)대사의 제자가 되어 명산고찰을 순례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3년에는 부휴대사와 함께 해전(海戰)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인조 때에는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도들을 이끌고 남한산성 축조를 감독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승병을 조직해서 적병에 대항하였다.

대사는 법주사 중흥이라는 대업적을 남겼으며 1660년 구례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속리산 사실기비(事實記碑)..

충북유형문화재 제167호. 수정교(水晶橋) 앞에 있는 석비로서 비각 안에 있으며,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이다.

1666년(현종 7년)에 송시열(宋時烈)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써서 세웠다..

 

 

내용은 속리산은 산세가 아름다워 소금강산이라 불리워 중국인들도 보기 원하는 명산이라는 것과 세조가 속리산에 행차했을 때 거북바위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 등을 기록하여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당시의 민간신앙과 전설을 비판하고 있다..

 

부도전..

수정교를 건너 추래암 옆 30m 지점에 고승들의 부도를 한 곳에 모아 안치하면서 부도밭이라 부른다. ..

 

현재 이곳에는 2기의 부도와 4기의 탑비가 두 줄로 세워져 있다.

앞줄의 부도는 1949년 조성한 석상(石霜)스님과 1975년 조성한 금오당(金烏堂) 태전(太田)스님의 부도이다.

뒷줄의 탑비는 바깥쪽이 석상스님과 태전스님의 것이고, 가운데 둘은 1927년 조성한 진하(震河)스님과

역시 1927년에 조성한 탄응(坦應)스님의 비이다.

석상스님의 부도는 정방형의 지대석에 팔각형 하대석을 두어 항아리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의 면에는 '대종사석상지탑(大宗師石霜之塔)'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는 팔각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린 승탑이다.

태전 스님의 부도는 연화대석 위에 둥근 돌의 탑신을 올리고 위에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탑신에는 '금오당태전지탑(金烏堂太田之塔)'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속리 정이품송(俗離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노거수로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 15m, 가슴높이의 둘레 4.5m, 가지의 길이 동쪽 10.3m, 서쪽 9.6m, 남쪽 9.1m, 북쪽 10m이다.

1464년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랫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輦)걸린다”고 말하자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2품(지금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밑부분에 외과수술(外科手術)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아직도 수세가 싱싱하고 수형(樹形)은 우산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다.

1982년부터 10여년 동안 18m에 이르는 8각주형의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 솔잎혹파리로부터 보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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